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적 인간! (시 55:1-8,16-17)
여름에 대체적으로 노인들이 많이 세상을 떠나신다고 합니다. 더위를 이기기가 힘들어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살펴보면 노인만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엊그제 돌아가신 분 중에는 아주 젊은 분도 있습니다. 20여 일 전에 있었던 딸의 결혼식에서 딸을 데리고 들어가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딸의 결혼식을 마치고 난 후 몸이 이상하다 싶어 입원을 했는데 그만 열흘 만에 가신 것입니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생각하면 허무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지금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인간의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인간의 가장 큰 궁극적인 문제, 종말의 문제,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들이 두고두고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또 이 문제는 남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한 내 문제이고, 내 집안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면 어떤 마음을 갖게 될까요? 이것은 삶에서 참 중요한 일인데도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먼저 이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겪었던 죽음에 대한 감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죽음이 임박해 오면 사람이 어떤 감정적인 변화를 나타나게 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인생을 영광스럽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신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정치가로서 그리고 한 남자로서 보기 드물게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흠모하는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 데도 한때 죽음의 골짜기를 드나들었던 사람입니다.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여러 번 통과한 사람입니다. 시시 각각으로 조여 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며 두려움에 떨었던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때 그렇게 두려워했던 심정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칼빈은, 다윗이 사울로부터 쫓겨 다닐 때,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가까이 올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서 이 기도문을 썼다고 말합니다. 여기 구절들을 보면 죽음이 어떤 것인가를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 놓고 있습니다.
1.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가까이 와서 더 이상 피할 수 없으졌을 때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시55:1)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 지금 다윗은 다급합니다. 사울의 압박이 자꾸만 숨통을 조여 오고 있습니다. 다윗은 죽음의 그림자가 자꾸만 가까이 오고 있음을 마음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숨을 곳도 마땅치가 않습니다. 지금 믿고 의지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숨겨 줄 사람도 없습니다. 언제 누가 밀고해서 생포되어 사울에게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믿고 의지할 대상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지금 다윗은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내 기도를 들으소서. 제발 숨지 마소서." 얼마나 다급한 고백입니까?
그리고 2절에서 이렇게 탄원합니다.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지금 사울의 군대가 점점 그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가까이 다가옥 있습니다. 그때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마 떨리고 참담한 마음이었를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중병을 앓고 있는 분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분들은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이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혼자 있을 때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그때가 가장 무서운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런 분들 곁에는 사람이 함께 있어 줘야 합니다. 찬송을 불러 주고 기도를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때의 심정을 다윗은 4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여기 보면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한다."고 했습니다. "심히 아파하며"라는 말은 원문을 보면 "심히 꼬인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임산부의 고통을 일컫는 말입니다. 임산부들이 진통이 오면 장이 뒤틀린다고 합니다. 그것을 일컬어서 "해산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해산하는 여인들이 온몸을 뒤틉니다. 왜냐하면 장이 꼬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때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다가 진정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외적인 두려움이 아닙니다. 외적인 두려움은 대부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정말 무서운 것은 "내적인 두려움"입니다. 사람이 전의를 상실하면 곧바로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그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이 용기를 상실하고, 의기를 상실하고 자포 자기를 하게 되면, 그때부터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최신 무기가 주어져도 싸움에서 집니다. 그래서 병도 무섭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병으로부터 마음이 지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좋은 약을 투여해도 효과가 없습니다.
다윗은 5절에서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내적인 두려움을 말하고, 떨림은 외적인 두려움을 말합니다. 그리고 "황공"이라는 말은 "진동한다"는 뜻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사지가 덜덜덜 떨릴 정도로 심한 두려움과 공포에 압도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얼마나 고독해지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별소리를 다하다가도 그 지경에 처하게 되면 모두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6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시55:6)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이것은 희망 사항입니다. 앞뒤가 콱 막혀 버렸으니 피해서 도망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때 다윗은 나에게 날개가 있다면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한 소원입니까?
그래서 다윗은 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55:7)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여기서 다윗은 자기를 연약한 비둘기로, 사울을 매서운 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으면 훨훨 날아서 광야로 날아 가리로다."하고 소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광야는 핍박받는 사람들이 도망가서 숨는 도피처였습니다. 거기에 도망가서 숨기만 하면 누구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또 다윗은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55:8)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 여기서 말하는 광풍은 미친 사물을 표현한 것입니다. 지금 심정이 촛불 같은 자신을 향해서 사울이 거센 미친 바람처럼 무섭게 밀려 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때 다윗이 얼마나 무서운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5절에서 말하기를 "사지가 떨리는 두려움에 휩싸였다"고 했습니다.
2. 여러분, 죽음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기 다윗의 고백을 보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나 가십니까? 우리들은 신앙인인 까닭에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현재와 장래를 함께 생각하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안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냥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귿이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날이 현실로 다가오면 사람들은 그때 가서 당황하고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망연해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그저 먹을 것이나 생각하고, 입을 것이나 생각하고, 모으는 일에만 골몰해서 살아가니까 그렇지, 좀 진지하게 앉아서 깊이 생각을 하면 이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가니까 그렇지 어느 순간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면 정신이 전쩍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희희 낙낙하는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초상집에 가면 그 동안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던 인앵의 종말을 그곳에서 보게 되고, 그곳엣 심판을 목격하게 되고, 그 죽은 사람을 통해서 객관적인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지금까지 잊어버리고 살던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굳이 초상집에 가 보라고 말씀사신 것입니다.
언젠가 영구차를 타고 공동 묘지에 갔다가 하관을 마치고 운전사들과 함께 영구차에 올라가 앉아 있다가 운전사들끼리 주고 받는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그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루는 영구차에 관을 싣고 가서 매장을 하고 가족들을 집에 데려다 주고 나니까 그만 통금에 걸려서 차고까지 갈 시간이 없어서 도중에 차를 세워 놓고 차 속에서 밤을 새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수와 같이 캄캄한 밤에 희미하게 촛불을 켜 놓고 영구차 안에서 밤을 새우는데 때 마침 밖에서 비가 오기 시작하였더랍니다. 사람은 이런 때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영구차 속에서, 한밤중에, 촛불을 켜 놓고, 그것도 지금 밖에서는 궃은 비가 내리고 있으니 얼마나 구색이 잘 맞는 밤입니까? 그 밤에 조수와 함께잠을 청하니 잠이 오겠습니까?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어디서 "이리 오너라"하는 말이 들려 오더랍니다. 이 사람들이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고 합니다. 지금 긴장을 하고 있으니까 그러려니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5분쯤 지난 후에 또다시 "이리 오너라"하고 또렷한 음성이 들려 오더랍니다. 사람이 이쯤 되면 별수없어집니다. 권세가 있고 없고, 돈이 있고 없고, 뱃심이 있고 없고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지금까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던 자기 자신의 문제, 지금까지 내면의 속에 깊이 감추어 있던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생에 대한 공포와 교차되면서 자기 자신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이 운전사들은 남달리 영구차에 시체를 싣고 매일같이 공동 묘지를 이웃집 드나들 듯이 왔다갔다했지만 자기 자신의 영혼 문제, 실존의 문제,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고, 생각도 못하고 그저 돈 몇 푼 더 받고 술 한 잔 더 얻어 마시는 것에만 골몰했는데 그날 밤 갑자기 영혼 깊숙히 파고드는 기이한 소리를 듣게 될 때 비로소 이 사람들은 "나도 지금 살아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지금까지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보지를 않았는데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니까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의지심이 생기더랍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면 신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점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긴장을 하고 있는데 또 5분쯤 후에 "이리 오너라"하는 소리가 아주 음흉하게 들려 오더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참다 못해서 전등을 켜 들고 함께 소리나는 출처를 찾아서 문을 열고 칠흙같이 어두운 밖으로 나가는데 머리가 있는 대로 모두 하늘로 치솟아 올라 더랍니다. 조심스럽게 나가는데 그때 갑자기 "이리 오너라"하고 그 소리가 또 들려 오더랍니다. 이 사람들이 그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전등을 소리나는 곳에 비추어 보니까 자동차 밑에 앞바퀴와 뒷바퀴를 연결하는 새시 위에 어떤 사람이 술에 만취된 채 누워서 기분 내키는 대로 한마디씩 내뱉은 것이 영구차 안에 있던 사람들을 그렇게 놀라게 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얼마나 화가 났던지 그만 그 술꾼을 끌어내어 실컷 때려 주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 사람들은 그날 밤에, 지금까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인간의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반성해 볼 기회를 가졌고, 자신을 되돌아 보며 정돈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3. 우리도 장차 죽게 될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왕은 늘 시종 한 사람을 곁에 대동히켰는데, 그의 손에는 언제나 사람의 해골이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주연상을 베풀어 놓고 취해서 이성을 잃을 정도가 되면 이 시종은 해골을 술상 머리에 올려 놓고 말하기를 "폐하여, 폐하도 결국 이렇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읊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한창 취기가 올라서 정신이 몽롱해질 때 그 소리에 그만 임금은 정신을 가다듬고 주연상을 물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지혜 있는 왕입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은 나도 장차 저렇게 죽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방종도 하고, 만용도 부리고, 때로 교만해지기도 하고, 부질없는 일에 매달려서 인생을 소비하기도 하고, 허탄한 곳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다가 어느새 그날이 다가오게 되면 모두 당황하고 이게 아닌데 하고는 탄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뇌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의 시간에 직면한 다윗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16절에서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그리고 17절에서 이렇게 다짐합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지금까지 요령껏 피해 다니기도 했고, 재주껏 도망도 다녀 보았는데 결국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 내 운명을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여기서 결론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울의 손에 맡겨 죽이시면 죽을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다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각오입니다. 이것이 가장 지혜 있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우리들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우리들도 별수없이 어느 시간이 되면 그 고독한 실존의 시간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 시간을 기쁨으로 맞이하려면 나의 전존재를 하나님께 의탁해 놓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이 땅에서 가장 힘있는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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