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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자의 부탁! (잠 22:17-29)

by 【고동엽】 2022. 1. 24.

지혜자의 부탁! (잠 22:17-29)


잠언이라는 말은 바늘 잠(箴) 자에 말씀 언(言) 자를 씁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프로버브"(proverb)라고 합니다. 이 말은 "속담"이라는 말이고 "격언"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말로는 "미쉴레"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발걸음을 다스리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시켜서 이 잠언을 쓰셨는데, 이 잠언을 쓰신 이유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생활의 법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이 글을 읽음으로써 삶의 질서를 알고, 지혜를 알고, 그래서 조화를 이루며 세상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이 잠언을 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패터슨이라는 사람은 이 잠언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어리서은 사람의 수를 줄이시고 지혜로운 사람의 수를 늘리시기 위해서 주셨다."고 했습니다.
잠언을 주신 또 하나의 이유는 청년들을 위해서입니다. 잠언을 보면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주는 내용이 많습니다. 청년들은 탈선하기 쉽고, 세상을 막 살아가기가 아주 쉬운 계층이기 때문에 특별히 여기서 청년들에게 주는 글이 많습니다.
그리고 잠언은 특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지혜의 말씀만을 묶어 놓은 책입니다. 그래서 잠언의 말씀을 보면 모두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가 얼마나 복잡한 시대입니까? 이런 시대를 살아가자니까 때로는 실패도 하게 되고, 낙오도 하게 되고, 다투게도 되고, 본의 아니게 사람을 미워하게도 되는데, 이런 시대를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본문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몇 가지 오늘을 살아가는 원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약자를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일관되게 흐르는 중심 사상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을 보면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사상이 셋이 있습니다.
첫째 경천 사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경장 사상입니다. 웃어른을 존경하고 높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부약 사상입니다. 약한 사람을 보호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번 이 부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출 22:22)",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신다(신 10:18)" "나는 고아의 아버지며 과부의 하나님이라(시 68:5)", "과부에세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가 있으리라(사 10:2)", 또 본문 22절을 보면 "약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부약 사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를태면 약한 자를 보호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잠언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큰 허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부약 사상이 희박하다는 점입니다. 가진 사람은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가지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습니다.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것 까지도 뺏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과부의 것도 빼앗으려고 하고, 고아의 것도 모두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없는 사람은 먹을 것조차도 없ㅅ브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되면 원망이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불의가 발생되고, 갈등이 유발됩니다. 사회가 이렇게 되면 그 사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이 비극적인 사회 현상들은 모두 심판의 결과들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잠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약자를 보호하라." 이것이 첫 번째 지혜자의 부탁입니다.

 

두 번째는 압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시 재판은 흔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성문에서 공개 재판을 했습니다. 그것은 공정성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아주 공정하게 재판을 했습니다. 그랬는데도 여기서 또 강조하고 있는 것은 힘없는 자를 혹시라도 불공정 재판으로 억울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마음에는 약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느 사회나 약한 층의 사람들이 원망에 차 있으면 그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정치를 잘한다는 것은 이 약한 층의 사람들에게 공정함이 돌아가게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선진국이 무엇입니까? 선진국의 기준이 잘사는 것만은 아닙니다. GNP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GNP가 만 불을 넘어섰다고 해서 이제는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야단이지만 이것은 큰 오해입니다. GNP가 높다고 반드시 선진국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은 인권이 존중되고 약자가 보호를 받고, 생명이 존중되고, 자유가 ㅂ장되고, 장애자들에게 관심을 두고, 노인들을 위해서 투자할 수 있는 사회, 이를테면 인간이 그 가치를 존중받고 사는 사회, 그런 사회가 바로 선진국입니다.
여러분, 많이 배운 사람이 반드시 인격자입니까?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잘한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좋은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고, 잘산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회가 선진국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기서 특별히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약한 자를 약하다고 압제하지 말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약한 자가 보호받는 사회, 그 사회가 바로 선진국이고, 약한 자를 보호하는 사람이 바른 신앙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요즘 살인자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잔인한 사람들입니까? 사람은 이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까지 악해졌습니까? 이것이 모두 약한 사람들이 보호받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약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나타난 것만을 보고 그들을 나쁘다고 매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데는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그들도 어렸을 때는 깨끗한 마음이 있었고, 맑은 심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어렸을 때는 누구보다도 초롱 초롱한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숱한 무시와 압제와 비천함과 뼈저린 소외를 당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그 과정에서 마음속에 한을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소련의 비밀 경찰 두목을 지낸 베레아는 어렸을 때 꿈이 많았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거기다 어머니를 여의고 서모 밑에서 온갖 고초를 다 당하면서 살다가 가출하여 도시의 뒷골목에서 온갖 사회의 뒷모습을 다 목격하면서 자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비정한 인간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자란 그는 후에 소련의 비밀 경찰의 두목이 됩니다. 그러고나서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입니까?
지금도 이 사회의 뒷골목에서는 많은 소년들이 그들처럼 알게 모르게 정신적, 인격적인 압제를 받아가며 한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한이 폭발하게 되면 끔찍한 사건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끔찍한 사건들이 주기적으로 잊혀질 만하면 또 일어나곤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보면서 이 땅에서 없어져 버릴 인간들이라고 매도만 하고 말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가진 사람들, 있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무분별하게 보였으면 이 같은 역반응이 나왔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무분별하게 살아가는 층의 사람들이 이런 때 깨닫지 못하면 얼마 있다가 또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부를 가졌다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부를 무분별하게 남용할 때 수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빼앗는 결과가 되고, 모처럼 일하려고 하는 의지를 발탈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좌절하고 삶을 포기하고 마침내는 자포 자기하는 행동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번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쓴다는 의식은 극단의 이기주의입니다. 가진 것을 나눌 만한 용기가 없으면 절도 있는 삶이라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강조합니다. "약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이것이 지혜자의 두 번째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노를 품는 자와 울분한 자와 함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울려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울릴 사람을 선택하는 방법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노를 품는 사람이나 울분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지혜자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권고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친구들 가운데는 특별히 불평을 많이 하는 친구가 없습니까? 또 울분이 많고 한이 많고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지혜자는 그런 사람을 조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불만은 반드시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친구라는 존재가 얼마나 영향을 많이 끼치는 존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건전하던 아이들도 불만이 많은 아이들과 며칠만 어울리게 되면 며칠 가지 않아서 그대로 전염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잘못된 교제는 마침내는 영혼까지도 파멸로 이끌어 내고 맙니다.
사고를 치는 아이들을 보면 모두 불만이 가득 차 있는 아이들끼리 모여서 사고를 저지르고 다닙니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웠고 그것이 마침내 행동으로 옮겨져서 사고를 저지른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마음에 만족함보다는 불만이 많고, 울분을 많이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모두 가슴 속에 아쉬움과 부족함과 갈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을 채우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남을 해하게 되고,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마침내는 사람들의 생명에까지도 손을 대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마음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특별히 불평이 많고 울분이 많은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정신은 이미 병든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서는 고상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건전한 판단이나 밝은 생각이 발상되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는 온갖 원망과 시기와 분노와 파괴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상적인 교제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소망적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유달리 불평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매사를 불평스럽게 생각합니다. 한마디를 해도 그 말 속에서 소망스런 것이라고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의식이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병든 의식은 가까이하면 옮습니다. 전염됩니다. 그래서 노를 품는 자나 불만이 가득한 자와는 사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요구하시는 교훈입니다.

 

네 번째는 경제 생활에 근실하라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경제 생활에 근실해야 합니다. 여기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보증의 문제입니다.
26절을 보면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아주 유효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같은 경제의 시대를 살아가려고 하면 서로 돕고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가 힘이되고 의지도 됩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이 과정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빚에 대한 보증의 문제입니다. 빚 보증을 서 주고는 그것 때문에 누울 자리까지도 빼앗기고 나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 말씀은 경제 생활에 있어서 근실한 면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분에 넘치는 무책임한 약속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도와주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보증을 서는 일은 피차를 망하게 하고 손해를 보게 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종종 이 문제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것은 무분별한 약속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경제 생활에 있어서 너무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타인을 너무 믿지도 말고, 수완을 너무 의지하지도 말고, 요행을 믿어서도 안 됩니다.
분에 넘치는 과욕이 사람으로 하여금 실패하게 하고, 무분별하게 벌인 사업이 많은 다른 사람들까지도 함께 실패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철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잠언은 무엇보다도 경제 생활에 근실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을 침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게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고 했습니다. 지계석이라는 말은 전답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세워 놓는 말뚝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는 논과 밭의 경계를 뚝을 쌓아서 표시를 하지만 당시 중동 지방에서는 말뚝을 박아 놓거나 돌을 놓아 둠으로써 경계를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몰래 살짝 가서 돌을 옮겨 놓기만 하면 그만큼 내 땅이 넓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야밤에 가서 지계석을 살짝 옮겨 놓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남을 속이거나 해를 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또한 자기 일에 근실하라는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결론입니다.
여기 보면 자기 일에 근실한 자는 왕 앞에 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가끔 그런 사람을 보게 됩니다. 남들이 알아 주건 안 알아 주건 자기 할 일만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꾸준하게 일하다가 언젠가 하던 일이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알려져서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대통령 앞에 서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말씀일 것입니다. "자기 일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런 사람은 천한 자 앞에 서지 않고 왕 앞에 설 것이라." 이렇게 근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서 그렇게 영광을 받게 될 때도 올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같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최상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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