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시 1:1-3)
세상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이 있고 복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분은 참 복이 있게 삽니다. 그래서 매일 즐겁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복도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면 혼자서 세상 고생 다 짊어지고 사는 것처럼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탄식을 하면서 말합니다. "이 세상은 참 공평치가 않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엄청나게 행복하게 살고, 불행한 사람은 또 엄청나게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예요."
오래전에 읽은 이야기인데도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는 어느 단편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잘생긴 한 젊은이가 일류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회사를 창업해서 유능한 기업으로 성장시켜 많은 사원을 거느린 사장이 되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양지 바른 언덕에 아름다운 양옥 집을 짓고 예쁜 여인과 결혼을 해서 아들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젊은 사장은 부족한 것 하나 없이 모든 것을 구비하고 살았습니다. 아주 완벽하게 성공한 사람이고 세상에 좋은 것은 다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밑에서 일하던 초라하고 못 배우고 가난한 노동자 한 사람이 사장 집에 침입하여 부인과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경찰이 쫓아오고, 부모님이 와서 자수하라고 권유를 합니다. 그때 이 청년이 울부짖으며 하는 말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왜 너만 세상에서 좋은 것은 다 가지고 있는거냐, 어째서 세상이 이렇게도 불공평 하냐."
그렇습니다. 세상에 보면 행복한 사람은 마냥 행복하게 살고, 고생을 하는 사람을 보면 너무나 많이 고생을 하면서 삽니다. 한쪽에 어둠이 있는가 하면 또 한쪽에는 밝음이 있습니다. 한쪽에 웃음이 있으면 또 한쪽에는 슬픔이 있습니다. 선이 있고 악이 있으며, 높음이 있고 낮음이 있으며, 더위가 있고 추위가 있으며, 낮이 있고 밤이 있습니다. 낮이 있기 때문에 밤이 표현되고, 어둠이 있기 때문에 밝음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본문 시편 1편을 보면 바로 이 같은 이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시편 1편은 150편의 시편 전체의 서문입니다. 여기 보면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두 인간상을 통해서 복 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복이 무엇입니까? 흔히 사람들은 복을 말할 때 오래 살고, 부하게 되고, 귀하게 살고, 아들 많이 낳는 것을 복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래서 옛부터 복을 말할 때는 "수부귀다남"(壽富貴多男)이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복은 복입니다. 오래 사는 것은 누구나 다 원하는 것입니다. 부하게 살고 귀하게 사는 것도 다 원하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딸 많은 것보다는 아들 많은 것을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꼭 복이라고 우길 필요는 없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욕일 수 있고 저주일 수 있습니다. 부하게 사는 것도 어떤 이에게는 화가 될 수 있습니다. 아들 많은 것도 반드시 복일 수는 없습니다. 모두 효자일 때 복이지 깡패 아들을 둔 것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같은 복을 외형적인 복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이보다 더 진지한 면에서 그리고 보다 더 근본적인 면에서 복을 생각하고, 소망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보다 근본적인 복은 무엇입니까?
여기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복은 "아쉘"이라는 복입니다. "아쉘"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가 곧 복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아무리 오래 살고 귀하게 살아도 하나님을 모르고 살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참복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하나님이 범사에 함께하여 주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유능하고 부요하고 성공을 했어도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부와 성공은 복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떠나 버리시면 나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인생일 뿐입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그가 왕좌에 앉아 있고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어느날 하나님이 그에게서 떠나 버리시니까 그 순간부터 그는 정신 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그 마음이 병들고 정신이 병들어 마침내는 폐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몇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사람입니다.
감옥에 간 사람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보았더니, 자발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아주 적었고 대부분은 누군가와 함께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혼자서는 죄를 짓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죄에는 공범이 있게 마련입니다. 마치 고구마를 캘 때 고구마 순을 잡아 올리면 줄줄이 매달려 나오듯이 죄인 하나를 잡으면 여러 명이 줄줄이 잡혀 나옵니다. 모두 악한 사람의 꾀를 좇다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악한 사람의 꾀에 빠져 죄를 짓게 되면 평생 쌓아 올린 공든 탑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립니다. 공직자들이 구속되는 것을 보는데 그 사람도 혼자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악한 사람의 꾀에 빠져 따르다 보니까 결국에는 그가 일생 쌓아 올린 공든 탑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무너져 내리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혹시 지위도 얻고, 물질도 얻고, 욕망도 채워졌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그 지경이 되면 반대로 하나님을 잃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세상 것을 얻는 대신 하나님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이 같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단호히 끊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둘째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큰 잘못을 저질러야만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근본적인 죄, 죄 중의 죄인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가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라고 했습니다. 옛날 희랍에서는 교만을 가장 큰 죄라고 보았습니다. 불교에서는 탐욕을 가장 큰 죄라고 했고, 유교에서는 불효를 가장 큰 죄로 여깁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살인을 가장 큰 죄로 취급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 이것을 가장 큰 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면 죄인의 길에 설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넘어지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면 세 가지 측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 하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내가 나를 볼 때 무엇보다도 진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이 보는 나의 모습"입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아 주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신이 자신을 아무리 잘 보아도 그것은 편견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자기 양심으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아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서 열린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셋째 오만한 사람과 사귀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기 오만한 사람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섭리나, 심판이나, 은총도 무시하는 사람을 오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신의 존재나 심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서습없이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역사를 보면 이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자비했습니다.
히틀러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무신론자에다, 신에 대해서 증오감까지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통치하는 동안 가장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유태인들과 교회입니다. 유태인들은 모조리 죽였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구덩이에 몰아놓고 생매장을 했고, 창고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질렀고, 가스실에 집어넣고 죽여서는 그 죽은 사람으로 기름을 짜서 그 기름으로 전선에서 불을 피우게 했고, 빨랫비누를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오만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짓입니까? 그래서 무신론자가 집권을 하면 나라가 불행해지고, 동시에 그 시대 역사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철학자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쇼펜하워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염세주의자에다 극단의 비관주의자입니다. 신의 섭리를 철저하게 부정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우리가 이 괴로운 세상에서 즐거움을 찾아보려고 발버둥이를 쳐 보지만 필경은 헛구고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주어진 최상의 길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기왕 태어난 사람에게 주어질 차선의 길은 빨리 죽는 길뿐이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도 철학이라고 가르쳐서 그를 따르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너도 나도 차선의 길을 가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73세까지 다 살고 죽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죽을 때는 편안히 죽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하숙집에서 독신으로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살면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피리를 불며 살아가다가 쓸쓸히 죽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니체입니다. 이 사람도 하나님을 철저하게 부정하며 오만하게 살다가 끝내는 마음과 몸이 병들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오만한 사람과 사귀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만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없고 병든 자아만 들어 있습니다. 그 병든 자아가 잘못 움직일 때는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뿐 아니고 남에게까지 무서운 피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신론자와 비관주의자는 별 재주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해도 권세를 가지면 안 됩니다.
넷째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눅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계1:3)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편 "(시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그 말씀을 묵상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청교도들을 이끌고 종교 전쟁을 일으켰던 크롬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전쟁터에서도 주머니에 조그만 성경책을 넣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져 기절을 했는데 나중에 정신을 하리고 보니까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성경책에 총알이 박혀 있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명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가 외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육신의 생명을 구했고, 내 영혼의 생명까지도 구하셨다."
전쟁터에서도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에 의지해서 도움을 구하는 모습이 얼마나 진지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곳이 비록 전쟁터이지만 그런 사람에게는 평화가 있고, 용기가 생겨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보답하십니까? 3절을 보면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이 형통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의 특징은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위도, 가물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복된 사람은 이와 같이 매사가 형통하다고 했습니다. 환란의 때가 와도, 심판의 시간이 다가올지라도, 내일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재산이 세상에 또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사람을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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