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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해야 할 이유 /갈 5:13-15

by 【고동엽】 2022. 1. 10.

자유해야 할 이유

 

 

갈 5:13-15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

 

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

 

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참 조용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가리켜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인심 좋고 인정 많고 이웃을 존중하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누구를 지배하고 침략해 본 일이 없는 순박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민족이 근대 역사 중 두 가지 불행한 역사를 거치는 동안 많이 변했습니다. 하나는 일제로부터 36년 동안 강제로 점령당한 역사이고 또 하나는 6,25를 통한 고난을 당한 역사입니다.

 

우리민족은 일본으로부터 36년 동안 고난을 당하다가 광복을 얻은 것이 금년으로 60주년을 맞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36년 동안 고난의 지배를 당하는 동안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때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눈물로 호소하고 기도하고 간구했습니까. 그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광복을 이 땅에 선물로 주셨습니다. 3,1운동 때 전국의 국민들이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 독립운동가가 말하기를 “독립의 기운이 이렇게 속히 올 줄은 미처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해방은 누가 독립운동을 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자유의 소중함을 새롭게 깨달은 점입니다. 여러분,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사람이 자유를 빼앗기고 사는 것이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사회의 법이 자유를 박탈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민족이 36년 동안 그 자유를 빼앗기고 살면서 비로소 자유에 대한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여기서 그 소중한 자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니 다시는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

 

신학자 몰트만은 “신앙은 속박이 아닌 해방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아는 순간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 순간부터 정신의 자유함, 육신의 자유함, 영적인 자유함이 한꺼번에 주어집니다. 그래서 진정 자유로운 인생은 그리스도인의 인생입니다.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운명의 문제나 내세의 문제까지도 자유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는 신앙 안에서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를 떠나면 당장 그 자유를 빼앗기게 됩니다. 자유를 빼앗기면 당장 멍에를 메게 됩니다. 그 멍에가 몇 가지 있습니다.

 

 

 

죄의 멍에

 

 

 

죄를 짓게 되면 가장 먼저 자유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죄인은 쫒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죄인은 언제나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래서 죄인은 밝은 곳을 싫어합니다.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있으면 불안해집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혼자서, 어두운 곳으로, 숨어서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혼자 있으면 자유합니까. 아닙니다, 혼자 있어도 마음의 불안함, 정신적인 불안함, 영적인 불안과 갈등이 언제나 나를 구속합니다. 그것이 멍에이고 속박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현재일도 장래일도 운명의 문제도 다 예수 안에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진정으로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19세기 예수를 영접하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순회전도자로 활약했던 존슨 오토만이라는 사람은 요한복음 15:15절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너희를 친구라 하리라”라는 말씀을 읽는 순간 가슴이 미어져 오는 감격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 감격의 마음을 시로 썼습니다. “위에 계신 나의 친구 그의 사랑 지극하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주 나의 친구.” 그러니 얼마나 그 마음과 생각과 정신적으로 삶이 자유할 것입니까. 그것이 자유함입니다.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것, 그것이 종의 멍에를 푸는 삶입니다.

 

거기다 다가오는 천국의 미래를 바라보는 은혜가 있다면 얼마나 더 자유할 것입니까. 그래서 몰트만은 “그리스도인은 새벽녘 훤히 동터오는 지평선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얼마나 소망과 기쁨과 만족함과 자유함의 인생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뒤로하고 그 빛을 바라보면서 밝아오는 시간을 위해서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삭개오가 그런 동터옴과 자유함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냥 모으고 소유하면 행복해 지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악착같이 동족을 괴롭혀 가면서 모으고 뺏고 착취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 삶에 자유함이 있고 행복함이 조금인들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왠지 모르게 날이 갈수록 더 갈증이 심해지고 목마름이 더 깊어지고 만족함은커녕 자신을 옥죄이는 속박을 느끼고 멍에는 더 무거웠습니다.

 

그러다 삭개오가 어느 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자신의 죄를 다 벗어 던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삭개오는 순간 다가오는 영적인 자유를 느끼고 그 무거웠던 멍에를 다 벗어 던지게 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순간 가볍고 시원했겠습니까. 그리고 고백하기를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우리 동포에게 나누어 주고 내가 그동안 착취한 것을 4배로 변상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찾아온 것이 완전한 자유함이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 됨의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자유함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멍에에는 죄의 멍에가 있습니다.

 

 

 

육신의 멍에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사람이 운명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마감하느라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다가 마지막에 숨이 멎을 때 그때 갑자기 긴장이 풀리고 꼭 쥐었던 손을 놓고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때 육신으로부터 자유해집니다. 어떤 면에서 죽음은 참 자유해지는 순간이고 진정 평안해지는 축복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땀을 흘리는 고통을 당하다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다 이루었다” 하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는 순간 그 순간이 모든 육신으로부터 멍에를 벗고 속박을 벗는 순간입니다. 그때 얼마나 자유하겠습니까.

 

오늘도 이 육신의 굴레와 멍에에 씌워진 채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질병에 걸려서 고쳐지지는 않고 회복될 전망은 없고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고통은 찾아오고 먹을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인생, 그것이 육신의 굴레이고 멍에입니다. 차라리 죽고 싶은데 죽어지지도 않습니다. 그 흔한 암도 내게는 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무거운 멍에를 메고 사는 것입니까. 그리고 고달픈 인생살이, 그것도 멍에입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면 몰라도 없는 사람들은 너무 큰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고 미래가 없고 살길이 망막할 때, 그것이 육신의 멍에고 굴레입니다. 또 늙어 자식들로부터 조용히 공양을 받고 살아야 하는데 늙은 몸인데 자녀들이 외면하고 갈 곳은 없고 그래서 거리로 내 몰린 몸 하나 둘 곳이 없이 초라하게 살아가는 노년의 삶, 그 삶이 멍에이고 속박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는 조용히 죽어야 하는데 죽을 준비는 안 되고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두렵습니다. 그 때는 두려운 생각이 몰려올 것입니다. “나도 이제 죽어야 하는가, 내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나도 죽으면 몸은 땅속에서 썩는가, 내 몸을 화장하면 불구덩이에서 이 몸도 무자비하게 태워지겠지, 그리고 내가 죽으면 나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내가 죽은 후 사람들이 말하던 대로 나는 지옥에 갈 것인가 천국에 갈 것인가, 나는 해 놓은 것이 없는데 가면 분명 지옥에 갈 것이 분명한데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그때 별 생각을 다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운명의 시간이 되면 두려워지고 생각이 골똘해 지는 법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안하고 마음이 떨리겠습니까. 그것이 육신의 굴레이고 멍에입니다.

 

그래서 오늘 분문에서 그 자유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 그래서 예수를 알라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알고 믿는 순간 그런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자유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삭개오가 예수를 아는 순간 그렇게 자신을 짓누르던 멍에를 벗어버리고 자유해진 것입니다. 그때 얼마나 자유했겠습니까. 얼마나 자유했으면 그 물질의 탐욕이 가득하던 사람이 그 많은 재산을 절반을 내 놓겠다고 결단했겠습니까. 자유가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정치적인 멍에

 

 

 

백성들은 누구보다도 나라의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나라의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나라는 빼앗기고 백성은 고난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북한을 보십시오. 북한의 동포들은 우리들과 똑같이 살았는데 마침내 지도자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50년 넘게 자유를 빼앗기고 저렇게 살고 있습니다.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나라의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부모 잘못 만난 것 보다 훨씬 더 불행해집니다.

 

일제 때 우리민족이 고난을 당한 것도 나라의 지도자들을 잘못 만나서 그렇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나라를 어떻게 경영했으면 나라를 다 빼앗깁니까. 그때 당시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던 백성들이 뭘 알겠습니까. 그러면 나라의 지도자들이 잘 해 주어야 하는데 매일 모여서 싸움이나 하고 상소나 올리고 원수 갚는 일에 매진하고 그랬으니 그 나라가 온전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라를 빼앗기고 남들로부터 지배당하고 고난당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어떻습니까. 오늘도 보면 우리나라 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이 정신 못 차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전에 인천에 사시는 어느 분을 만나니까 일단의 무리들이 모여서 맥아더 장군 동상을 없애라고 야단을 떨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6,25때 맥아더만 없었더라면 그때 남북이 통일 되었을 것인데 맥아더가 나타나서 인천상륙작전을 함으로서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고 그 동상을 부숴버려야 한다고 그 동상 앞에 모여 데모를 했다고 합니다. 맥아더 동상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생각을 바로하고 건강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이 땅의 안보의식이 얼마나 풀어져 있다는 말입니까. 지난번 남북 축구대결이 있던 날 정부당국에서는 입장객들이 태극기를 들고 들어오는 것을 막느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고 합니다. 혹시 북한을 자극할까 봐 태극기를 들고 들어오지 말고 한반도기만 들고 오라고 태극기 색출하느라 법석을 떨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남한은 북한이 의도하는 대로 아주 순조롭게 끌려가고 있습니다. 북한의 의도는 남한 땅에서 남한의 고유한 모습을 희석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인권문제도 입 다물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제는 정부안에서 북한의 인권문제를 말하면 쫓겨납니다. 그리고 미군에 대해서 온 국민으로 하여금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간첩 잡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고 잡아도 발표하지 못하게 만드는데도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태극기도 들고 나오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북한의 의도대로 자연스럽게 지금 끌려가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이런 흐름을 알기 때문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거기다 이 조그만 나라가 안팎으로 얼마나 갈등과 반목과 분열에 휩싸여 있습니까. 그러니 지금 한창 나라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중요한 시점인데 아 나라가 제대로 발전해 나가겠습니까.

 

거기다 이 나라는 근면정신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이제 좀 살만 하니까 근면정신은 사라지고 노는데 주력하고 이제 좀 편해 하니까 음란에 온 나라가 푹 빠져버렸습니다. 거기다 지금 열심히 일해도 부족한 판에 노사문제를 보면 참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지금 한창 휴가 시즌인데 사전에 모처럼 휴가계획을 짜 놓고 예약을 마쳤던 사람들, 막상 시간이 되어 휴가를 가려고 하니까 노사문제로 비행기가 뜨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노조는 산속에서 휴식하며 농성하고 내 이익을 위해서 남의 불편쯤은 그냥 묵살했습니다. 회사는 망하든 말든 가장 바쁘게 움직여서 돈을 벌어 놓아야 할 시즌에 회사의 발목을 묶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회사의 손실이 4천억 원이 넘는다고 하니 그 돈을 벌어들여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그러니 그 회사가 망하지 살아남겠습니까.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만용입니다. 그렇게 살면 이 나라가 언젠가 또 망하게 되거나 후진사회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이 시대 - 그리스도인들의 역할

 

 

 

그래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나 자신의 소중함도 알아야 하지만 동시에 너의 소중함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너의 소중함을 더 생각하며 살아가야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결국에 나라를 생각하고 염려하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발휘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음과 생각과 책임감이 확 트여야 합니다. 세상을 넓게 보고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선배 신앙인들은 마음도 생각도 책임도 컸고 훌륭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애국가를 지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가사가 나온 것입니다. 이 땅에 우리나라의 꽃을 무궁화로 제정한 것도 그리스도인들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무궁화를 심는 운동을 일으킨 것도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또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들도 한결같이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3,1절 때와 8,15당시 전국망 조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오직 교회뿐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게 한 조직망도 교회를 통해서 만들어졌었습니다. 여기서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미국의 교육자 버틀러라는 사람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생각 없이 그냥 따라가며 살아가는 부류가 있고, 또 하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지만 수수방관하며 살아가는 부류가 있고, 세 번째 부류는 일을 창조하고 만들고 살아가는 그 시대를 이끌고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한 가지 사회적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그 시대를 이끌고 살아가는 소수의 부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서로 종노릇하며 살라“.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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