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워지는 신앙
엡 4:20-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몇 일전에 몽골에 갔을 때 여러 선교사님들을 만났습니다. 그중 어느 선교사 부인이 나를 자꾸만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보느냐”고 물으니까 “실례지만 지금 몇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몇 살로 보이느냐”고 물으니까 “한 40중반 쯤 되지 않으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깜짝 놀라면서 “그렇게 많이 보이느냐”고 했더니 “그러면 실례했느냐”면서 아주 죄송해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답하기를 “아니라고, 내 나이가 그 정도”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때 속으로 “내가 그렇게 젊어 보이는가”하고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제 고향에 초등학교 친구 하나가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해서 언젠가 일부러 찾아 갔었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도 고향을 지킨다면서 고향을 떠나지 않고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찾아 갔더니 어느 노인이 나왔습니다. 저는 그 분이 그 친구의 아버지인 줄 알았습니다.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나를 불러내지 않으셨더라면 지금 나도 저 친구처럼 저렇게 늙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니 참 생각이 많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특징은 모두 젊어지려고 애를 쓰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모두 젊어지려고 몸부림을 치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 좋은 현상입니다. 그래야 스스로 노력하게 되고 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또 그래야 몸도 마음도 생각도 몸가짐도 삶도 젊게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늘 새로워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자신을 가꾸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몸이나 생각만 젊어지고 새로워지려고 할 것 아니고 신앙의 삶도 젊어지려고 힘쓰고 애를 써야 합니다. 신앙도 그냥 놓아두면 쇠하고 늙어 버립니다. 구태의연해 집니다. 그러면 구습을 그대로 좇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도 새로워지고 갱신되고 젊어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구습을 쫒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구습은 옛 생각, 옛 습관, 옛 태도, 옛 사고, 구태의연함을 말합니다. 이것을 털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생각 새로운 태도 새로운 영을 품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젊어지는 데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젊은이들처럼 살아가는 방법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신앙의 삶이나 인생을 젊게 살아가는데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청년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요소이기도 합니다.
낙관적
청년의 특징은 지극히 낙관적이라는 것입니다. 결혼주례를 하다 보면 신랑신부가 시종 싱글벙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서약을 할 때 보면 전혀 주저함이 없이 시원하게 약속합니다. 자신만만합니다. 그때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결혼해서 3개월만 살아 봐라, 그때부터는 싸우느라고 정신없을 거다.” 그런데 결혼하는 두 젊은이는 그런 걱정이나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고 미래가 어두워도 괘념하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젊은이입니다. 젊으니까 그들의 가슴 속에 낙관적이고 매사 소망이고 희망적인 요소가 가득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젊은이의 특징입니다. 얼마나 자신만만하고 소망 적이고 희망적이고 미래적입니까.
그러다 그 젊은이들도 나이를 먹어 가면 몸이 점점 굳어갑니다. 그리고 유연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것은 몸뿐이 아니고 정신도 생각도 사고도 따라서 굳어갑니다. 그래서 누가 무슨 말을 하면 “다 해봤어, 소용없어, 안 돼”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참신하던 생각과 사고가 그만큼 굳어졌다는 표시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삶이 얼마나 소망적이고 기대가 있고 바람이 있고 낙관적이고 미래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감격적인 삶입니까. 신앙의 삶에 그런 요소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참신하던 신앙도 연륜 쌓이고 나이가 들게 되면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감동도 사라지고 눈물도 사라지고 열정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그 생동하던 신앙이 마침내 형식화되어 가고 이론화 되어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그렇게 무섭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지극히 소망의 삶입니다. 기대의 삶입니다. 바램의 삶입니다. 낙관의 삶입니다. 기다림의 삶이고 미래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예민하게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는 얼마나 소망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인생도 젊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몸도 젊게 살아야 합니다. 또한 신앙도 젊게 살아야 합니다. 늘 생동감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니면 그 좋던 신앙도 굳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젊고 참신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비관적 사고에서 낙관적 사고로 전환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옛 사람은 대부분 비관적 생각을 가진 삶을 말합니다. 구태의연한 삶을 말합니다. 그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과 미래와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상적
신앙의 삶은 현실의 삶이 아니고 이상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오늘 현재 보다 내일과 미래와 장래와 천국에 이상과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신앙인은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면 미래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미래와 천국을 위해서 오늘 헌신하고 저축하고 투자하고 나를 바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청년의 삶과 똑같습니다. 청년은 지극히 이상적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은 꿈꾸는 것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청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대화가 안 될 정도로 이상적인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것이 청년의 특징입니다. 이상적이고 미래적이고 때 묻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청소년 때 얼마나 생이 맑고 감성적이고 이상적입니까. 그 때는 비가 오면 모두 감성에 흠뻑 젖어버립니다. 모두 문학소년 소녀가 됩니다. 오늘 나이들은 주부들 가운데서도 젊었을 때의 그렇게 맑은 이상과 꿈과 감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비가 오면 그냥 집을 나갑니다. 나가서 기분이 상기되면 우산을 버리고 비를 맞고 돌아다닙니다. 그러다 기분이 더 상기되면 신발을 벗어들고 길을 걷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저 청승 좀 봐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이미 감성이 말라버린 고목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청순하던 꿈과 이상과 감성이 풍부하던 사람들이 나이가 많아지게 되면 그 꿈, 희망, 이상, 기대, 감성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고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으로 변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욕망과 욕심과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결혼해서 20주년 쯤 살면 그렇게 고목으로 변해 버리기 쉽습니다. 얼마나 고목으로 변하는가 하면 이렇게 변합니다. 결혼 20주년 기념을 맞은 부부가 오랜만에 양식집엘 갔습니다. 가서 20년 만에 한손에 칼을 들고 또 한손에 쇠스랑을 들고 칼질을 하고 있는데 때 마침 죽여주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모처럼 무드에 젖어 소녀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게 무슨 곡이에요” 그때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무슨 고기라니 소 등심이지.”
지금 여러분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자신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얼마나 꿈을 가지고 있고 기대와 이상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확인 해 보십시오. 여러분, 감성과 꿈과 기대가 상실되지 않도록 자꾸만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십시오. 남편이 어느 날 큰 용기를 내어 “여보 사랑해요” 하거든 속으로 좋으면서도 “왜 안던 짓 하느냐”고 핀잔을 주지 말고 그곳이 어디든 안방이든지 시장이든지 까무러쳐 기절해서 죽어 넘어지십시오. 그러면 사랑한다는 말이 자꾸 나올 것입니다.
그런 삶은 어쩌면 신앙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내 신앙이 이렇게 감격적이고 감성적이고 꿈이 있고 기대가 있고 소망이 가득해야 그것이 생동하는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영적 비전이 얼마나 있고 꿈이 얼마나 있고 기대가 얼마나 있습니까.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구습, 체면, 권위, 굳어짐을 벗어 던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새로워지기를 위해서 힘쓰라는 말 입니다. 즉 현실적으로 신앙이 변하고 구태의연해지고 타락하고 굳어지는 것을 막으라는 말씀입니다.
변화
젊은이의 특징은 늘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젊은이들은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옛날 완행열차를 타면 부산까지 8시간 걸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두 시간이면 갑니다. 앞으로는 한 시간이면 갈 것입니다. 오늘 5분은 옛날 이집트 시대의 12년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황제가 죽으면 온 나라에 다 알려지기까지 5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지구상의 사건 사고소식들이 그날 그 즉시로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오늘을 거류시대라고 말합니다. 오늘 젊은이들이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생각이나 의식이 현기증 날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 초등학생들이 남녀교사 둘이 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얘들아 비켜주자“하고 비켜주는 시대입니다. 오늘 아이들이 이런 생각과 사고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데 오늘 어른들은 감도 잡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위적이 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교회에 나오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나오면 변화에 너무나 무디기 때문에 숨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와서 놀다 보면 부수고 깨고 어지럽힙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아무 생각 없이 교회 문을 잠가 버립니다. 그러니까 오늘 아이들이 교회를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교회에 와서 놀다가 유리를 깼습니다. 그때 어느 장로님이 와서 보시고 “왜 유리 한 장만 깼냐? 다 깨지 않고” 그런 장로님이 한분이라고 있으면 아이들이 모여들을 것입니다. 변화에 무딘 사회나 집단 그리고 교회나 가정에서는 아이들 문제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 아이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변화에 비해서 너무나 감각이 둔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삶도 부단히 변화하려고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신앙도 굳어버리고 퇴색해 버리고 뒤처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거룩함으로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특히 오늘은 이 변화에 둔감하면 퇴보되고 낙오되고 탈락하고 구태의연해 집니다. 그래서 심령이 새롭게 되기 위해서 힘쓰라고 했습니다.
열정
젊은이의 특징 가운데 또 하나는 “열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참 이것이 좋은 것입니다. 다윗이 이 열정 때문에 골리앗 앞에 나아갔습니다. 골리앗이 하나님을 욕하는 것을 목격한 다윗은 순간 분노가 폭발하여 앞뒤 가리지 않고 골리앗에게 나아가 넘어트렸습니다. 이것은 나이 먹은 사람은 절대 못합니다. 어른들은 앞뒤를 재느라고 이런 용기가 폭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젊은이는 비록 실패할지라도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젊기 때문입니다. 젊은이에게는 이런 용기가 있습니다. 이 용기는 열정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괴테는 젊은이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하는 때라고 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찬양할 때 보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합니다. 기도할 때 보십시오. 땅을 치며 기도합니다. 어른들은 울고 싶어도 창피해서 울지 못하고 웃고 싶어도 체면 때문에 속으로 웃습니다. 찬양할 때도 입술로 겨우 부릅니다. 그만큼 열정이 식어져서 그렇습니다. 그분들도 한때 젊고 용기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던 용기가 다 시들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젊은이는 이 열정이 왕성합니다. 올 여름에도 200여명의 젊은이들이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모두 자비로 갔습니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식사도 불편하고 고생뿐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가라고 하면 끔찍해 합니다. 돈을 줘도 안갑니다. 그런데 젊은이들 기쁨으로 가거든요. 왜냐하면 젊은이들에게는 이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도 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눈물이 있고 감격이 있고 찬양이 있고 감사가 있고 은혜가 있고 변화가 있고 밤을 새워도 거뜬히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에서 이 열정이 식어지고 차분해지면 곧 바로 이론신앙으로 빠져버립니다. 그러면 가슴이 식어지고 머리만 뜨거워져서 입으로 신앙생활 하게 됩니다. 그러면 앉아서 비판만 하고 판단만 하고 계산만 하는 신앙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신앙의 삶은 가슴으로 하는 삶이고 열정으로 하는 삶입니다. 거기서 기적이 일어나고 감동이 주어지고 눈물이 흘러나옵니다. 용기 없는 남자가 보기에 추하듯이 용기 없는 신앙도 보기가 딱합니다. 보기가 초라합니다.
어느 집에 밤에 도둑이 들어왔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나가 보라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남편이 빗자루를 들고 나가면서 “들어오기만 해 봐라“ 하고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도둑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까 이불 속으로 숨으면서 “가져가기만 해 봐라” 했습니다. 도둑이 물건들을 싸가지고 들고 나갑니다. 아내가 어떻게 좀 해 보라고 하니까 남편이 얼른 나가면서 “또 들오기만 해 봐라”하고 문을 잠갔습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생활입니다. 그래서 가슴이 뜨거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이 움직이는 신앙이 됩니다. 움직이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젊어지는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 인생은 젊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우리 신앙도 젊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에 힘이 있고 용기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 시대를 새롭게 신선하게 신앙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 신앙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신앙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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