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자유자인 사도 바울! (고전 9:1-2/갈 2:20)
요8;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사람들은 이 땅에 살아가면서 국가로부터 '언론의 자유, 종교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 여러 가지 자유를 보장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를 억압받고 빼앗길 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이처럼 세상 적인 것에도 자유를 귀히 여기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심지어는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생명도 불사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자유도 세상 적이고 정치적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죄에서의 자유입니다. 요8;34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의 문제만 해결되면 우리도 참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자유자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기독교의 위대한 금자탑을 쌓아올린 사도 바울의 신앙과 인격, 그리고 그의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토대로 ◀참 자유자인 사도 바울!▶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위대한 전도자요, 신학자요, 설교가요, 저술가입니다. 사도 바울을 잘 알아서 우리들의 신앙에 접목을 시킨다면 큰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의 신상명세서를 보십시다!
1. 사도 바울은 <자랑거리가 너무나 많은 사람>입니다.
우선 그는 지적으로 완벽했습니다. 그는 헬라 철학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당시 세계의 사상 체계는 헬라 철학이 중심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철학 사조에 아주 능통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거기다 혈통도 가문도 화려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가문이나 족보 그리고 혈통을 굉장히 중시하던 때입니다.
바울은 빌3;5절 이하에서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나는 이스라엘의 족속이고, 베냐만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조건은 당시 행세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거의 완벽한 조건을 다 갖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거기다 학벌로는 당시 가장 명성이 있었던 '가말리엘' 학파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이 학파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명문학파입니다. 거기다 유대인으로서는 드물게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바울의 집안이 명문가의 가문에 속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사실은 그가 영적인 체험을 깊이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계시라는 계시는 다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삼층 천 즉 낙원이라고 일컬어지는 셋째 하늘까지 갔다 왔습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입신해서 천국의 비밀을 보고 왔다는 것입니다.
고후12:2절 "그가 세 째 하늘에 이끌려 간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바울은 이렇게 한 사람의 신앙 인으로서 거의 완벽한 조건을 다 갖춘 인물입니다. 학식, 명예, 학벌, 혈통, 가문, 열심, 정열 등 한 가지도 나무랄 데가 없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아주 완벽한 사람입니다.
2. 그에게도 <한 가지 약점(시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몸에 가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후12;7절에 "내 육체에 가시"가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이 자랑거리가 많으면 우쭐대기가 쉽고, 교만하고 자만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부러워하는 조건을 많이 갖추었다는 사람 치고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적습니다.
그리고 실패를 모르는 사람 치고 자만에 빠지지 않는 사람도 적습니다. 모두 자기 과신에 빠져 있고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이 같은 의식을 지니고 살아가면 자기가 하나님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사람들에게 실패를 주시고, 좌절을 맛보게도 하시고, 재수하게도 하시고, 아프게도 하시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고개를 숙이게 만들고, 세상에는 내 뜻대로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세상의 위인들의 전기를 보면 대개는 이 같은 실패의 경험과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는 쓰라린 순간들을 다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위인들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랑거리가 많았고, 교만의 소지도 많았고, 영적으로, 지적으로 가문의 배경으로 볼 때 너무나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도 인간이니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만해지고 자만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몸 깊은 곳에 가시를 박아 놓았습니다. 가시라는 말은 <말뚝을 박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옛날 고대 사회에서 야만인들은 적을 사로잡으면 말뚝을 몸에 쳐 박아서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바울의 몸 속에 이 말뚝을 쳐 박아 놓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말뚝은 질병을 말하는데 그것이 어떤 이는 '우울증'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간질'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안질'이라고도 했는데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여간에 사도 바울이 굉장히 아픈 질병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고는 그가 교만해지려고 하면 이 질병의 가시가 몸 속에서 사정없이 찔러 댑니다. "나는 완벽하다"는 마음이 생기려고 하면 이 가시가 몸 속에서 꿈틀거립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바울을 꼼짝 못하게 잡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바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보면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몸에 가시 한 가지씩은 다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이는 환경도 좋고 돈도 있고 잘 생기고 학벌도 좋고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인데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것이 가시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도 좋고 환경도 좋고 다 좋은데 돈이 없습니다. 돈을 벌려고 노력은 많이 하는데도 좀처럼 잘 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돈이 부족해서 가난한 것이 가시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돈도 있고, 건강도 있고 명예도 있고 다 있는데 자식이 말썽을 피웁니다. 탈선을 하고, 나가서 싸우고 들어오고, 공부를 안하고, 부모 체면을 망쳐 놓습니다. 이게 가시입니다.
이것만 없으면 이 세상을 훨훨 날 것 같은데 이것들이 발목을 꼭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가시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가시가 그를 놓아주지를 않습니다. 꼭 붙잡고는 몸 속에서 욕망이 올라오려고 하면 이것이 사정없이 찔러 대고, 교만한 마음이 솟아나려고 하면 또 이것이 쑤셔 대는데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찔리지 않기 위해서 그는 매일같이 자신을 죽이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백하기를 "나는 매일 죽노라" 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3.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해서 바울이 하나님께 이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고후12;8절"내 몸에서 이 질병을 물러가게 해 주세요" 세 번을 진지하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어서 병을 고쳐 주실 만도 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기도하기 전에 고쳐 주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서 인생도 바치고, 젊음도 송두리째 바치고, 가정도 포기하며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고통스러워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쾌히 응답해 주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후12;9절을 보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즉 그 상태로 만족하라"하시고는 고쳐 주지 않고 참고 살라고 하십니다. 대신 하나님은 주치 의사인 누가를 그의 옆에 붙여 주시고는 다니면서 전도나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보면 좀 심하신 것 같지요! 모두 버리고 당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에게 그렇게 인색하실 수가 있습니까? 고쳐 주시면 간단할 일을 가지고 주치의를 대동시키면서도 고쳐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평생 그 가시를 몸 속에 지닌 채 살아갑니다.
여러분! 바울이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새벽기도도 했고, 십일조 헌금도 충실히 했고, 열심히 봉사도 하느라고 했는데, 그러면 아들 대학에 붙여 주시면 어때서 안 들어주십니다. 할 만큼 했으면 사업도 좀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그런데도 안 들어주십니다.
이 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서운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원망하는 기도가 나오게도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도 인간인데 그런 생각 안 들었겠습니까?
여러분, 너무 완벽 좋아하지 마십시오. 완벽하다고 하는 사람들, 병자 아닌 사람 없습니다. 모두 자만하고 교만하고 스스로 된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KS라고 하는 사람들, 인간 관계가 별로 입니다. 너무 과신합니다. 지독한 이기주의고, 너그러움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대화해 보면 일방적입니다. 그 완벽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을 그렇게 교만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완벽한 상태로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매번 이기고, 성공하고, 항상 형통하게 놓아두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모두 어딘가에 한 가지씩 부족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 부족한 부분이 그를 붙잡아서 겸손하게 만들어 주고 사람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믿/
바울이 사도 바울이 된 것은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나에게 가시를 주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4.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교만해질까봐, 신비주의로 빠질까봐서, 그를 묶어 놓기 위해서 일부러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바울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상태로 족해, 더 이상 조르지 마라, 내 은혜는 약한 데서 온전해지는 능력이 있어, 참고 지내거라" 바울은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다시는 그 병을 위해서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부터 바울은 몸 속에 있는 가시가 아픔을 줄 때마다 "도리어 크게 기뻐했다(고후12;9)"고 했습니다. 왜? 기뻐했습니까? 지금 주께서 내 속에 임재하심을 확인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부터는 오히려 아픈 것을 더 큰 축복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주님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몸이 아플 때에는 주님이 내 몸 속에 임재하신 것을 알고 더 머물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10년, 20년을 고쳐 달라고 기도해도 안 고쳐지는 병을 지니고 계십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로 알고 오히려 아플 때마다 더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가시가 주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살아가다가 언제 가장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까? 그것은 기쁠 때가 아니고 일이 잘 될 때도 아닙니다. 그 때는 눈앞이 캄캄하고 암담해서 정신이 없을 때, 바로 그 때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또 언제 기도가 가장 잘 되는가 하면 어려운 일을 겪는 과정에서입니다. 그 때는 정말 기도가 잘 됩니다. 힘이 있습니다. 정신이 번뜩입니다. 간절합니다. 뜨겁습니다.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다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는 수난의 종교다. 기독교를 박해하지 말라. 기독교는 수난을 당할수록 더 강해지고, 더 위대해진다. 기독교를 박멸하려면 무한한 자유를 주라. 그렇게 되면 스스로 부패해서 무너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살아가시는 동안에 가시가 없기를 바랍니다. 실패도 없고, 넘어지는 일도 없고, 아플 일도 없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사도 바울처럼 가시가 있음으로 해서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만 있다면, 신앙이 사도 바울처럼 "더 기뻐하였더라"는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의 손에 더 굳게 잡혀지는 축복이 있다면, 여러분 생활 속에 나타나는 가시들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가시가 내게 주어지는 것이 더 큰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몸에 가시를 가지고도 그 누구보다도 기쁘게 세상을 살아갔던 것처럼 우리들도 기쁘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5. 바울의 성숙한 신앙의 모습은 무엇인가?
사실 성숙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식물이든 사람이든 성숙한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식물이 성숙한 열매를 맺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보기에 좋을 수가 없습니다. 열매가 익어 빛이 나고 익은 냄새를 풍기는 그 탐스러운 모습은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줍니다.
이 점에 있어서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이 성숙한 지경에 이르게 되면 그에게 인간의 참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기서 인생의 맛과 깊이를 보게 되고 <아 저것이 인생이로구나> 하는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 경지에 와 있다고 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성숙해 있습니다.
①그는 <참 자유인>입니다.
본문에서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참 자유인>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를 보면 이 자유를 위해서 피를 흘리고 싸운 흔적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자유를 잃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에게서 자유를 박탈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귀한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유를 알고, 그것을 소중히 느끼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성숙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자유자다" 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육신의 속박에서 자유 함을 얻는 그런 자유가 아닙니다.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자유, '율법에서부터 자유, 심지어는 죽음의 문제까지를 초월하는 그런 자유'를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으로부터 자유' 했습니다. 그는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유대교의 특징은 계율이 많다는 것입니다. 유대의 생활 지침서인 탈무드를 보면 모두 613가지의 계율이 6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라'는 계율이 248가지고 '하지 말라'는 계율이 모두 365가지나 됩니다. 이 수많은 계율들이 일상의 생활에서 자유를 속박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꼼짝을 못 하도록 묶어 놓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서 이 모든 계율로부터 해방을 받습니다. 모두 집어던지고 <나는 자유자다>라고 외칩니다. 이를테면 613가지의 율법의 옷을 모두 던지고 예수의 옷 한 벌만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주안 애서의 자유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할/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자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신으로부터 자유하고, 육신으로부터 자유하고,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고 심지어는 죽음의 문제로부터도 자유>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유해야 합니다.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는 ▶죄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죄는 모든 것으로부터 불화를 일으키게 합니다. 또 ▶죽음의 문제로부터도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예수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또 ▶물질로부터도 자유해야 합니다. 물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물질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탐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도 자유해야 합니다. 살다 보면 취미 생활도 해야 하고, 친구도 많이 사귀어야 하고, 모임이나 직함도 가져야 하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혼자 있는 시간을 빼앗기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조차도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절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많은 시간을 묵상 기도하는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원 400년경에 <키니크학파> 일명 개처럼 자유롭게 살아간다고 해서 <견유학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내걸은 자유 얻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욕망을 적게 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실패를 하는 데 그 원인들을 보면 모두 지나친 욕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족하지 않는 한 욕망을 채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을 타면 종을 부리고 싶어집니다. 100명을 거느리면 1,000명을 거느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1억을 가지면 10억을 갖고 싶은 욕망으로 발전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먹어도, 먹어도 갈증에 시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무취'입니다. 체면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정말 자유하려고 하면 체면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외친 '자유'는 <견유학파>가 외친 그런 자유보다도 한 단계 더 높은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이고, 심지어 죽는 문제로부터도 자유한 그런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얼마나 자유했던 사람입니까? 그래서 그를 성숙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②그는 <예수의 참 제자>이었습니다.
"내가 사도가 아니냐" 이 말은 소속이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나는 예수의 사람이다'라는 말입니다. ▶갈2;20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는 자신의 가치를 예수를 위해서 사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정말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누군가에게 기쁨으로 매일 때인 것입니다.
한 여인의 행복은 사랑하는 한 사람에게 매일 때 주어집니다. 한 남자의 행복도 사랑하는 한 여인에게 구속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여 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을 때 무한한 자유가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고 방종입니다. ▶사람이 자유를 누리고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가정이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 기꺼이 매일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매임으로, 그리고 그에게 완전히 속박되어 사도가 됨으로써 그는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살든지 죽든지 예수님을 위하여 산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시원한 인생입니까? 이런 사람은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분명하고, 뜨겁고, 확실하고, 언제나 앞서가는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불행한 사람은 자기의 위치를 모르는 사람이고 자기의 값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르니까 허무에 빠지고 방종에 빠지고 무질서한 삶을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③그는 완전히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는 "내가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신앙 인은 신앙의 대상을 만나고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가리켜서 사도가 아니라고 시비했습니다. 당시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사후에 개종해서 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도성에 대한 시비가 늘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한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내가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신앙의 내용은 <만나는 것>입니다. 그에게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때 확신과 자신감과 분명한 자세가 주어지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맨 앞자리에 처녀 한 사람이 앉아서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합니다. 보니까 그는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진지했고 기쁨이 넘쳤고 눈물을 흘리면서 찬송을 합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처녀가 눈먼 주제에 무엇이 저렇게 감사할까?"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목사님의 오해였습니다.
여러분은 눈을 떴으니 행복하십니까? 지금 감격해서 살고 있으십니까? 감격은커녕 불만이 가득하고 불평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까지 소경이 비관해서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모두 몸이 성한 사람들이 자살을 했습니다. 그래서 행복의 조건은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행복을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은 가난해서 불행하겠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오해입니다. 여러분은 부자니까 행복하십니까? 고대광실 높은 집에는 모두 행복이 가득하다는 말입니까? 초막에서도 얼마든지 감사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악>을 보면 눈먼 소경 하나가 목사님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을 받고 광명을 찾게 됩니다. 이 여인이 처음으로 눈을 뜬 후에 세상을 보는 순간 감탄을 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찬란한 햇빛, 넓은 하늘, 초록빛 자연, 그래서 그는 감탄하고 또 감탄을 했습니다.
그런데 꼭 한 가지를 보고는 실망을 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얼굴에 그렇게 근심이 가득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눈을 뜬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얼마나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부흥회에 참석한 이 소경 처녀가 마지막 날 이렇게 간증을 합니다. <나는 비록 육신의 눈은 멀어서 세상을 볼 수는 없지만, 나는 이미 마음의 눈으로 우리 주님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소경 된 내가 오히려 감사할 뿐입니다> /할/
이 소경 처녀가 그렇게 감사할 수 있었고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찬송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똑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 있게 "내가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아니냐"하고 반문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어디 가서나 당당했습니다. 자신감에 꽉 차 있었습니다. 소신 있게 살았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 정도는 이미 초월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참 자유인입니다.
6. 참 자유자가 되려면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해야 합니다(갈2;20).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부정적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부활을 위한 죽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예수 죽음! 내 죽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말은 나의 생각과 주장과 내가 원하는 것들의 활동을 잠시 멈추라는 뜻입니다. 내 생각과 욕망의 흐름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 생각과 내가 원하는 것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는 것은 자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삶을 내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내 삶을 경영하셔서 깨어진 인생이 다시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내 스스로 계산하고 계획하는 일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고백'입니다.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고 했습니다. 죽음 뒤에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이 옵니다.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은 그 분이 나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을 책임지겠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살아주시겠다는 보증입니다.
따라서 이 죽음은 부활을 위한 죽음입니다. 위대한 결과를 위해 나의 가진 적은 것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발견한 사람은 기쁨이 넘쳐 납니다. 왜?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이 이런 놀라운 능력이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것처럼 새 주인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가 주인이더니 이제는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새 주인으로 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들어가셔서 여러분 마음과 생각과 계획을 다스리시고 나의 주인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포기하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내가 나의 실패와 잘못과 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의 적은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면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받으셔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그분은 새 주인이 되셔서 새롭게 여러분의 인생을 운영하십니다.
그분은 오셔서 우리 안에 거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값으로 사신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과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살아있는 내 육신을 말합니다. 내 몸은 일도 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고 병들지 않은, 하나님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나를 건강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내 육신을 드려서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도록 축복하시고 내가 오늘 내 발로 교회를 찾아오게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다가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줍니다. 사랑하면 나를 다 바칠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를 깨닫는 것만큼 나의 사랑을, 내 삶을 그분에게 맡길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적게 느끼면 적게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의 아들을 희생하신 그 사랑에 우리가 깨어있을 때는 내 뜻을 주장하지 않고 날 사랑하시는 그분에게 나를 맡길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이것은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만일 사랑한다고 하면서 희생하지 않으면 가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믿음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이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예수 능력! 내 능력! /할/
7. 진정한 자유자의 삶은 무엇인가?
우리는 자유를 누리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은 많지만 자유를 잃어버리고, 꿈을 성취했는데 자유를 잃어버리고, 명예는 얻었지만 자유를 잃어버리고, 복권에 당첨되고도 자유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는 두 가지 영역이 있는데, 하나는 '생각하는 자유'입니다. 좋은 생각은 참 자유로 인도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자유가 병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생각하기는 하는데 지난날의 억울한 것만 생각을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것을 초래합니다. 궁정의 생각이 우리 모두의 생각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또 하나는 '행동하는 자유, 즉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도 아주 소중합니다.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삶의 우선순위를 정해 주셨습니다.
①진정한 자유는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옵니다!
빌 클린턴은 2000년 8월19일에 그는 미국의 현직 대통령으로서 시카고 '빌 하이벌스' 목사가 주관하는 미국교회 목회자대회에서 4,500명의 목사님이 모인 그 자리에서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에 대한 회개고백을 했는데 그 말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생각이 자유롭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대통령까지 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 은혜를 모르고 사니까 내가 죄를 짓게 되고 얽매였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생각의 자유가 왔다, 용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하원의 탄핵을 받으면서 괴로워했지만 내게 진정한 자유가 없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 앞에 나의 허물을 고백함으로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여러분, 현직대통령이 4,500명의 목사님들 앞에서 이런 신앙고백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는 큰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②성령으로 자유하라!
고후3:17절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 ▶성령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데 이 성령의 역할이 다섯 가지입니다.
㉠성령은 능력입니다. 우리가 못하는 것을 하게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미움을 우리가 제거하지 못합니다. 성령이 제거하게 합니다. 우리가 알면서도 기도를 못할 때 기도를 하게 하는 능력이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이 믿어지는 것도 성령으로 됩니다. 성령은 힘이고 능력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해야 자유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신령한 은혜를 누립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신령한 은혜가 있기 때문에 나왔고, 또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여 나온 줄로 믿습니다.
㉢정직함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깨끗한 영입니다. 그러므로 부자유는 부정직과 언제나 직결이 됩니다. 부자유한 것은 부정직이 개입됩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우리가 자유할 수 있는 것은 정직성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담대함입니다. 우리가 연약해질 때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시고, 우리를 담대케 하시고, 우리를 능력 있게 하십니다. 이 은총이 성령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이깁니다. 죄를 물리치는 용기가 일어납니다. 주님을 순종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도덕성이 회복됩니다. 인격이 파괴되면 하는 것마다 부도덕해집니다. 그래서 도덕성이 회복된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 도덕성이 회복되는 줄 믿습니다.
'에밀 부르너'는 자유주의 신학자입니다. 그런 그가 "인간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로 하나님께 얽매일 때만 자유롭다"고 외쳤습니다.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이성이 있습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얽매일 때만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할/
③최고의 자유는 섬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의 개념은 '섬김'이고 '능력'의 개념입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말하면 힘이 곧 자유입니다. 우리가 지금 세상을 쳐다보면 누가 자유롭냐? 보면 힘이 있는 사람이 자유롭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얽매입니다. 종노릇해야 됩니다.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지식 있는 사람, 재력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이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세상 적인 자유입니다. 그 자유 속에 남용이 있습니다. 불안전한 자유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섬김에서 옵니다. 섬김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범을 보였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은 최고의 섬김입니다. 주님은 한 알의 밀 알로 오셨습니다.
마20: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섬김 속에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졌고, 예수님의 섬김의 극치인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할/
⑴섬김의 극치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갈5;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여기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말은 자유를 남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베풀고 섬기는 거기에 자유의 성숙이 일어납니다.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말은 섬김의 자세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누구에게나 구속을 당하지 않는 것이 자유이지만, 동시에 누구에게나 예속되어 봉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참 자유를 누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즉, 기독교인의 자유란 남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를 제한하고 자기가 종이 되고 남을 섬기는 것입니다. ▶참 자유란,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제한할 줄 아는 자가 될 때에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⑵섬김의 자세는? 엡6:7절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④자유 자는 죄의 종의 멍에를 다시는 메지 말아야 합니다.
갈5: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죄는 우리를 자유를 속박합니다. 하나님은 종의 멍에를 다시는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엡4:22절 이하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에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⑤진정한 자유는 주님이 주실 때 완전합니다.
요8: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제 우리는 주님 안에서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할/ (2005년 9월 18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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