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저울! (단 5:1-9, 25-31)
고대 서양 역사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로마 제국에 대한 역사입니다. 로마 제국은 그 당시에 문화나 문명이 고도로 발달되고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로마의 시민이 된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알았고, 또 로마 시민권이라도 받게 되면 그것을 최고의 자랑으로 알았습니다.
그런 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당시 로마의 철학자로 유명했던 세네카 같은 사람은 나는 세 가지를 감사한다고 공언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첫째로 감사한 것은 내가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고, 둘째로 감사한 것은 사람 중에서도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이고, 셋째로 그 많은 나라들 가운데서도 자랑스러운 로마에서 태어난 것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그 시대의 로마는 위대했습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에서는 로마 제국보다 더 위대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벨론이라는 나라입니다. 이 바벨론은 로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권위를 지닌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바벨론을 "바벨론 대제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나라의 왕이 벨사살이라는 사람입니다. 벨사살왕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왕이 유다 왕국을 쳐서 수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17년간에 걸쳐 지은 성전을 부수고 그 속에 있던 금을 그릇 등 성전 기물들을 모두 바벨론으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본문 말씀은 마침 벨사살왕의 생일날에 일어 났던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벨사살왕의 생일날에 전국 각지에서 귀인 1천 명이 초대되어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국에서 힘께나 쓰는 사람은 그곳에 다 모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잔치가 얼마나 회려했겠습니까? 그리고 전국의 귀인 1천 명에 의해 떠받들린 왕은 또 얼마나 영광스런 존재입니까?
그때 영광에 도취된 벨사살왕은 부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을 부수고 쳐들어가서 빼앗은 온 성전의 기물들, 금으로 만든 그릇들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술을 따라 마셔 가면서 잔을 돌렸습니다.
그 기물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 드릴 때 사용되었던 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도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다루었던 성전의 기물입니다. 그런데 그 기물에다 술을 따라 마시고는 사람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날 이 벨사살왕은 그렇게 되취되었습니다.
그렇게 흥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전국에서 1천여 명의 귀인들이 모인 밤이 깊어가던 그곳에 갑자기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나더니 흰 벽에다 글을 써 내려가더라는 것입니다. 한창 흥에 도취되어 있던 벨사살왕이 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난데없이 몸통도 없는 뚝 잘린 손이 나타나더니 손가락으로 벽에다 글씨를 휘갈겨 써 놓고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유대학자들은 그 손이 가브리엘 천사의 손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만 그것은 누구의 손이든 상관없습니다.
지금 한창 흥에 도취되어 있던 왕의 얼굴색이 변해 버렸습니다. 그때 이 왕이 얼마나 놀랐던지 6절을 보면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혔다"고 했습니다. 순간 술 맛이 떨어지고 정신이 번쩍 났을 것입니다. 그때 벽에 써 놓은 글씨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말인데 이게 무슨 뜻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의 유명한 술객, 술자, 점쟁이들을 모두 불러다가 해독을 시켜 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붙잡아 온 다니엘이라는 사람을 불러다가 해석을 시켜 보니 그 글은 이런 뜻이었습니다. "메네"라는 말은 "하나님이 당싱의 권세를 오늘로서 끝냈다"는 말이고, "데겔"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당신을 저울에 올려 놓고 달아 보니까 함량이 미달 되었다"는 말이고, "우바르신"이라는 말은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두쪽으로 갈라 놓으실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당신을 저울에다 올려 놓고 달아 보시니 자격이 미달 되어서 버리실 것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 말을 듣고 나서 이 벨사살왕이 얼마나 기겁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몇 시간이 지난 새벽 시간에 벨사살왕은 피살되어 죽고 그 나라는 망해서 메대와 바사, 두쪽으로 나누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 준비를 하면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저울에 올려 놓고 달아 보시면 나는 과연 그 무게가 얼마나 나갈 것인가, 내 딴에는 열심히 살아간다고 생각은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나의 무게는 얼마나 될 것인가?" 여러분은 그런 생각 안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져 달린다면 얼마나 나갈 것 같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다면 오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져서 만족할 만큼 무게가 나간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벨사살왕처럼 달아 보니까 형편없이 함량 미달이라면 나는 그 동안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막상 달아 보니까 속빈 강정처럼 번쩍 들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을 저울에 올려 놓고 달아 보신다면 무엇을 달아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어떤 점을 달아 보시겠습니까? 아마 이런 것을 달아 보실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의 믿음을 달아 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저울에 올려 놓고 달아 보신다면 틀림없이 제일 먼저 우리들의 믿음이 얼마나 여물었는가를 달아 보실 것입니다. 즉 내가 지금 얼마나 주님을 나의 구주로 확실하게 믿고, 의지하며, 신뢰하고 살고 있는가를 달아 보실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틀림없는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믿음 상태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 예수를 나의 생활의 우선 순위 가운데서 몇번째에 놓ㄱ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나는 지금 얼마만큼이나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나에게 지금 십자가가 주어진다면 나는 얼마 만큼이나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평소 나는 삶을 얼마나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나는 지금 얼마나 소중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등등을 모두 종합해서 달아 보실 것입니다. 과연 나의 믿음의 무게는 얼마나 나갈 것인가? 여러분 이것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사람들은 흔히 열심히 봉사를 하고, 철야 기도도 하고, 금식 기도도 하고 그러는 것을 믿음이 좋다고 해석해 보립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물론 믿음이 있으니까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먼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에서 출발됩니다.
여기서 모든 힘이 나오고, 여기서 삶의 내용이 만들어지고, 신앙의 정신이 출발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얼마나 확실하게 신뢰하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분이 오늘 나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면 여러분은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지시겠습니까?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에게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하필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갈릴리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갈릴리에 살고 있던 유다라는 사람이 선동을 해서 로마를 상대로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이 혁명이 실패함에 따라서 마리우스라는 로마의 장군이 군대를 몰고 와서 당시 조그만 갈릴리라는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 2천 명을 붙잡아 길거리에 세워진 십자가에 못을 박아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매달려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갈릴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면 남녀 노소할 것 없이,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모두 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누구도 로마를 향해서 도전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연을 가진 갈릴리 사람들에게 지금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주님께서 지라고 하시면 여러분은 기쁨으로 질 수 있습니까? 그런 용기가 없다면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진 우리들의 신앙의 무게는 아주 보잘것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들의 믿음의 무게를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둘째는 우리의 성실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는 이야기는 책임 있게 인생을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신뢰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저울에 올려 놓고 달아 보신다면 이것을 달아 보실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신의가 있고, 진실성이 있는가?"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자본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 가서 한국 교포드에게 강조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 땅에서 장사를 하여 돈을 벌고 취직을 하여 잘살려고 하면 적어도 세 가지의 신의를 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한국인의 말은 믿을 수가 있다. 두 번째는 한국인의 가게에 가서는 안심하고 물건을 살 수 있다. 세 번째는 한국 기술자에게는 마음 놓고 일을 맡길 수 있다로서 이 세 가지를 인정받아야 타국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신의 있고, 믿음 있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지면 얼마나 무게를 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을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는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신의가 따라야 합니다. 진실성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자니까 신앙인들이 때로 이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고 여러움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진실성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속의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이 예수를 믿지를 않아서 속이 상했습니다. 마침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게 되어 남편에게 사정을 하다시피해서 부흥회에 참석을 시켰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결신 시간에 "믿을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부인은 옆에 앉아 있는 남편에게 손을 들라고 성화를 해댔지만 남편은 고집을 부리고 끝내 손을 들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부인은 남편에게 화를 내면서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고집이 세냐고 핀잔을 합니다.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듣고만 있던 남편이 집에 오자마자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이고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오, 그런데도 당신과 나와 다른 점이 무엇이 있소? 내가 화투할 때 당신도 했고, 내가 술에 취할 때 당신도 취했고, 내가 담배를 피울 때 당신도 피웠고, 내가 적당히 속이며 세상을 살아갈 때 당신도 그랬고.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서 굳이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단 말이오? 나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싫소." 이 말에 무슨 할 말이 필요합니까?
그러니까 신앙은 입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는 내용이 있어야 하고, 구체적인 삶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모습에서 믿음이 나타나고, 진실성이 나타나고, 무게가 실리는 것입니다. 그때 세상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사람드른 그를 두려워하게 되고, 어렵게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철학자 칸트는 아버지가 고향인 폴란드 슐레지엔으로 가던 중 말을 타고 깊은 산길을 가다가 강도떼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 다 빼앗기고 말도 빼았겼습니다. "이제 더 숨긴 것이 없느냐"고 묻는 말에 너무 무서워서 아무것도 없다고 하고는 도망치다시피 나왔습니다. 가다가 정신이 나서 보니까 몸 속에 금덩어리 하나를 숨긴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되돌아가서 강도들에게 희개를 했습니다.
"아까는 당신들이 너무나 무서워서 몸 속에 금덩어리가 들어 있던 것을 모르고 말하지 않았소, 그런데 가다가 몸 속에 금덩어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소. 미처 나도 모르고 한 것이니 용서하고 이제 받으시오." 그러면서 금덩어리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강도들이 한참을 쳐다보더니 아까 빼앗았던 것 모두 내주면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더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이 강도들이 볼 때 이 사람은 신실하다 못해 거룩하기까지 했고, 그래서 두려운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악해도 진실은 여전히 진실이고, 거룩은 여전히 거룩이고, 진리는 여전히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비록 그렇게 살면 한때는 손해가 될지라도, 여전히 말씀하시기를 진실하라고 하십니다. 강도들 앞에 서 있는 이 무지할 정도의 순진하고 진실한 노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벨사살에게서 이 같은 진실성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저울에 올려 놓고 달아 보아도 진실성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생각해 볼 때 얼마나 진실합니까? 오늘 내가 하나님의 저울에 올려진다면 나는 무게가 과연 얼마나 나갈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우리의 거룩입니다.
사람에게는 이 거룩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사람은 마음에 경외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이 악해집니다.
여러분, 공산주의를 보십시오. 얼마나 잔인합니까? 그것은 그곳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경외심도 없고 거룩도 없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를 보십시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으니까 사람들을 그렇게 죽이지 심판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늘을 향한 경외심이 있는 사람 같았으면 그런 짓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가 염려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에도 두려운 것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부모도, 스승도, 어른도 이제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고, 심지어는 하늘조차도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매일같이 사람을 찌르고,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죽여도 누구를 죽입니까? 어린 아이들을 죽이고, 부모를 죽이고, 자식을 죽입니다. 죽여도 그냥 죽입니까? 무자비하게, 칼로 찔러도 한두번 찌르지 않습니다. 죽인 후에는 또 그냥 놔 둡니까? 토막을 내서 갖다 버리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보통 일입니까? 이것이 과연 무서운 것이 있는 사람들의 소행입니까? 이것이 무서운 세상입니다. 겁이 나는 세상입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벨사살이라는 왕을 보십시오. 이 사람도 세상에 두려운 존재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지낼 때 사용되었던 그릇에 감히 술을 부어서 마셨습니다. 그게 보통 그릇입니까? 대제사장도 일 년에 단 한 번 들어가서 그 그릇을 사용했습니다. 그 그릇을 사용할 때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루었는데 이 사람은 겁도 없이 거기다 술을 따라 마셨습니다. 그리고 귀인들에게도 돌려 술을 따라 마시게 했습니다. 그랬으니 그가 온전했겠습니까?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무지한 만용을 부릴 수가 있습니까? 사람이 거룩을 지니지 않고 살게 되면 이렇게 무지한 만용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 같은 거룩성,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이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까? 언제나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질 것을 염두에 두고 살고 계십니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손에서 저울이 들려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그 시대를 방종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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