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조건
눅 13:20-21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 같으니라.
옛날 시골에서는 밀주라 해서 술을 담가 마셨습니다. 술 담그는 것을 보면 밥을 해서 넣고 밀기울을 넣고 그곳에 반드시 누룩 가루를 넣었습니다. 이 누룩이 필수입니다. 그리고 며칠 놔두면 속에 있는 내용물들이 모두 발효되어서 그릇 가득히 부풀어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술이 됩니다. 그때 이 누룩가루는 내용물을 발효시켜서 부풀어 오르게 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 빵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밀가루를 반죽할 때 그곳에 반드시 누룩 가루를 넣었습니다. 그러면 이 누룩가루가 밤새도록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서 부풀게 만듭니다. 그러면 밀가루 반죽이 아주 부드럽게 발효되고 부풀어 올라서 맛있는 빵이 만들어 집니다. 누룩가루는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활용되던 누룩이 오늘날에는 아주 작은 양의 발효제가 개발되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이 누룩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할 때 소금이 되라고 말씀했고 빛이 되라고 말씀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겨자씨로 비유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누룩이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룩은 몇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능이 바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과 같습니다.
“행동”
누룩 가루가 반죽에 들어가면 일제히 발효를 위해서 행동으로 나섭니다. 밀가루 반죽에 들어간 누룩가루는 하나도 그냥 있지 않고 일제히 일어나서 밀가루 전체를 부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것이 누룩 가루의 힘이고 능력이고 역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바로 그런 역할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행동 없이 그냥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소금이 되라, 겨자씨가 되라, 빛이 되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그 말씀들은 모두 행동하라는 액션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행동이 없으면 본의 아니게 직무유기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동안 이 세상은 자꾸만 나누이고 분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꾸만 분열하고 나누이는데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보기만 하는 것도 직무유기에 해당됩니다. 적이나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나누이고 분열하고 갈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이고 분열하면 힘이 약화되고 분산되어서 아무 일도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나누이고 분열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오늘 한국 기독교가 가지는 최대의 약점은 이 나누이고 분열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기독교가 힘이 없는 것입니다. 적은 약화되는 곳에 침투합니다. 6,25때 우리나라는 분명 사분오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힘이 약화되어서 외침을 불러왔을 것입니다. 가장 큰 취약점은 사분오열됨 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합병하고자 할 때 그 때도 우리나라는 사분오열되어 있었을 때 입니다. 그러니까 국력이 가장 약화되었을 때 치니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당했을 것입니다. 이 분열, 나누임, 불화는 결국 사분오열을 가져오고 마침내 힘을 약화시켜 스스로 무너지게 됩니다. 그것이 적이 노리는 것이고 사탄이 하는 바라는 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을 보면 “너희는 하나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도 하나이시요 하나님도 한분이시고 성령도 하나이시고 세례도 하나이요 교회도 하나이니 너희도 하나 되라“ 나누이면 약화되기 마련입니다. 가정도 분열하고 불화하고 나누이면 약화됩니다. 교회도 국가도 분열하고 불화하고 나누이면 약화됩니다. 무엇이나 하나 되면 아주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 되라고 했습니다.
인도 히말라야 산 밑에 있는 숲에는 반딧불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산다고 합니다. 이 반딧불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 숲에는 밤인데도 대낮같이 밝다고 합니다. 반딧불 하나는 참 보잘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많이 모여질 때 어둠을 몰아내고 대낮같이 밝힌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은 매우 약합니다. 개개인으로 볼 때는 약합니다. 그러나 다 같이 모이면 강한 빛을 발휘하고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뭉치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죽에 들어간 누룩과 같이 모두를 부풀어 오르게 하는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 삶”
누룩을 반죽에 넣으면 이 누룩이 밤새 자지 않고 발효시키느라 수고를 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보면 모든 반죽을 그릇 가득히 부풀려 놓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누룩에 비유했을 것입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은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알고 나면 생각과 이상과 의식이 적극적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그것은 복음이 들어간 나라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우선 가장 먼저 눈이 뜨입니다. 뜻이 세워집니다. 이상이 세워집니다. 그리고 사고가 적극적이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인 나라들은 한결같이 적극적입니다.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인 서구의 나라들은 세계의 나라들이 어둑하게 잠자고 있을 때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고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새 세계를 발견해서 국기를 꽂고 다녔습니다. 그때 개척자들에 의해서 발견된 대표적인 땅이 오늘의 미국이고 하와이고 호주라는 땅입니다.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던 해가 1598년입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이후 170년 후에 호주가 발견되었고 179년 후에 하와이가 발견됩니다. 그리고 미국은 20년 후에 발견됩니다. 참 생각하면 할수록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그때 이 나라에 이미 서구의 나라들처럼 기독교가 들어와서 이순신 같은 사람이 세계를 향한 눈이 뜨였더라면 이순신이 그렇게 좁은 진해 앞바다만 뱅뱅 돌고 다녔겠습니까. 그는 그 시대에 거북선을 창안해서 몰고 다녔습니다. 그런 선각의 안목에 기독교적 안목과 넓은 시야가 주어졌더라는 그분은 분명 그때 그 넓은 세계를 향하여 가슴을 열고 거북선을 타고 넓은 바다로 향하여 나아가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분명히 그때 호주 아니면 하와이 둘 중 하나는 발견해서 우리 땅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전혀 부질없는 망상이 아닙니다.
그때 서구의 사람들은 이미 기독교 복음을 받아 세계를 보는 안목과 눈이 뜨이고 적극적인 사고의 영향으로 현재의 삶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 놓고 바다를 안마당처럼 휘젓고 돌아다닌 결과 그렇게 주인 없는 땅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세상에 기독교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세상을 볼 줄도 몰랐고 우리나라 말고 더 넓은 세계와 땅이 있는 줄도 상상도 못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모르고 살면 생각과 그 인생의 초점이 자기에게 맞추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알기 전의 인생은 안목이 좁아서 자기입장만 생각하고 이생만 생각하고 자기 집 앞만 보고 알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삶은 대부분 자기 자랑과 나타냄과 과시적 삶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은 경쟁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한 점은 꼭꼭 숨기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예수를 모르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 삶으로는 하나 되고 대화하고 나누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인 삶은 불가능합니다. 모두 더 넓은 세계를 모르고 생각과 안목이 닫혀서 소극적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알고 난 후의 삶은 소극적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변화됩니다. 예수를 알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내 이웃이고 내 형제이고 나와 함께 할 사람들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며 살게 되고 그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용기이고 적극적 사고이고 열린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알면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힘이고 지혜이고 삶의 수단입니다.
어떤 분이 자식 하나가 불구아였습니다. 이 사람은 자식이 불구아인 것이 아주 부끄러웠고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늘 집안에 숨겨놓고 밖에 데리고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아이를 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아이나 부모나 얼마나 불행한 인생을 살아갑니까. 그런데 그 분이 어느 날부터인가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고와 생각과 인생관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습니다. 그 분은 그 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숨김없이 사람들 앞에 내 놓고 보이고 손잡고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것이 변화입니다. 변화도 적극적으로 변화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식의 변화는 모든 생활에 그대로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면에 적극적이 되게 만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래서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엊그제 책한 권을 읽으면서 그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 오렌지 파크에 사는 어느 해군 군인이 있습니다. 이 군인은 아주 독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군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얼굴이 없는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얼굴에 있어야 할 뼈가 자라지 않아 얼굴 없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 아이를 보고 의료진들이 하는 말이 이 아이는 지금까지 불구아로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최악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지금 나이가 4살인데 그동안 14번 수술을 받았는데 앞으로 30여 차례 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아버지의 태도입니다. 해군군인인 그 아버지는 말하기를 사랑스러운 이 딸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며 이 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주시지 않는다, 이 딸은 분명 모든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줄 것이 있기 때문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얼굴 없는 아이가 태어났어도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감사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신앙의 삶이고 복음의 삶입니다. 그것이 신앙 말고 다른 마음과 생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복음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삶의 질의 변화, 이것이 신앙이 주는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그런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역할을 하지 못하면 세상에서 버려지고 밟히고 욕을 당하게 됩니다. 맛 잃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립니다.
아프리카에 내란으로 휘말렸던 르완다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한때 국민 절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이었고 그 나라에 교회도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내란에 휘말리게 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창 내란에 휘말릴 때는 시가지는 온통 강탈과 살육전과 무법천지로 변했습니다. 그때 그 살육전과 강탈에 온 국민들이 무법을 저질렀고 마침내는 그리스도인들과 성직자들까지 가담해서 만행을 저질렀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가 마침내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어느 선교학 교수가 한국교회에 이렇게 충고를 했습니다. “오늘 한국에 교회가 많고 그리스도인이 다수이지만 한국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진정 따르고자 하는 제자의 삶을 배우고 실천하지 않으면 르완다처럼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 충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면 그것은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맛냄의 삶”
잘 발효된 부드러운 빵은 맛이 있습니다. 냄새가 고소합니다. 보기도 좋습니다. 그리고 부드럽고 달콤하고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발효되지 않은 빵은 맛이 없습니다. 그 빵을 무교병이라고 합니다. 무교병은 맛이 없고 질기고 뻣뻣합니다. 아직 숙성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또 다른 의무가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맛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룩의 역할입니다. 맛은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순교사화를 보면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로마군인 들이 물웅덩이에 40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빠트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도 항복하지 않고 모두가 자랑스럽게 찬송을 부르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마인들과 군인들이 찬송을 부르며 의연하게 죽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으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마지막 순간에 물속에 있던 한사람이 그만 항복하고 기어 나왔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마 병사중의 한명이 그 웅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가 빈자리를 채운 채함께 순교해 죽었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모습입니까. 그날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를테면 멋이고 맛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맛과 멋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복음화 되고 그 복음으로 이 세상이 정복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멋과 맛은 그냥 앉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금이 물에 들어가면 산산이 녹아 물이 되어버립니다. 촛불은 모양도 존재도 흔적도 없이 다 타버립니다. 누룩이 반죽에 들어가면 모두를 부풀게 만들어 놓고 자신은 맛으로 변해버립니다. 그것이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보면 개중에 맛을 잃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가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와 신자들이 모여서 새로 교회를 건축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일 밤 기도했습니다. 그때 한 신자가 슬그머니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제 교회를 지으면 건축헌금을 해야 하니 안할 수도 없고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에 가 보니까 그 교회도 내년에 교회를 짓기로 계획하고 기도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이번엔 새로 지은 교회로 갔습니다. 새로 지은 교회에 가야 건축헌금 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는 교회를 건축하고 빚을 갚느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자 부부는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런 삶에는 감동도 용기도 변화도 끼칠 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맛도 있고 멋도 있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룩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에 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을 수록 이 세상은 건강해지고 밝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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