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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가 준 교훈! (막 11:12-14)

by 【고동엽】 2022. 1. 24.

무화과나무가 준 교훈! (막 11:12-14)

 

성경을 읽다 보면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읽어도 이해 못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부분은 읽어도 읽어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때는 참 답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본문 말씀이 그 중의 하나닙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행은 몹시 시장했습니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까 동네 한가운데에 큰 무화과나무 하나가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기대를 가지고 가 보았더니 나무는 아주 무성한데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마 그때 일행은 크게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실망을 하셨던지 그만 무화과나무를 저주해 버리셨습니다. 14절을 보면 "(막11:14)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고 저주를 합니다. 그랬더니 그만 그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여기까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잎만 무성한데 열매를 맺지 못해서 그 나무가 저주를 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13절 끝에 가서 보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어야 할 때 열매를 맺지 않고 잎만 무성했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무가 열매 맺을 철도 아닌데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나무에게서 열매를 찾았고, 또 철도 아닌데 열매가 없다고 해서 그만 저주를 해서 그 나무로 하여금 말라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사람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속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러셀은 말하기를 이 사건을 보면 예수님의 인격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았으면 그것은 농부 책임이지 나무 책임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때는 나무가 열매 맺을 철도 아닌데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무를 저주해서 말라 죽게 했으니 그렇다면 예수의 인격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비인격적인 예수를 신뢰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인 되기를 거부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여기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말라 죽게 한 것은 예수님의 인격이 비합리적이어서가 아니고, 비인격적이어서도 아닙니다. 이것은 그 시대를 향한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나라의 지도자들, 종교인들, 백성들에게 일종의 경고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를테면 "회개하라, 회개하지 않으면 이 나무가 저주를 받은 것처럼 이 나라도 이렇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메시지가 담긴 경고입니다. 이 같은 경고성 메시지를 나라의 지도자들, 종교인들, 백성들이 재빨리 읽고 깨달아서 모두가 회개하고, 각성하고, 살의 자세를 고쳐 나가면 나라가 건강해지고, 또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경고성 메시지를 보내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뭔가 보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면 "(막11: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엇을 보셨느냐 하면 15절에 있는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막11:15)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그때는 정치꾼들이 양을 끌고 성전 안에까지 들어와서 장사를 했을 정도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이런 일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없어야 할 일들이 버젓이 대낮에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그냥 묵인을 해주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분명 그들은 검은 돈을 받고 눈감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회가 온전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런 제사장들을 정면으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들이여'하고 바리새인들만 책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될까 봐서입니다.

그대신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내려야 할 저주를 이 죄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참담한 마음을 이 나무를 향해서 분노와 함께 쏟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무화과나무가 대신 저주를 받아 말라 죽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표요 사인입니다. 이것을 보고 너희는 정신을 차리라는 말입니다. 즉 "이것을 보고도 너희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다음은 너희들 차례다."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상징적인 사건입니까?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초기에 김익두 목사라는 유명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원래 깡패 출신이었는데 회개하고 후에 목사가 된분입니다. 그분이 지난날 너무나 잘못을 많이 저질러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전도를 많이 다녔다고 합니다. 그분은 특별히 교회가 없는 동네만을 골라 다니면서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어느 동네에 들어갔는데 모두 모네기하러 들에 나가 있어서 동네에 사람이 하나도 없더랍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도 들로 나가서 모를 심는 농부들에게 "예수 믿으시오, 지옥 가지 말고 천당 가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농부들이 예수에 미친 사람 또 왔다고 웃습니다. 그때 청년 한 사람이 "목사님, 이곳에 와서는 전도해 보았자 소용 없습니다. 해도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이 청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마 하나님은 안 계시든지, 계시다 해도 그 하나님은 분명 장님일 겁니다. 엊그제 천둥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졌는데 논바닥이 모두 패이고, 고목이 불타고, 바위에 벼락이 떨어져서 구르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눈이 있어 보십시오. 벼락을 때리려면 죄 있는 사람에게나 때릴 일이지 바위와 논이 무슨 죄가 있길래 그 위에다 벼락을 때립니까? 아마 하나님은 없거나 있어도 분명 장님일 것니다."

이 목사님이 듣고 보니 이치가 맞는 이야기입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돌아서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니 하나님이 그에게 영감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 국민학교 다녔나, 서당에 다녔나?"
'예, 국민학교에 다녔습닏.'
"그때 선생님 손에 무엇이 들려 있던가?"
'예, 막대기가 들렸지요.'
"그러면 그 막대기는 뭐하려고 들고 계셨나?"
'그것은 중요한 사항을 가리키거나, 때로는 칠판을 탁탁 치기 위해서 들고 계셨지요'
"그럼 한 가지 묻겠네, 칠판이 무슨 죄가 있어서 탁탁 치나?"
'아, 그야 졸고 있는 아이 정신 차리라고 탁탁 치죠.'
그때 이 목사님이 정색을 하면서 그 청년에게 말씀했습니다.
"정신 차려, 하나님이 논바닥을 치고, 바위를 때리고, 고목을 쳤어도 네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다음은 네 차례야."
얼마나 지혜로운 반박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청년이 그만 그 말 한마디에 충격을 받고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 시작해서 후에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듯이 예표를 보고도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간다면 다음에는 내 차례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그냥 예사로 넘겨 버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웃집 아이의 매맞는 소리가 들릴 때 지혜로운 아이는 TV를 보다가 슬그머니 공부방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도 무감각하게 그냥 앉아 있으면 분명 다음은 내 차례입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볼때마다 무엇인가 나 자신과 연관해서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들이 모두 경고일 수 있습니다. 옆집에서 환란을 당하고 있으면 그 환란이 왜 일어났는가를 나와 연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쳐 버리면 얼마 못 가서 내가 그런 시련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칼 바르트라는 사람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생각하면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세상을 무감각하게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리가 무너져 내리고 아파트가 붕괴되고 배가 가라 앉고 환경이 오염되고 산이 불타고 기상이변이 일어나 해일이 일어나도 회오리바람이 불어 동네가 없어져도 무감각한 시대입니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하고 삽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같은 섬뜩한 사건들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는 겉으로 나타난 불행한 사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도 어떤 경고성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사건들을 그냥 무심하게 보아 넘기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이 같은 사건들을 무심코 넘겨 버린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같은 사고가 또 터질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앞으로의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엄청난 불행을 미연해 방지시키는 희생이고, 예표적인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미얀마 아웅산 사건 때 우리는 아까운 인물드을 잃는 불행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때 온 나라가 충격을 받았고, 분노했고, 탄식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얼핏 보면 국가적인 큰 재앙이었고, 피해였지만 그 사건의 이면을 보면 그것은 결코 불행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이 터지고 나서 김일성이 탄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남한은 더욱 반공으로 굳게 뭉칠테니 이제 무력 통일은 그만큼 늦어지게 된 것 아니냐면서 그렇게 안타까워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은 온 세계가 북한 공산당의 잔학상과 공산주의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홍보하는 결과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은 일과성 사건이 아닌 그 뒤에 일어날 수 있는 국가적인 또 하나의 6,25같은 비극을 사전에 막아내는 결과를 우리 민족에게 주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지 사건이나 한 시대를 이 같은 관점에서 보고 해석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나타난 불행한 모습만을 보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탄식하고, 괴로워하고, 허탈해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마음만 상하고 탄식만 나올 뿐입니다.
문제는 이제부터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바꾸어 불성실한 자세를 고쳐 나가는 일입니다. 돈만 벌기 위해서 불성실하게 공사하던 기업인들도 이번 기회에 정신을 뜯어 고치고, 그 동안 안일했던 공무원들도 그런 식으로 구태 의연하지 말고 정신을 차려서, 우리 나라가 새로 태어나는 계시가 된다면 그 모든 사건이 의미있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한 사회의 그릇된 삶의 방법이 고쳐지고 좋지 않은 관행을 잡아 가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희생하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그 아픔이 없이는 잘못된 환경이 바로 잡혀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죄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서 죽었듯이. 이 죄 없는 자들이 희생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백성들이나, 기업인들이나, 공무원드이나 모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번에도 무감각하게 그냥 지나친다면 앞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정말 무서운 엄청난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건을 보고 만날 때 마다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우리들에게 특별히 주시는 경고의 메시지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는 사건으로 그 시대를 향해서 하나의 사인을 보냈습니다. 그 사인은 '회개하라, 돌이키라, 삶을 정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나무가 저주를 받아서 말라 죽은 것처럼 이 나라도 그렇게 망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성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그런 모습을 보고서도 나라의 지도자들,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그 시대를 살고 있던 백성들 모두가 무감각해서 그 뜻을 모르고 그냥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동네 한가운데에 서 있던 나무가 아침까지도 괜찮았는데 대낮에 순간 말라 죽었다면 뭔가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 할탠데, 나라의 지도자들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무심코 죽은 나무를 바라만 볼 뿐 아무도 그 일을 보고 뭔가를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나라가 어떻게 건강하게 지탱될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러니까 그 일이 있고 나서 꼭 40년 후에 그 예루살렘성은 로마에 의해서 짓밟혀서 산산이 무너지고, 처참하고 철저하게 망해 버리는 환란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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