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4-6)
다윗은 그 생애가 참 다양한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체험을 모두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남들이 겪어 보지 못한 용감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은 어렸을 때부터 특출난 면모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용맹은 목동 시절부터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그는 양을 치다가 맹수들이 오면 주저함 없이 달려가 물매로 맹수들을 물리쳤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어느 때는 맹수들과 맞붙어 생사를 걸고 싸워 맹수들의 입을 찢어 놓는 용맹스런 면모도 과시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이야기는 그의 용맹성을 포장하려는 일련의 전설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순전히 전설만은 아닌 것이, 그가 골리앗 앞에 나갈 때의 겁없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틀린 것만도 아닙니다.
아무튼 다윗은 어렸을 때부터 그 면모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골리앗 앞에 나아갈 때의 다윗의 모습은 그에게 있어 결정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그때는 꿈이 있고, 용기가 있고, 믿음이 있고, 진실이 있는 그런 젊은이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젊은이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전설이요, 표상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는 또 영화도 누려 본 사람입니다. 다윗의 영화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호화로운 영화입니다. 우선 그는 천하를 통일하는 위업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잘 치리하는 역대 임금 중 가장 영화를 누린 왕입니다. 오늘도 히브리인들은 그때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하를 통일하고 주변 국가들을 모두 종으로 삼아 조공을 받아 먹던 그 시절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런 명성을 떨쳤던 임금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주 다윗을 말하고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에게 명성과 영화와 번영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한편의 모습일 뿐입니다. 사람에게는 한편만의 인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윗도 그 이면을 보면 인생에서 쓰라린 피눈물을 흘렸던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당해 보지 못한 환난과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고난을 당했고, 한때는 아주 초라한 자리로 전락하는 길을 걷기도 했고, 또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야 하는 수난의 삶도 살았던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그의 인생은 명암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그런 양면성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의 모습이 오늘 읽은 말씀 속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 유명한 시편 23편의 일부분입니다. 이 시는 읽으면 읽을술고 흐뭇하고 포근한 마음을 주는 시입니다. 한편 정겹기도 하고 목가적이기도 해서 아주 한가로운 기분을 주는 그런 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이 시를 애송하고 즐겨 읽습니다.
그런데 이 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정겹고 평화롭기만 한 그런 시가 아닙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썼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다윗이 이 시를 쓸 때의 심정은 그렇게 한가한 마음에서 쓴 것이 아닙니다. 이 시의 배경을 살펴보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긴장과 고뇌와 고난이 배어 있습니다.
다윗은 평생 여러 번 기막힌 위기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혹독하게 위협을 당한 것은 사울로부터의 위협입니다. 다윗은 사울로부터 심각하게 위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밤낮 없이 긴장하면서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언제 잡혀서 능지처참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도망다니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긴장된 삶을 살았습니다.
사울의 추격이 얼마나 집요했는가 하면 나라의 공권력을 가지고 잡으러 다녔습니다. 당시 사울은 국사는 제쳐 두고 정적을 잡기 위해서 골몰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언제 누구에게 밀고를 당해서 생포되어 사울 앞에 끌려갈지 모르는 순간들을 피해 다니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 심정이 어떻했겠습니까?
또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서 도망가는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어느 날 아들로부터 쿠테타를 당합니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준비도 없이 맨발로 시골로 피신을 갑니다. 그때 백성들 보기에 하도 부끄러워서 머리를 풀고 눈물지으며 도망을 갔습니다. 곁에서 저주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손 한번 쓰지 못하는 약한 존재가 되어서 묵묵히 그 소리를 다 들으면서 낙향을 합니다.
다윗이 아니고서는 이 같은 일을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윗만이 당했던 일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아들로부터 쿠테타를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로부터 자신의 후궁들이 능욕을 당하는 수모까지 겪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모의 극치입니다. 이것은 모욕의 극치입니다. 다윗의 영광 뒤에는 이런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또 그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반군들을 모아 추격해 옵니다. 아들이 권세에 눈이 멀어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의 뒤를 좇고 있습니다. 붙잡히면 아들의 손에 다윗은 죽습니다. 압살롬은 이제 아들이 아닙니다. 그의 손에 잡히면 능지처참을 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나온 고백이 "내가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얼마나 전율이 느껴지는 환경입니까? 무력이 무섭고 사람이 무섭기도 했지만 그 마음이 더 무서웠던 것입니다. 그 인심이 무섭고 마음의 표변이 더 무서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지금 심정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있는 기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현재만을 보면 어느 곳 하나 빠져 나갈 길이 없습니다. 절망뿐입니다. 미래가 지극히 불투명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현실만 보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현실은 어느 시대나 크게 소망적이지 않습니다. 살맛이 나질 않습니다. 다윗이 그런 입장에 처했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다윗은 지금 현재만을 보지 않습니다. 그가 현재만을 생각했다면 그때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암담한 현실을 딛고 그 현실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세가지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나는 "내가 사마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 지팡이는 목동이 양르 치는 데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막대기는 짐승이 오면 쫓는 데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여기서 주님을 양치는 목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울이 아무리 막강한 권세를 앞세우고 나를 죽이려고 달려오나 두려움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오늘 되어지는 삶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게 되면 원망이 나오고 비관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자살해서 죽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오늘 현실에 너무 비중을 크게 두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나타난 현실은 대부분 소망적이지 않습니다. 오늘만을 놓고 보면 별로 희망이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배후에 있는 소망의 손길을 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오늘 거대한 공권력을 가지고 자기를 잡아 죽이겠다고 쫓아 다니는 사울왕과 맞서서 싸웠습니다. 이 둘은 서로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지만 사울의 힘은 골리앗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다윗은 사울과는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 엄청난 힘을 가진 사울 앞에 서 있는 다윗의 심정이 얼마나 떨리겠습니까?
그때 다윗은 떨리는 심정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사울의 권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윗이 그런 상황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현실도 중요하게 보아야 하지만 그 현실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현실을 배후에서 움직이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위 신앙인의 안목입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내 머리에 기름을 바르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서 다윗은 이 싸움의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아무리 공권력을 가지고 나를 잡아 죽이려고 쫓아다니지만 결국 이 싸움은 내가 이긴다. 보라, 결국 하나님은 내 머리에 기름을 부으실 것이다."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신 만만합니까? 이것이 신앙인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신앙인에게 이 하나님이 배후에 계시다는 것은 큰 무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배후에 계시는 한 그리스도인은 기죽지 않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그 막강한 공권력 앞에서도 결코 기죽지 않았던 것은 배후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 버티고 서 계신 하나님의 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결국 사울을 물리치시고 자기의 손을 들어주고 사울 앞에서 상을 베풀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온 고백이 6절입니다. "나는 내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만족스럽게 응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인생에 넘치도록 축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런 만족함을 마음껏 누렸던 사람입니다. 다윗이 오늘 현재만을 보았으면 이런 만족한 고백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 알보 보면 이것은 다윗만의 고백은 아닙니다. 우리들 자신의 생활에서 되돌아보면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역사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분에 넘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로 분석됩니다.
첫 번째는 "우리들 기대보다 훨씬 더 과분하게 채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대보다 훨씬 더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옛날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 때 우리가 오늘 같이 살아갈 줄을 꿈에나 생각을 했습니까? 그때 기도하기를 오늘 같은 축복을 달라고 기도나 했습니까? 오늘같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서울로 왔고 서울에 올 때는 모두들 두렵고 근심된 마음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현실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넘치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내 증조부와 아버지는 모두 농부였다. 그런데 내 아버지는 생활고로 광산촌으로 이사 가서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내 아버지는 내가 시골 읍장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런데 나는 후에 대학을 졸업하여 학사학위를 받았고 학자생활을 하다가 수도사가 되어 결국 교황과 맞서 종교개혁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오늘 이런 일을 하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시골 광산촌에서 태어난 루터는 그때 자신이 그런 자리에까지 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나올 수밖에 없는 고백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입니다. 얼마나 흡족하고 만족한 고백입니까!
사실 이것은 우리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그런 기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생각이나 뜻이나 기대보다도 월등한 환경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고백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만 있을 뿐입니다.
두 번째는 내 노력에 비해서 하나님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상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원래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신분으로 보면 아주 비천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옛날 모습입니다 그때 그가 노력을 했다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또 노력을 한들 한 나라의 왕까지 되겠습니까?
왕이 된 후에도 그는 별로 노력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왕이 된 후에 한 일은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한 일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하고서는 우리아를 건쟁터에 내보내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와 함께 살아갑니다.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얼마나 지능적이고 죄질이 악합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에게 여전히 복을 주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문제의 여인의 몸에서 솔로몬을 낳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를 다윗을 이어 왕이 되게 하십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죄스러운 일이고 또 분에 넘치는 축복입니다. 얼마나 기막힌 은혜입니까! 그래서 나온 고백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이것은 다윗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오늘처럼 복을 받는 데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들이 얼마나 수고를 하였으며, 밤잠을 못 잤으며, 무슨 핍박을 받았고, 무슨 욕을 받았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렇게 은혜 주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내 잔이 넘치나이다"하는 고백뿐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감사한 것은 "우리들의 기도에 비해서 엄청나게 풍성한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한 만큼만 은혜를 입는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얼마만큼이나 복을 받을 자신이 있습니까? 기도한 만큼만 복을 받는다면 우리들은 모두 자격 미달입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얼마나 기도를 하십니까?
우리들이 보통 하는 기도는 하루에 대부분 20초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식사할 때 5초 정도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하루 세 번에 15초입니다. 그리고 잠잘 때 하는 5초의 기도뿐입니다. 그것을 모두 합해 보아도 20초밖에 안 됩니다. 또 많은 분들은 이것조차도 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기도하지 않은 것에 비해 오늘 우리가 받은 은혜는 너무나 큽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좀더 깊은 기도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삶이 얼마나 충만한 삶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나온 고백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현실은 너무나 한심합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현실은 언제나 사람을 만족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언제나 오늘은 마음에 차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의 눈은 저 배후에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그 손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는 최상의 국방력이다! (대하 17:3-5) (0) | 2022.01.27 |
---|---|
요셉의 청년 성! (창 37:9-11) (0) | 2022.01.27 |
천사들의 헌신! (사 6:1-5) (0) | 2022.01.27 |
인생의 목자! (시 23:1-6) (0) | 2022.01.27 |
솔로몬의 기도! (잠 30:7-9) (0) | 2022.01.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