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든 신앙! (요 15:16-19)
나무에 달린 과일들이 빛깔 좋게 익어 가고, 들판의 곡식들이 누렇게 익어 가는 모습을 보면 참 보기에 좋습니다. 거기에 무게가 있어 보이고 값이 있어 보입니다. 무엇이든지 성숙해진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철든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성숙한 신앙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생각하는 것이나 판단하는 것이 다 어설픕니다. 생각하는 것도 짧고 판단하는 것도 고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보면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를 위해서는 손해를 보려고 하지르 않습니다. 아주 이기적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위주입니다. 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철이 들게 되면 비로소 자기의 태두리를 벗어나게 됩니다. 처신하는 것도 달라지고 생각하는 것에도 깊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판단하는 것도 훨씬 더 성숙해져서 늠름해지고, 고생도 할 줄 알고, 수고도 할 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그만큼 정신적으로 여물고 성숙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철이 들기 전에는 마치 철없는 아이와 똑같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판단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차원을 넘지를 못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 분노하고 다투게 되고 실망하고 토라지고 그럽니다. 아직 어려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은 새 신자들을 다루기가 아주 조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가서 그들의 신앙이 여물게 되고 철이 들게 되면 우선 자기의 차원을 넘습니다. 그래서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때로 수고할 줄도 알게 되고, 생각도 깊이 있게 할줄 알고, 봉사에 참여도 하고 그럽니다. 이렇게 신앙이 성숙해지고 철이 들게 되면 맨 먼저 변화되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께서 나를 택하여 주셨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철이 들면 가장 먼저 주어지는 생각의 변화입니다. 신앙이 철이 없을 때는 내가 주께로부터 택함을 받았다는 생각이나 믿음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내가 예수를 찾아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 종교 가운데서 내가 기독교를 선택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때는 대부분 신앙이 윤리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습니다. 수양적인 신앙의 차원을 넘지를 못합니다. 헌신을 한다거나 고백적인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교회는 그냥 왔다갔다 하는 차원을 넘지 못합니다.
이때의 신앙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다", "내가 예수를 찾아갔다", "내가 예수를 믿어 주었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이 모두 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철이 들게 되면 이런 생각이 근본적으로 뒤바뀌게 됩니다. 내가 예수를 알게 된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먼저 나를 알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예수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를 알기 전에 이미 예수께서 나를 먼저 선택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예수를 찾아간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먼저 나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지금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래서 비로소 이때 깊이 감추인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되고 알게 되고 그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이것이 위대한 발견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철든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의 주체가 "나"에서 "주님"으로 바뀌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이렇게 하셨다"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중에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아직도 "나"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신앙입니다. 아직 초보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앙이 철이 들게 되면 가장 먼저 "나"에서 "예수"로 그 주체가 넘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두 번째로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하는 믿음의 변화입니다.
믿음이 철이 없을 때는 모두 "내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면 "이렇게 해주십시오.", "저렇게 해주십시오."하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 뜻대로 하옵소서"하는 기도입니다. 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이들을 보십시오. 모두가 자기 위주입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모두 자기 뜻대로 해 달라는 것뿐입니다. 아직 유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신앙도 철이 들면 그 내용이 달라집니다. 생각도 달라집니다. 의식도 바뀝니다.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철든 신앙인의 기도입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것이 바로 순종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모든 기도가 끝날 때는 반드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끝을 맺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그 기도가 성숙한 기도이고 철든 신앙인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어떤 때는 철이 없는 기도도 많습니다. 나 자신도 아주 철이 없는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아주 이기적이고 어린아이와 같은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모다 깊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그런 기도를 하지 못하고 항상 피상적인 문제들만을 앞에 놓고 매달려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긴 외나무 다리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외나무 다리에 올라서서 밑을 내려다보니까 깊은 낭떠러지입니다. 거기에는 급류가 거세게 흐르고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무섭습니다.
이 사람이 조심스럽게 다리 중간쯤을 건너가는데 바람이 불어서 다리가 몹시 흔들렸습니다. 순간 현기증이 났습니다. 떨어지면 그만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다급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무사히 건너가게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다음 주일날 감사헌금 백만 원을 하겠습니다."하고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결 마음이 안정도 되고 바람도 잔잔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다리를 조심스럽게 거의 다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순간적으로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거의 다 건너왔다는 생각이 들자 마자 백만 원을 헌금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기도를 고쳤습니다. "하나님, 아까 백만 원 약속한 것은 생각 없이 한 것이구요, 50만 원만 하면 안 될까요? 제 마음이해하시죠"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바람이 획 하고 또 불었습니다. 다시 외나무 다리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금방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때 이 사람이 그대로 주저 앉아서 외나무 다리를 꼭 붙잡고 하는 말이 "하나님, 농담도 못합니까?"하고 불평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다급할 때 얼마나 약속을 많이 남발했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다급하게 기도를 많이 했습니까? 그러고는 다급함이 가시고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고 병도 낫고 발등의 불이 꺼지고 나면 그때 우리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모두 다급해서 한 약속들을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모두 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사람이 철이 들면 비로소 부모를 생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철이 들어야 부모의 깊은 마음과 생각을 해아릴 줄 알게 되고 뜻을 이해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 중심에서 "부모" 중심으로 생각이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성숙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신앙도 철이 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헤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것이 성숙이고 발견입니다. 신앙이 성숙하게 되면 이렇게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세 번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신앙이 다져지고 여물게 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자신을 감추고 그 은혜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철이 없을 때는 모두 자기 자랑을 많이 합니다. 자기를 과시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했다", "내가 이렇게 해서 성공했다"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그런 사람이 나옵니다. 부자 청년이 농사를 잘지어서 소출이 많아졌습니다. 그때 이 청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가 곡간을 헐고 내 모든 곡식을 그곳에 쌓아 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내 영혼아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 이 짝막한 구절 속에 "나"라는 말이 여섯 번씩이나 나옵니다. "내가" 농사를 잘 지었고, "내가" 소출을 많이 냈고, "내가" 자수 성가했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나"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신앙적으로 철이 들고 성숙해지게 되면 먼저 이 중심이 바뀌게 됩니다. 우선 "나"가 없어집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인생의 지나온 과거를 돌아다보면 내가 한 것은 없고,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비로소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백하기를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철든 신앙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살아온 발자취를 가만히 뒤돌아보며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한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깊이 생각을 해보면 우리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할 것밖에는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면 여기까지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좀 깊이 생각을 해보면 이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이 경험하는 변화입니다.
네 번째는 하나의 각오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이 철이 들고 성숙하게 되면 예수님을 위해서 손해 볼 각오가 생깁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할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힘든 일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부름도 하기를 싫어합니다. 그것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자라서 철이 들면 모든 것을 알아서 합니다. 공부도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스스로 알아서 합니다. 직장 생활도 시켜서 하지 않습니다. 모두 알아서 합니다. 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이 그렇습니다. 신앙이 철이 없을 때는 서운한 것이 많습니다. 오해도 많습니다. 아까운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손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수고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철이 들면 생각하는 것도, 태도도 달라지게 됩니다.
우선 희생할 각오가 생깁니다. 손해 볼 각오가 생깁니다. 복음을 위해서 핍박이 주어진다면 그것도 기꺼이 감내하려는 각오도 생깁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무엇을 얻을까를 생각했지만, 철이 들면 이제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만큼 성숙해져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참 신앙의 기쁨이 어디에서 얻어집니까? 그것은 그렇게 수고하고 헌신하고 희생할 때 비로소 얻어지고 발견되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든 신앙인은 고생이나 박해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수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죽어 가면서도 웃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위해서 모두를 잃었지만 동시에 그렇게 만족하고 행복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희생하고 피흘리고 고난받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은 그런 박해도 없고 순교도 업소 죽여 주는 사람도 없는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희생을 요구하신다 해도 그 요구에 기꺼이 응할 사람도 많지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잘 믿고 그 믿는 과정에서 그만한 정신과 용기와 수고는 가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의무도 아닙니다. 성숙한 사람은 누가 시켜서 수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철든 신앙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같은 축복이 여러분들에게도 주어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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