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픔의 시험! (마 4:1-4)
시험이라는 말은 페이라조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한번 걸어 본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넘어지나 안 넘어지나 한번 걸어 보는 것을 시험이라고 합니다. 걸어 보았는데도 넘어지지 않으면 시험으로 그냥 끝나는 것이고, 한번 걸어 보았더니 넘어졌다 하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시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고통은 대부분 이렇게 해서 주어집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이런 시험들을 여러 번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번 걸었다 하면 가장 잘 걸려 넘어지게 되는 시험이 대체적으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배고픔의 시험이고, 믿음의 시험이고, 욕망의 시험입니다. 이 세가지는 사람들이 아주 잘 걸려 들게 되는 시험의 종류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자꾸만 실수를 해서 넘어지는 것을 보게 되는데 보면 거의가 다 이 세 가지 시험 중 하나에 걸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이 세 가지 시험은 사람들로 하여금 많이 실족하게 하고 넘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배고픔에서 오는 시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이 배고픔에서 오는 시험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시험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시험에 속합니다.
배고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배고파 본 사람은 다 아는 것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습니다. 좋은 옷도, 좋은 집도, 즐거운 여행도 모두 배가 부르고 난 후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일주일만 금식해 보십시오. 그러면 사람이 먹는다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먹는 문제만 집요하게 생각날 뿐입니다. 그만큼 굶주린 사람에게는 이 먹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큰 문제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기도원에 가서 함께 금식을 했습니다. 그 어린 아들이 하루는 잘 견뎌 내더니 이틀쯤 지나니까 몸부림을 치기 시작하더랍니다. 아주 발광을 하더랍니다. 그러다가 하는 말이 '나 이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밥 될래' 그러더랍니다. 배고픔은 이렇게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본성이 잘 나타나고 약점이 잘 노출될 때가 언제냐 하면 바로 굶주렸을 때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굶주리게 되면 한결같이 비굴해지고 의지가 약해지고 평소 가지고 있던 신조들이 무참하게 무너져 내립니다. 그때는 체면도 없어지고 자존심도 모두 없어져 버립니다. 그리고 평상시에 잘 나타나지 않던 숨은 인간의 본심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저는 중학교 때에 양식이 없어서 굶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정말 보는 것이 모두 다 먹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집 아줌마가 라면을 끓여서 자기 아들을 먹였습니다.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지금도 라면만 보면 그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솔직한 고백인데 사람이 그렇게 치사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노란 국말 만이라도 조금 먹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그것이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그렇게 치사해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먹는다는 문제가 이렇게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굶주리고 허기지고 배가 고플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이때는 거의가 다 무방비 상태입니다. 허점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때입니다. 사탄은 그때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사람을 유혹하고 시험을 합니다. 그때 사람이 시험에 걸리게 되면 거의 대부분은 속수 무책으로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만큼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사람을 유혹하되 그 환경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가지고 와서 유혹을 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들고 와서 시험을 합니다. 그러면 거는 대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먹는 문제로 넘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시험 중에는 이 배고픔의 시험이 제일 무서운 시험입니다.
2. 예수님도 그렇게 굶주렸을 때 사탄이 먹는 문제를 가지고 와서 시험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도 40일을 굶주렸을 때입니다. 40일씩이나 굶주린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탄은 먹을 것으로 유혹을 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탄의 시험은 이렇게 그 환경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가지고 찾아와서 유혹을 합니다. 사탄은 시골 농사꾼에게 다가가서 공금을 횡령하라고 유혹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농사꾼에게 아무리 집요하게 공금을 횡령하라고 유혹을 해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농사꾼에게 그런 시험은 하지 않습니다. 대신 노름하라고 자꾸만 유혹을 합니다. 술마시고 취하고 방탕하라고 유혹을 합니다. 그것이 농사꾼에게는 가장 쉬운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또 사탄은 우리드에게 다가와서 돌로 떡을 만드어 먹으라고 유혹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그렇게 터무니없이 공작을 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사람을 유혹하되 그 사람에게 아주 가능하고 필요한 것을 가지고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께 찾아가서 유혹한 것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예수님에게 있어서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먹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이렇게 집요하게 와서 공작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무리 배가 고팠어도 먹을 것으로 그 순간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40일씩이나 굶주렸어도 먹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0일씩이나 굶고 허기졌어도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지 먹는 문제가 우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은 사람이 당장 배가 고프다고 해서 사탄이 시키는 대로 할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를테면 눈앞에 있는 이 현실, 이것만을 위해서 분별력 없이 아무것이나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되면 당장은 배가 부를지 모르지만, 그는 그만 사탄의 종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중심은 사람이 40일 동안이나 금식을 해서 굶주린 상태일지라도 먹을 것이 먼저가 아니고 말씀이 먼저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교훈입니다.
여러분, 애서를 보십시오. 당장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 먹습니다. 그리고 팥죽 한 그릇을 맛있게 먹습니다. 그 당시는 배가 불렀을 것입니다. 또 그 순간은 만족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에서가 얼마나 비참해지고 초라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까? 당장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서 팥죽 한 그릇을 먹고 나서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40일을 금식해서 줆주렸을지라도 먹는 문제가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먼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중심은 사람이 40일을 굶주린 상태에 놓여 있을지라도 먹을 것이 먼저가 아니고 역시 말씀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인 것입니다.
3.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평생을 목회했습니다. 당신 자신도 굶어 가면서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빈민 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위로받기를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목회를 했으니 나는 하나님을 뵈옵기도 떳떳하다 하고 자위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목사님이 길을 가다가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보니까 사람이 거의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업고 집으로 가서 극진하게 간호를 해서 살려 냈습니다. 그 사람은 폐병으로 거의 죽어 가고 있던 사람입니다. 이 목사님은 그 폐병 환자를 잘 먹이고 아주 극진하게 보살펴서 건강이 회복된 다음에 집을 찾아서 돌려 보냈습니다. 그때 얼마나 보람이 있었겠습니까? 이 목사님이 만족한 마음으로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몇 달 후에 어느 부인이 찾아와서는 하는 말이 '당신이 내 남편을 죽였습니다.'하고 항의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당신의 남편을 죽였다니 당신은 누구냐'하고 묻자 이 부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목사님이 길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람을 잘 돌보아 주셔서 살아난 그 사람의 아내입니다. 내 남편은 병들었을 때는 착한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내 남편을 보살펴 주셔서 건강을 되찾고 난 후에는 돌아다니면서 사기를 치고 난봉질을 하고 집에는 들어오지도 않고 방탕하다가 엊그제 바닥에 쓰러져서 죽었습니다. 당신이 내 남편을 죽인 것 아닙니까?'
그 말을 듣고 나서 이 목사님이 땅이 꺼지는 아픔을 느겼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자신도 굶주려 가면서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목회한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허무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깨달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본문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40일을 굶주렸어도 먹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먼저'라는 그 말씀의 깊은 뜻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 가고 있던 그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기 이전에 먼저 이 말씀을 먹였더라면, 먼저 그 마음속에 이 말씀을 간직하게 해주었더라면 그 후 그 사람이 그렇게 타락해서 또다시 길바닥에 쓰러져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에서 그 목사님은 그만 통탄해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의미하는 뜻을 이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40일을 먹지 못해서 굶주렸다 할지라도 먹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먼저다.' 여러분은 이 말씀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구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일시적으로 끌 수 있고, 일시적인 도움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그 영혼을 구원해 내지는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할 때 자꾸만 먹여 주는 문제로 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일시적인 수단일 뿐이고 방편일 뿐, 근본적인 전도 행위는 아닙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 말씀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문제이고 근본적인 방법입니다.
4. 그래서 이 세상을 자세히 보면 정말 값이 있고 중요한 것들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영원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모두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들입니다. 구원이나 영생, 믿음, 소망, 사랑, 천국 이런 말들은 한결같이 추상적인 것들입니다. 모두 손에 쥐어지거나 만져지거나 구체적으로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 아닌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때로 이것들을 소홀히 여기고 무시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이것들이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것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마음속에 말씀이 들어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사람이 임종의 시간이 다가와서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일지라도 그 마음속에 이 말씀만 들어 있으면 겁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지혜 있는 사람은 오늘만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만을 위해서 살지도 않습니다. 오늘 배부른 것만을 위해서 살지도 않습니다. 오늘을 살기 위해서 거짓말하지 않고 도둑질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한 끼니 먹기 위해서 장자권을 팔아 먹을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뇌물을 먹고 곤욕을 치루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렇게 먹으면 오늘 당장은 배가 부를지는 몰라도 그 대신에 내일의 모든 것들은 다 박탈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본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40일씩이나 굶주린 사람일지라도 먹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말씀이 먼저다' 이것은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특히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이 시대를 먹는 문제로 실수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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