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청년 성! (창 37:9-11)
사람은 어렸을 때 모두 나름대로 꿈을 가지게 됩니다. 다들 장차 나는 어떤 사람이 되겠다 하는 꿈과 기대와 생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꿈이 성장한 후에 그대로 성취되는 분이 있고, 그것은 아니더라도 그 방향으로 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분명한 꿈과 포부를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세기를 움직였던 위인들을 보면 한결같이 어렸을 때부터 이런 원대한 꿈과 포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율곡은 청년들에게 주는 글에서 청년은 무엇보다도 먼저 입지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뜻을 세우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청년은 이미 세상을 다 살아간 세대가 아니고 이제 세상을 살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청년에게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어디까지나 분명한 목표여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목표가 있으면 그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자세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율곡은 젊은이들에게 먼저 입지를 세우라고 갈파한 것입니다.
1. 환상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요셉은 우리 청년들에게 아주 좋은 삶의 모습과 자세를 보여 준 사람입니다. 그는 우선 환상이 있는 젊은이입니다. 꿈이 있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어떤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꿈을 가슴에 간직하고 그 꿈이 현실로 나타날 것을 기대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는 밤에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꿈이었습니다. 밤마다 그의 꿈은 미래에 대한 강한 암시를 주는 꿈이었습니다. 들에 있는 곡식단들이 자신의 곡식단을 향하여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자기 별에게 절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그는 밤마다 꾸는 그런 꿈들을 통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어떤 비전을 갖습니다. 환상을 지닙니다. 가슴 속에 그 꿈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 인생이 얼마나 신선하고 즐겁고 행복했겠습니까? 요셉의 청소년 시절은 이렇게 꿈과 함께 살아가는 즐거운 시절이었습니다.
가슴 속에 이렇게 큰 꿈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일에 좌우되지도 않습니다. 대범해지고 너그러워지고 큰 틀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은 큰 줄기를 보며 잔 가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또 옹졸해지지 않고 편협되지 않고 삶에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커지고 대범해지고 미래의 꿈을 이루려고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팔려 노예의 신세로 전락했을 때도 속단하지 한고 그 환경을 잘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장래에 대한 기대나 꿈이나 입지가 없었더라면 그는 모진 시련 앞에서 견디어 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시련 앞에서 이겨내지를 못하고 자포 자기하거나 심지어는 자살해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것도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자꾸만 생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도 알고 보면 이같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2. 환경을 잘 견디어 내야 합니다.
요셉은 그런 환경에서 잘 견디어 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그가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의 현실을 통해서 무엇인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꿈의 성취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좋은 뜻과 목적을 세워 놓고 살아가면 몇 가지 주어지는 정신적인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념"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그렇게 유익을 주는 정신적인 축복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우선 스스로에게 강한 암시를 줍니다. 암시에는 두 가지의 암시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암시"이고 또 하나는 "타인 암시"입니다. 타인 암시는 남들로부터 받는 격려를 말합니다. 사람들로부터 격려를 받고 칭찬을 받으면 상당한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타인으로부터 가능성에 대한 암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격려가 필요합니다. 스승으로부터 받는 격려 한마디가 당사자에게는 그렇게 소중합니다. 부모로부터 받는 칭찬이나 가능성에 대한 기대 한마디가 그렇게 소중한 역할을 합니다. 주위로부터 받는 격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스승으로부터 받는 무능하다는 질책 한마디가 굉장히 큰 충격을 준다는 말입니다. 부모의 무심한 핀잔 한마디가 자라나는 자식들에게는 그렇게 큰 충격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타인 암시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암시는 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가 자신에게 주는 자심감에 대한 암시입니다. 남들이 아무리 격려를 해준다고 해도 스스로가 자신감을 상실하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과 좋은 여건이 주어져도 스스로가 용기를 상실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사 자기 스스로가 자신에게 주는 자신감에 대한 암히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공부방에 나폴레옹이 백마를 타고 눈덮인 알프스산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림을 걸어 준다고 합니다. 그 사진을 보고서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나폴레옹이 백마를 타고 알프스산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진은 얼마나 기고만장한 모습이겠습니까? 미래에 대한 꿈은 이렇게 야무지고 기대에 부풀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청년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씩 모여서 파이팅을 외치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냥 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파이팅을 외치면서 선수들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팀워크를 다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스스로에게 암시를 주는 행동들입니다. 자기 암시는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도 파이팅을 한번 해봅시다. 파이팅, 우리는 주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할렐루야!
요셉이 형들로부터 팔려서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환경으로 전락해 버렸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거기서 오는 충격과 실망감으로 큰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곤경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꿈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셨던 그 기대입니다. 그에게는 그런 기대와 꿈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환경을, 그런 꿈을 이루어 나가는 일에 하나의 과정으로 해석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혀 흔들림없이 그 환경을 이겨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 신념이라는 것이 참 중요한 정신적인 축복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용기도 주어집니다. 미래에 대한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용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뜻과 꿈이 하나의 배경이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경이 든든한 사람은 언제자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경찰서장의 아들은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버지가 경찰서장이라는 배경 때문에 언제나 자신감에 차서 살아갑니다.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부잣집 자녀들도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에게도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미국인들이 세계를 누비며 여행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자신 만만합니까? 그들에게는 국력이라는 것이 배경이 되어 주니까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세계를 여행하면서 어깨를 펴고 다니는 것도 신장된 국력 때문입니다.
다윗이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그 큰 골리앗 앞에 나선 것도 알고 보면 배경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골리앗보다 더 큰 힘을 가진 하나님이라는 배경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힘을 믿고 감히 상대도 되지 않는 골리앗 앞에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대했던 것과 같이 골리앗을 보기 좋게 물리치고 승리합니다. 그것은 순전히 마음으로 믿는 든든한 배경 덕분입니다.
이렇게 분명하고 큰 꿈과 뜻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런 힘이 있습니다.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하찮은 일에 매달이거나 좌우되거나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작은 일에 너무 집착하거나 매달리지 않습니다. 되도록 큰 뜻을 위해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얼마나 용기가 있는 삶을 살겠습니까?
그래서 요셉은 옥중에 갇혀 있었지만 그렇게 안달하고 낙심하고 좌절한 기색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고뇌야 없을 수 없었겠지만 그러기에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배경이나 장래에 대한 기대가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무난히 극복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장차 어떤 길로 연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오늘만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요셉은 누구보다도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꿈이 있는 사람에게는 "인내"의 힘도 줍니다. 큰 뜻을 가진 사람은 우선 기다릴 줄 압니다. 기다림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꿈이 이루어지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꿈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요셉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순탄하게 이루어질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요셉이 본 그 꿈과 환상이 너무나 원대하고 그 틀이 컸습니다. 그러니까 옥중에 앉아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한 목표가 있고 뜻이 있는 사람은 조급하지 않고 때를 기다립니다. 큰 목적이나 뜻은 때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태백이라는 사람이 노년에 가서 의기 소침해서 시골로 돌아다니면서 소일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산중 오두막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었는데 주인 노인이 일찍 일어나서 숫돌에 무엇인가 열심히 갈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보니까 큰 쇠절구를 숫돌에 열심히 갈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무엇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갈고 있습니까?" 그랬더니 노인이 대답합니다. "예, 바늘을 만들기 위해서 갈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 큰 쇠절구를 가지고 바늘을 만들기 위해서 다 늙은 노인이 매일같이 열심히 갈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어느 세월에 그 큰 절구가 갈아져서 바늘이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노인은 열심히 갈고 있습니다.
그 모습에 이태백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붓을 잡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렇게 유명한 문필가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뜻이나 목적은 어느 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쉽게 어떻게 하다 보니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기다림과 숙성기와 수고가 뒤따라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기다림의 훈련이 안 되어서 도중에 포기하고 좀 기다려 보다가 곧 집어치워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은 무엇보다도 이 기다림의 훈련이 부족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20대에는 패가가 있고 30대에는 오기가 있고 40대에는 포기가 있다고들 말합니다. 사람이 20대에는 패기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하면 될 것 같은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해보니까 일이 생각되로 잘 안 됩니다. 그래도 한번 더 해봅니다. 그것이 오기입니다. 기다리며 한번 더 해보는 것이 아니고 오기로 한번 더 해보는 것입니다. 해보았더니 또 안 됩니다. 그래서 곧바로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일을 시작했다가 며칠 안 되어서 포기해 보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요셉은 옥중에 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그도 인간이라 그 기다림에 몇 번이나 지치고 하기지고 낙심되고 풀리지 않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전무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포기할 수 없고 단념할 수 없는 기대가 있었고, 목표가 있었고,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환상이라는 것이 그의 마음속에 항상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니 분명하게 보았던 환상과 꿈들을 어떻게 한시에 버릴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요셉은 인내하면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그 뜻이 이루어집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같은 기다림은 꿈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요셉은 기다림으로 그 수중한 뜻을 이루는 축복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숱한 어려움들을 바라보면서 보고 느끼는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을 보고 느끼고 해석하는 그 기준이 다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과 해석은 엄청난 차이를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현재적인 생각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요셉은 남의 나라에 팔려가서 노예로 살아가는 동안 숱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환경은 자신이 생가하고 품고 있던 장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와는 거리가 너무나 먼 그런 환경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꿈을 꾸고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들과는 그 거리가 너무나 멀고 다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여기에는 분명 어떤 섭리와 경륜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들을 통해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구나 하는 깊은 신앙적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는 여기에 무슨 알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는 어떤 느낌을 강하게 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안목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굉장한 지혜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분통이 터져서 그 스스로가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흥분 상태에 빠져 버렸을 것입니다. 아니면 스스로 자포 자기해서 목을 매어 죽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원망과 탄식으로 그는 이미 망가진 인생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상황을 보는 시야와 생각이 달랐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임을 강하게 믿습니다. 그래서 후에 형들을 만났을 때에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안심시키기를 "하나님께서 형님들을 통해서 나를 먼저 이곳으로 보내셨다"고 위로했습니다. 얼마나 환경을 보는 시야가 있고, 깊이가 있고 그 차원이 다릅니까?
3. 우리의 생각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오늘 현재만을 바라보는 결점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오늘만을 보는 생활이 아닙니다. 물론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지만 우리늬 눈과 생각과 마음은 언제나 미래 지향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나 뜻은 오늘도 나타나지만 더많은 부분은 미래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지극히 미래 지향적인 생활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인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큰 뜻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큰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뜻을 품고 살아가면 원수조차도 용서할 수 있는 넓은 가슴을 가지게 되고 사사로운 일에 원망이나 불평이나 원한을 갖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을 이기고 내일을 바라다보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평강교회가 있게 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의 축복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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