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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자유한 사람들! (고전 15:19-22)

by 【고동엽】 2022. 1. 24.

참 자유한 사람들! (고전 15:19-22)

 

 

오늘은 종교 개혁 기념 주일입니다. 가톨릭에서는 마르틴 루터를 이단자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당시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킬 그때는 역사상 가톨릭의 위세가 가장 극에 달했을 때입니다. 얼마만큼 세도가 강했었느냐 하면 가톨릭의 교황이 로마 황제를 폐위시킬 만큼 세도가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를 미워해서 파문 선고를 내리고 지배권마저 박탈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다급해진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알프스 산정의 카놋사라는 성문에 올라가 눈 내리는 성문 밖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3일 동안 교황에게 사죄를 올린 후에 비로소 용서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카놋사의 굴욕"입니다.
종교가 이렇게 세속적인 힘이 강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톨릭이 이렇게 세속적인 힘이 강해지게 되니까 자꾸만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가톨릭은 극도로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가톨릭이 타락한 모습에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매관 매직입니다. 당시 봉건 제도하에서 지방의 두령 한 사람을 임명하게 되면 뇌물로 봉직세를 받듯이 가톨릭도 새로 임명되는 교구장들로부터 1년 수입 전부를 뇌물로 받았습니다. 이것은 당시 관행이었습니다. 당시 가톨릭이 이렇게 타락해 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면죄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독일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의 마그데부르크 지역에 알베르트 브란베르크라는 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처 마인츠 지역의 교회 주교가 죽었습니다. 그때 이 브란베르크 주교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마인츠 교회의 주교직도 자신이 함께 겸직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권한이 그만큼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주교가 교황에게 두 지역의 주교직을 겸직하게 해 달라고 청원을 했습니다. 그때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서 돈이 필요할 때였습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전갈이 오기를 12사도의 수에 따라 1인당 1,000카트라씩 모두 12,000카트라의 돈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많은 액수의 돈입니다. 그래서 이 주교가 제안하기를 그 돈은 너무 많으니 일곱 가지의 대죄를 따라 7,000카트라를 내겠다고 제안 했지만 결국 10계명 수에 따라 10,000카트라에 합의하고는 은행에서 융자를 얻어서 돈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교가 가까스로 돈을 꾸어서 내기는 했는데 은행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 주교는 고심을 하다가 교황에게 보고하기를 "돈을 갚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교황이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면죄부를 만들어 파는 일입니다. 면죄부를 만들어 팔되 수입에서 반은 교황청에 바치고, 반은 빚 갚은 데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단, 다른 지역에서는 팔지 말고 마그데부르크 교구 안에서만 팔라는 것이었습니다.
루터가 가만히 보니까 자기 교구의 신자들이 어딘가 가서는 종이를 한 장씩 사 가지고 오는데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알아보니까 마그데부르크라는 지역에 가서 면죄부 한 장씩을 사 가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을 사 가지고 왔느냐고 물으니까 "면죄부를 사기 위해서 돈을 통에 넣으면 딸그랑 하고 떨어지는 순간 모든 죄는 사함 받는다"고 해서 비싸게 주고 한 장씩 사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도 나도 가서는 면죄부를 한 장씩 사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 종교가 얼마나 타락을 하고, 부패하고, 변질되었다는 말입니까? 그때 젊은 수도사 루터는 피가 끓었습니다. 혈기와 의분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당시 절대 권력, 절대 신성한 교황권을 상대로 해서 조목 조목 따져서 95개 조항의 비리를 써서 대자보를 붙여 놓고 대항했던 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입니다.
결국 루터는 파문당했고, 뜻 있는 사람들과 개혁 모임을 가지게 된 것에서 오늘의 개신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모두 하나의 성경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이 이 때문입니다. 교회가 신앙의 건강을 상실하면 이렇게 타락하게 됩니다. 교회가 이렇게 타락하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질에 대한 관심입니다.

 

사람이나 종교나 예술이 타락을 하게 되면 맨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에 대해서 지나치게 욕심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순수한 면이 퇴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타락한 예술인들을 보십시오. 돈에 대해서 너무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 예술이 깊이도 없어지고 값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예술은 천해지는 것입니다.
신앙도 되도록 맑고, 깨끗하고 순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예민해집니다. 그러면 조그만 죄를 짓게 되어도 마음이 아프고, 밤잠을 설치게 되고,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야 빨리 가서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수도할 때 얼마나 마음이 예민했던지 나쁜 생각만 마음에 스쳐 가도 수도원장을 찾아가서 고해 성사를 하곤 했습니다. 고해 성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또 나쁜 감정이나 생각만 스쳐 가도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또 고해 성사를 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마음이 예민해서 그렇습니다.
죄를 마음에 묻어 두고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밤에라도 나가서 회개를 하고, 참회를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루터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왔다갔다하니까 이 수도원장이 루터에게 "이 다음에 올 때는 좀 큰 것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인은 이렇게 마음이 예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갱신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는데도 마음에 전혀 느낌이 없고, 밤에 잠도 잘 잘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심령이 마비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감각이 무디어졌다는 말입니다. 신앙이 그렇게 되면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흐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물질 중심이 되어 버립니다. 신앙이 이렇게 물질 중심으로 변해 버리면 힘을 잃게 됩니다. 영력을 잃게 됩니다. 신앙이 불순해집니다. 그래서 이단일수록 반드시 물질이 개입되는 것입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우선 건강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현실 중심화입니다.

 

종교가 쇠퇴하고, 타락하고, 오염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또 있습니다.그것은 내세에 대한 기대가 둔감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주 현실 중심 신앙이 되어 버립니다. 종교 가운데서도 기독교가 내세관이 희박해지고, 현실 중심화된다면 그것은 죽어 가는 신앙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내세관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모든 신앙의 초점은 내세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위해서 수난을 받고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고, 굶주리고, 목 베임을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순교까지 하는 것은 모두 내세관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 내세가 없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헐벗고, 굶주리고,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그 고생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모두 신앙인들에게 내세관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서 이 내세관이 흐려지면 흐려진 만큼 현실 중심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오늘 이 시대가 바로 내세관이 가장 흐려진 때입니다. 이 시대는 물질 우선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물질을 보다 많이 소유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현실 위주의 삶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에서도 내세관에 대해서 설교하기를 꺼려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은 천국이라는 말을 개념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국이라는 말은 장례식 때나 한 번 부르면 끝입니다. 있다면 오직 현실뿐입니다. 모두 오래 사는 데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몸에 좋다는 것이면 아무리 비싼 것이라도 사다 먹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려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모두 현실 중심 신앙의 모습입니다. 지금 이런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학생들이 굶는 한이 있어도 용든을 절약해서 책을 사서 호롱불 밑에서 날 새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을 살찌우고 정신을 살찌우는 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결과 몸은 가늘었어도 마음은 풍부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학생들을 보면 몸은 살이 많이 쪘는데 책꽂이에 꽂힌 책을 보면 빈약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면 마음들도 빈약하고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정신을 살찌우고, 영을 살찌우는 데는 그만큼 등한하고 무관심하고, 그런 반면에 몸을 보하는 일에는 관심이 대단합니다. 내세 지향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적습니다. 모두 내세 신앙을 잃어버리고 현실 중신이 되어 버려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신앙인이든지 비신앙인든지 내세에 대한 기대를 잃어 버리면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오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 입에서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그런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그런 찬송은 장례식 때 한 번 부르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은 꿈과 이상과 내세 지향적인 것인데, 신앙인이 내세에 대한 꿈이 없고 현실에 깊이 묻혀서 산다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종교가 그 사회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데 영향은 고사하고 내세에 대한 꿈조차 상실한 채 현실 종교로 전락해서 돈벌기 위해서 면죄부를 만들어서 팔고 있다면 그 종교가 무슨 힘이 있고, 무슨 생명이 있고,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젊은 수도사 루터가 목숨을 걸고 교황권을 향하여 면죄부가 구원을 주는가, 면죄부가 죄 사함을 줄 수 있는가 한번 토론해 보자 하고 대자보를 붙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강조하기를 구원이나 죄 사함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지 그따위 종이 한 장에 매달리거나 현혹되지 말라고 호소를 했던 것입니다. 종교 개혁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내세 신앙은 건전합니까? 지금 여러분이 만일 내세에 대한 소망이 흐려지고 오직 현실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살고 계시다면 여러분의 신앙도 빨리 갱신되어야 합니다. 그 상태로 오래가면 그 신앙은 윤리적이고 무미 건조한 신앙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우리 앞에 내세가 없다고 한다면 젊은 나이에 이렇게 목회하면서 좁은 길을 걸을 용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내 인생이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본문에서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이 내세 신앙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생명의 고갈입니다.

 

신앙이 생명력을 잃고 내세 신앙이 희박해지면 현실 중심이 되어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서 생명이 고갈되어 버립니다. 루터는 가톨릭의 생명이 이미 죽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된다 하고 거기로부터 스스로 나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가 생명력을 잃고 형식만 남게 되면 비참해집니다. 바리새인이 달리 바리새인입니까? 형식만 있는데 거기에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율법은 있는데 복음이 없습니다. 거기에 외형은 있는데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준엄하게 비판을 가했던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직분의 고하, 연륜의 길고 짧음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지금 얼마나 생명력이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지금 내 신앙이 생명력이 있는 믿음인가 아니면 아주 형식적이고 껍데기만 남은 신앙인가는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여러분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우리들의 신앙이 이렇게 형식만 남고, 외형만 그럴듯하고, 우리가 현실 중심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서 떠나십니다. 또 성령께서도 우리들에게서 철수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모두 버려진 자들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위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하고, 자유하고, 힘이 있는 사람들이 되려고 한다면 먼저 신앙이 맑고 깨끗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이 힘이 있고, 내세관이 분명해지고,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있는 사람이고 참으로 자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종교 개혁 주일에 받는 교훈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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