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시험! (왕상 13:1-10)
신앙인에게 있어서 다루기 힘든 시험이 영적인 시험입니다. 이 영적인 시험은 먹는 문제로 오는 시험이나 영광이나 믿음의 시험과는 또 다른 차원의 시험입니다.
이 영적인 시험은 사람들을 쉽게 현혹시키기도 하고 분별력을 잃게도 만드는 아주 무서운 시험입니다.
아마도 시험 중에서는 영적인 시험이 가장 무서운 시험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정도로 무서운 것인가를 성경 본문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1. 본문은 이스라엘의 북왕국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런데 북왕국은 우상 숭배로 신앙이 많이 타락했습니다. 북왕국의 왕인 여로보암이 직접 우상의 제단 앞에서 분향을 할 정도로 타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남왕국의 젊은 선지자 하나를 택해서 북왕국의 여로보암에게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북왕국에 경고를 보내기 위함이고, 여로보암에게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보내실 때 하나님은 이 젊은 선지자에게 주의 사항을 단단히 일렀습니다. 그 주의 사항 내용이 8-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상13:8)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왕상13: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이 말은 쉽게 말하자면 이런 말입니다. 이제 북왕국에 가서 경고를 하되 혹시 누가 먹을 것을 주거든 먹지도 말고, 뇌물을 주거든 받지도 말고, 물을 주거든 마시지도 말고, 돌아올 때는 가던 길로 오지 말고 다른 길로 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서 철저하게 경고만 하고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젊은 선지자가 남왕국의 유다를 출발해서 북왕국의 왕이 있는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마침 여로보암왕이 우상 제단 앞에서 분향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 젊은 선지자가 여로보암왕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계시를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당신이 우상을 만드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셨느니라. 이제 이 제단에서 분향하는 제사장들은 불사름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과 당신의 후손들은 칼에 죽을 것이고 집에서 죽는 자는 개가 먹을 것이며 들에서 죽는 자들은 공중의 새가 뜯어 먹을 것이다. 그 증거로 이제 이 단이 갈라지고 단 위의 재가 쏟아지리라(1-3)'. 얼마나 무섭고 엄중한 경고입니까? 이 젊은 선지자는 그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여로보암왕이 화가 나서 '저놈 잡으라'하고 고함을 치며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손이 그만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여로보암왕이 놀라면서 젊은 선지자에게 팔을 고쳐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래서 그 팔을 고쳐 줍니다. 여기 이 젊은 선지자는 참 용기 있는 선지자입니다.
우선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주 충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 가라 하니까 아무 소리 않고 갔습니다. 여로보암에게 가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바른 말을 그대로 전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북한에 가서 김정일에게 바른 말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무사히 살아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젊은 선지자는 가서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주신 그대로 전했습니다.
또 이 젊은 선지자는 온갖 향응의 유혹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굳었던 팔을 고쳐 주니까 여로보암이 자기 집으로 가자고 초대를 합니다. 가면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그럽니다. 7절을 보면 왕이 젊은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이 말은 많은 보물을 주겠다는 말입니다. 그 말에 이 젊은 선지자는 한마디로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8절을 보면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 아니하리다.'하고 일언지하에 거절을 합니다.
이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임금이 젊은 선지자를 죽이려 했다가 보니까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알고는 집으로 초청을 했습니다. 따라가면 굉장한 환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물질의 보상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선지자는 그 제의를 한마디로 일축해 버립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젊은 선지자는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니까 그렇지 오늘 현실로 이런 일이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거절하기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 젊은 선지자는 그만큼 임무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선지자는 얼마나 강한 신앙의 사람입니까? 상당한 출세를 보장해 주는 암시가 있었는데도 그런 유혹을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비겁하지도 않고 물욕에도 흔들리지 않고 출세욕에도 초연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이 사람이 지금까지 어려운 시험을 잘이겨 냈는데 나머지 한 가지 시험에서 그만 허무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시험도 아니고, 미인계도 아니고, 다름 아닌 영적인 시험에 걸려서 넘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영적인 시험이 가장 무서운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2. 이 젊은 선지자가 임무를 다 마치고 유다로 돌아갑니다.
가다가 상수리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데 어느 노인 한 사람이 나귀를 타고 쫓아옵니다. 와서 이 노인이 하는 말이 '우리 집으로 갑시다. 가서 떡을 먹고 가십시오.' 그럽니다. 그 말에 이 젊은 선지자는 또 한마디로 거절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엄중하게 지시를 내리신 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이 노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왕상13:18) 나도 선지자요" 그럽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방금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기를 당신을 데려다가 떡을 먹이고 물을 먹이라 하셨소" 그럽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방금 내게 지시하시기를 네 후배 선지자가 남쪽에서 와서 타락한 여로보암에게 용기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니 그가 피곤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를 데려다가 목을 추기게 하고 먹을 것을 주어 접대하라 하셨다. 그러니 우리 집으로 가자.'
이 늙은 선지자라는 사람이 방금 하나님으로부터 계시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젊은 선지자는 이 말 한마디에 그만 넘어지고 맙니다. 젊은 선지자는 그 말에 전혀 의심 없이 노인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18절 끝에 가서 보면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젊은 선지자는 아무 의심 없이 따라가서 실컷 먹고 마십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이렇게 현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가 계시를 받았다하면 이렇게 사족을 못 쓰고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시험 중에서 영적인 시험이 가장 무섭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젊은 선지자는 그 늙은 선지자라는 사람의 말을 듣고 나서 생각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늙은 선지자에게 계시를 하셨다면 먼저 자기에게도 어떤 지시나 계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지시도 없었고 계시도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다시 확인하는 기도를 했어야 합니다. 이치로 따지자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젊은 선지자는 어느 노인이 와서 '나도 선지자요. 하나님이 방금 계시하시기를 당신을 데려다 대접하라 했소' 하는 그 말 한마디에 그만 무장을 해제하고 따라가서 마음놓고 떡을 먹고 물을 마시고 향응을 받았습니다.
이 젊은 선지자가 떡을 다 먹고 물을 마신 후에 늙은 선지자라는 사람이 순간적으로 얼굴 빛을 바꾸더니 하는 말이 '젊은이, 자네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어, 벧엘에 가거든 아무것도 받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 했는데 먹고 마시고 했으니 이제 당신은 죽게 될 것이요. 그리고 당신의 시체는 조상이 묻힌 묘실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요.(21-22절) 그럽니다. 얼마나 소름끼치는 행동입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이 젊은 선지자가 아차 했습니다.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하고 당황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이미 보기좋게 속았습니다. 후회를 하고 뉘오치면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힘없이 돌아갑니다.
24절을 보면 이 사람이 가다가 사자를 만나 죽었습니다. 29절을 보니까 늙은 선지자가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젊은 선지자의 시체를 갖다가 장사를 지내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이 늙은 선지자가 누구냐 하면 북왕국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왕이 너무 무섭게 독재를 하는 바람에 모두들 무서워서 나라가 온통 우상 제단으로 단장되는데도 불구하고 한마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을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 다른 선지자들도 말하는 사람이 하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양심의 소리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죽을까 봐서 숨어 살고 있었ㅅ브니다.
그런데 듣자니까 남쪽 유다에서 젊은 선지자 한 사람이 와서 여로보암왕을 말 한마디로 굴복시키고 떡 한 조각도 거절한 채 지금 돌아가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 이 늙은 선지자는 자존심이 몹시도 상했을 것입니다. 자신도 선지자로서 마땅히 말을 해야 했음에도 못했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자신이 나이 먹은 선배 선지자로서 부끄러웠겠습니까?
그래서 이 늙은 선지자는 그 용기 있는 젊은 선지자를 시험해 보려고 나셨던 것 같습니다. 뒤를 쫓아가서 '나도 선지자요. 하나님이 방금 계시하시기를 당신을 데려다가 대접하라 하셨소. 그러니 우리 집으로 갑시다.' 그랬더니 그 한마디 말에 그렇게 단호하고 초연하던 젊은 선지자가 그만 아무 의심 없이 따라가서 먹고 마시고 쉬었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젊은이가 그렇게 쉽게 따라가서 먹고 마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영적인 시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시험이 이렇게 무서운 시험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용기가 있습니다. 어떤 신앙인은 죽음이 와도 무서워하지 않을 만큼 용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비교적 불신자들보다 죽음의 위협 앞에 두려움이 적은 편입니다. 때로는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몰욕 때문에 간혹 신앙을 팔아먹는 신자들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물욕을 이기는 신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물욕을 적절하게 이기고 지혜롭게 극복하고 절제하면서 살아가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또 출세를 위해서 예수를 버리는 신자들도 더러 있지만, 더 많은 신자들이 그 유혹도 잘 이겨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잘 이겨 내는 신자들이 허무할 정도로 너무 쉽게 끌려가는 시험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시험입니다. 사람들이 사이비 신앙에 너무나 잘 끌려 들어갑니다. 사이비 신앙인들이 영적이라는 옷을 입고 도전해 오면 너무 쉽게 잘 넘어져 버립니다.
한때 박태선 전도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빠져 들었습니까? 전도관에 가야 향내가 난다고 얼마나 떠들었으며 그것이 성령의 나타난 증거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혹을 받고 따라다녔습니까? 거기나 가야 복을 받고, 은혜를 받고, 병을 고치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해서 재산 싸들고 따라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제 36년 동안도 잘 이겨 냈던 사람들이. 신사 참배 앞에서 그 모진 시련도 생명을 내걸고 참아 내고 죽을 각오로 신앙 지조를 지켰던 사람들이 그 영적인 유혹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영적인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3. 이 점이 한국교회의 가장 약한 취약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민족에 비해서 이 취약점이 더 큽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조금 신령하다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족을 못 쓰고 쫓아 다닙니다. 그리고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해서 그리로 몰려 다닙니다.
예언을 한다는 사람이 있다 하면 또 그곳으로 몰려 갑니다. 예언하는 사람이 '당신에게 사명이 있다'고 한마디 하면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고느 아이들, 집안일 모두 놔 두고 신학교 가겠다고 나섭니다.
우리나라 신앙인들은 신앙적으로 속여 먹기가 쉽습니다. 여러분들이 잠자고 있는 새벽 2,3시쯤 전화를 걸어서 '내가 지금 기도하는 중에 당신이 지옥에 떨어져 뜨거운 불못 속에서 고통스럽게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았는데 무슨 일 없느냐'고 한마디만 하면 여러분들은 지례 죽습니다. 모두 사색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나는 무신론자다'하고 우리는 사람, 세상에 무신론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새벽에 전화 한 통화면 그 고집도 무력하게 깨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유혹하고 이용하고 속이고 그래서 치부하는 곳이 어디 한두 군데입니까? 그런 곳에 가지 말라고 하는데도 몰래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사람이 말씀 위에 든든히 서기만 하면 그 생활은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뭐가 답답해서 엉뚱한데 귀를 기울이려 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병고치는 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은 예언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말씀 위에 굳건히 서기만 하면 그의 삶은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신비스럽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말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 말씀이 내 속에 살아 있기만 하면 그 말씀이 내게 힘을 주고, 능력을 공급해 주시고, 인도자가 되어 주시고, 분별력을 제공해 주십니다. 그 생활이 성령에 충만한 생활이고, 하나님의 손에 잡혀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건강한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오늘같이 탁한 세상에서 말씀에 더욱 가까워지시기 바랍니다. 더욱 깊이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힘있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욕된 인생! (수 7:1) (0) | 2022.01.26 |
---|---|
영점일(0.1%)와 100%의 신비! (삼상 17:45-49) (0) | 2022.01.26 |
두 정신의 문화! (창 4:16-26) (0) | 2022.01.26 |
한나의 기도! (삼상 1:14-18) (0) | 2022.01.26 |
재물보다 명예를! (잠 22:1-6) (0) | 2022.01.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