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록가기 |
청년? 미래입니다.
청년은? 미래입니다.-이재철 목사
청년들을 부르는 호칭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미래의 주역•이라고도 하고, '나라
의 기둥*이라고도 하며, '사회의 초년생’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청년들을 가리켜
서 '현존하는 미래'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미래'라는 뜻입니다. 청년들은
중년이나 장년 톡은 노년,그 어떤 세대에 비해서도 더 많은 미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
년 한 개인의 미래는 그 개인만의 미래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청년의 오늘은 오늘 하루에 멈추어 버리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의 오늘은 그의 내일과
직결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내일과 연결되는 까닭에 저는 청년들을 |현존하는 미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약에 '현존하는 미래’라는 이 정의에 동의한다면, 여기서 현존하는 미래란
도대체 '누구으|' 록은 '무엇의' 헌존하는 미래란 말일까요? 무엇보다 먼저, 청년은 자기 자신의
현존하는 미래입니다. 미래는 절대로 바깥 세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란 바로 오늘의 삶의 결과로 성쥐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청년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
신에게 주어진 이 청년의 때에 대하여 책임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말에 '싹수가 노랗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저 사람의 오늘을 보니 내일도 노랄다는, 즉 가망이 없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미래는 청년의 날들, 즉 오늘 자기 자신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저는 1967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19기년에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는 45년,대학교를 졸업한 지도 4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저와 함께 학창생활을 했던 그 가까
웠던 친구들 중에,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
는 한 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띳띳하게 내세울 수 없는 형편에 저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청년의 때를 잘못 가꾸었기에 그들의 미래 역시 잘못 귀결된 것
입니다.
20대와 30대를 지나, 40대 혹은 50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사랑하는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맷
떳하게 내세울 수 없다면, 그 인생보다 더 서글픈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청년의 오늘은, 자
기 자신의 현존하는 미래이기에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과 죄선을 다해야 합니다.
두번째, 청년은 그 가족들의 현존하는 미래입니다.
오늘 그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그 가족들의 미래가 판가름난다는 뜻입니다. 대통령이라는
한 국가의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수치스럽게도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되던
날, 집을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고 합니다. "연세 많으신 어머님께는,내가 구속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지 말아라.” 왜 그분은 자신의 구속을, 노모에게 말씀드리지 못하게 했겠
습니까? 왜 그 사실을 숨기려 했겠습니까? 자신의 노모에게, 그보다 더 큰 수치가 없었기 때문
입니다. 어디 노모뿐이겠습니까? 그 사건으로 인해, 모든 가족들이 당한 수지와 모멸감이 어떠
했을 것인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분이 무분별하게 돈을 긁어모을 때, 그 가족들의 미래는 ■말할 수 없는 수지로 얼룩져 가고 있
었던 것입니다. 저는 신문에서 부정부패 사건과 여러 가지 부도덕한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잡혀
가는 기사를 블 때마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통해서 그분들이 구속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남다른
가슴않이를 합니다.
'저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응당 보응을 받는 것이겠지만, 저 사람의 가족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큰 고통을 당해야 할까? 그 아내가,그 남편이, 그 부모가, 그리고 그 자식이 당해야 할 수지가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청년이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 가족의 미래의 질
이 결정됩니다. 이것을 아는 청년들이라면 청년 시절을 결코 의미 없이 소진해 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번째, 청년들은 민족과 인류의 현존하는 미래입니다.
히틀러라는 한 사람이 자신의 청년 시절을 잘못 가꾸고 있을 때, 인류의 미래는 이미 황폐화되
고 있었습니다. 2차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간 것은 오직, 그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
다. 반면에 아데나워라는 한 청년이,자신의 청년 시절을 책임 있게 가꿈으로써, 황폐화된 독일
의 미래가 부흥되는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바울이란 한 유대 청년이, 자신의 청년 시절을 진리 안에서 책임 있게 가꾸었을 때, 단지 그 개
인의 미래만 새로워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통해 인류의 미래가 새롭게 가꾸어졌습니다. 태
어나서 길면 80년이요 짧으면 고작 60년이나 70년을 살다, 세상을 떠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자
신이 두 발 딛고 사는 곳을 오영시키거나 혹은 사회의 한 부분을 허물어뜨리거나, 인류에게 해
만 끼지다가 두 손 들고 이 세상을 떠난다면,도대체 그보다 더 무가치한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
니까? 설령 관 속에 누워 통탄한다 한들 그 누구도 지나가 버린 청년 시절을 보상해 주지는 않
습니다.
청년들은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해 인류의 미래가 결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황금같이 귀한 이 청년 시절을 책임과 최선을 다하여 가꾸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
에게 주어진 청년 시절을 책임과 최선을 다해 가꾼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첫째, 지금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학생이라면 공
부하는 것이 주어진 일일 것이요, 직장인이라면 직장에서 맡은 일이 주어진 일일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이든 지금 주어진 일에 '죄선을 다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극대화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주먹에 전혀 힘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태권도를 배우고 기왓장을 격파하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훈
련하던 어느 날, 그는 기왓장 한 장을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에는 두 장을, 몇
달 후에는 다섯 장을, 몇 년 후에는 스무 장까지 격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_죄선을 다
한다'는 것은, 기왓장 한 장도 깨뜨릴 수 없었던 무력한 자기 자신을 극대화해
습니다.
그에게
I 가는
것을 의미했
저는 그 동안 한평생 큰 일을 이룬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
는데,언제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최선을 다하지 않
는 자가 어찌 내일 최선을 꿈꿀 수 있겠습니까? 매사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의 하는 일이 어
찌 알찬 열매로 결실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중성된 자는 큰 것에도 중성되고,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
의하니라.-성경 누가복음 16장 10절-
여기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중성이란 곧 죄선을 의미함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 청년 시절을 책임과 최선을 다해 가꾼다는 것은, 분명한 목적과 목표를 갖는다는 의미입
니다. 10대라면 아직 분명한 목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20대라면 분명한 삶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목적이란 인간이 궁극적으로 다다라야 할 종착점을, 목표란
그 종착점에 다다르기 위한 방편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목적은 하나일 수밖에 없으나,목표는
여릿일 수 있습니다. 목적지 없이 걸어가는 방랑자가 어떻게, 발걸음 하나하나에 죄선을 다하겠
습니까?
목적지를 분명히 한 사람만이, 그 발걸음에 모든 것을 다 걸 수 있습니다. 내게 지금 주어진 일
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면,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는 것은 나의
시간들을 극대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적지 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자오卜 분명한 목적지를
두고 뚜렷한 발걸음으로 죄선을 다해 또박또박 걸어가는 자의 시간의 의미가,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목적과 목표가 분명해야 그 시간이 극대화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청년이 강둑에 앉아서 밤을 새우며 강을 져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돌멩이를 집어 재미삼아 강물에 던졌습니다. 하나를 던지
고,둘을 던지고, 셋을 던지고, 그렇게 밤새도록 던졌습니다. 드디어 날이 밝았습니다. 그는 남아
있던 마지막 돌멩이를 던지려고 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원!일입니까? 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돌멩이가 아니라 황금덩어리였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그 귀중한 황금을 아니 활금 같은 시
간을 전부 강 속에 던저 버린 것입니다. 목적 없는 자의 삶은 이와 같습니다. 오직 목적이 분명
할 때,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조차도 황금 같은 가치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셋째,청년 시절을 책임과 최선을 다해 가꾼다는 것은,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조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음과 양, 방과 낮, 그리고 하늘과 땅의 조화입니
다. 만약 이 조화가 깨어지면 큰 혼란이 야기됩니다. 그러므로 조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
도,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바로 이런 조화의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때의 조화는 두 가지 의미에서의 조화입니다. 하나는 내적 조화로 자기
자신과의 조화를 말합니다. 인간은 육체만을 지닌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름으로 사람만 지으신 것이 아니라,
짐승도 지으셨습니다. 차이가 하나 있다면, 흙으로 된 인간의 육체 속에는 하나님의 생기, 즉 하
나님의 영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만 가진 존재도 아니요, 그렇다고 영만
가진 존재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따라 영과 육율 동시에 지닌 전인적 존재입
니다.
그러므로 영육간의 조화를 이루지 못한 재 영론만움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주어진 삶에 책
임을 다하지 않는 무분별한 신비주의자나 열광주의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의미를 망각하고 육체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그의 검모습이 어떠하든 실은 본능적인
쾌락주의자에 지나지 않율 것입니다. 그런 자는 인간이 왜 육체를 지니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짐승일 터이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율 천상의 천사로 지으신 것도 아니고,땅 위의 짐승으로 지으신 것도 아닙니
다. 영과 육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과 육은 반드시
조화를 이를 수 있어야 합니다. 김남조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진리의 등불 앞에서 '나들
(나'의 복수)이 서로 만나야 합니다.
다시 알해 나의 영과 육이,나의 검사람과 속사람이, 진리 안에서 서로 대화하며 조화를 이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른 영론이 바른 육제를 가능케 하고, 건강한 육제가 건강한 영론움 담는 그롯
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조화는 외적 조화입니다. 외적 조화란 두말 할 것도 없이 나 아닌 타
인과의 조화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결코 론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의 조화에 실패하는 자는 그 인생 자체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학교
2학년 초 세계문화사 시간이었습니다. 그 날은 첫 시간이었는데도 줄석한 학생은 절반 정도밖
에 되지 않았습니다. 교수님이 강단 탁자 위에 제줄된 수강카드로 줄석을 불렀습니다. 수강카드
에 비해 줄석생의 수는 턱없이 모자랐옴에도,거의 모든 학생들의 대답이 다 나왔습니다. 모두
대리 대답이었던 것입니다. 교수님이 그 사실율 모릴 리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W 대답이 없는 학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줄석을 다 부른 뒤 그 학생의 수
강카드를 둘고, 앞으로 그 학생의 수강율 사절하겠노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식만을 얻기 원한다면, 집에서 백과사전을 파는 것이 혈씬 더 빠를 것입니다. 여러분이 4년
간의 학창생활을 하는 데 있어,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과의 사귐입니다. 지신을 위해,대
리대답을 해 즐 수 있는 친구 한 명도 사귀지 못한 사람이라면, 나의 강의를 둘율 자격이 없습니
다." 그 날 그분의 말은 나로 하여금 참으로 귀중한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블필요한 오해는 마시기 바라겠습니다. 그분은 불의한 대리대답의 정당성율 역지 주장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분은 청년 시절의 '사랑과의 조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
니까? 사람과 조화를 이를 줄 모르는 자의 삶 속에 어찌 참된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의 그 학생이 그 다용주부터 누구보다도 그 교수님의 강의에 중실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
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누구를 사귀느냐,얼마나 많은 사람과 바르게 사귀느냐, 나와 다른 사람율 얼마나 사
귀느냐에 따라서 나와 그의 미래가 동시에 달라집니다. 많은 사랑과 사귀어 조화를 이룰 수 있
으려면 자신을 죽이는 법을 배워야 하고,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 하며,사람을
존중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그와 같은 과정율 통해서 외적 조화가 이루어지고, 그저럼 조화
를 이룰 수 있는 사랑의 삶 속에 늘 새로운 미래가 담기는 법입니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갑이, 청년의 때률 책임과 죄선율 다해서 가꾼다는 것은, 첫째로,지금 주어
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요, 둘째로 분명한 목적과 목표를 갖는 것이요, 셋째로 내적 외적 조
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
다 더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묻러스 알파률 깨닫고,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 속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이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것은 대단히 중요
잡니다.
봄에
그러나 반드시, 사랑이 계획한 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농부가 봄에 아무리 씨를 뿌려도, 아무리 땀을 를려도, 와야 할 비가 오지 않거나 비가 너무 많
이 오면 그 해의 농사는 망지는 법입니다. 학생이 아무리 열심히 시험공부률 했다고 하더라도,
입학시험을 치는 전날 범, 갑자기 감기가 들어 한숨도 자지 못하고 고열에 시달린다면, 그 시험
은 망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도|,그 결과■ 책임
저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율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 속에서만 결실이 맺힌다는 것을 아는 삶으로, 청년 시절을 보내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미래를 가장 아름답게 가꾸는 첩경입니다.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률 인정하며 그것
을 겸허하게 구하는 자들은, 지금 성공했다고 해서 교만에 빠지지도, 반대로 실패했다고해서 절
망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그와 같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플러스 일파가
더 크게 임하며, 그둘율 통해 인류의 미래가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에 있던 늙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가 임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줄애굽의
지도자가 되었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의 미래가 새로워졌습니다. 아이률 갖지 못하여 하나님 아
버지 앞에 울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한나에게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가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
녀가 낱은 사무엘을 통해 가나안 땅의 미래가 새로워졌습니다. 빈민존이었던 나사렛에 살던 한
여인에게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가 임했습니다. 그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셨고, 온 인
류의 미래가 새로워졌습니다.
작곡가에게 가장 큰 명광은, 자신이 작곡한 곡율, 좀더 많은 사람둘이 좀더 오랫동안 연주하고
즐기며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나라의 국가를 작곡한다는 것은, 예사 영광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나라 애국가클 작곡한 안익태 씨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애국가는 내가 작곡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율입니다. 나는 그분의 도구였율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
의 플러스 알파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율 제외한 모든 상율 석권했던 유일한 영화는 '벤허'입니다. 오
늘날 스필버그 감독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헐리우드에서 아무리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대
작을 만듈어도, 다시는 '벤허'같은 영화는 만들 수 없으리라는 것이,여러 사람들의 공동된 의견
입니다. 이 영화콜 감독한 원리엄 와일러는 시사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 영화륨
정말 제가 만들었습니까?" 그는 자신이 만든 영화 속에서 하나님의 꼴러스 알파콜 보았던 것입
니다.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률 믿는 자에게, 그리고 겸허하게 그 플러스 알파를 구하는 자에게
는, 이저럼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일둘이 일어났습니다.
그문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성경 시편 23편 6정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
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성경 시편 23편 6절 하반절 말씀 왜 하필이면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고 했겠습니까? 그 답은 6절 상반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 이 반드시 나콜 따르리 니 - 성경 시편 23편 6정 상반정 얻씀 이것을 오늘 살
펴본 멕락으로 표현하면, '나의 평생에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가 영원토독 함께하실 것율 믿으므
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윗은 베둘레헴의 목동이었습니다. 혈통으로나 상황으로 불 때 결단코 그는, 이스라엘의 두번
째 왕이 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꼴러스 알
파였습니다. 그가 어린 나이에 거인 골리앗을 이긴다는 것은, 그 자신의 능력으로 놀 때 퓰가능
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블구하고 그를 쓰러뜨린 것 역시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였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입살롱의 쿠데타로 왕궁과 권력을 일거에 입게 되었습니다. 쿠데타로 인해
한 번 권좌에서 울러났다가, 다시 권좌를 찾는다는 것은 블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시 왕좌를 되찾은 것 또한、하나님의 끌러스 알파였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믿었기에, 그
분의 플러스 알파로 인해 자신이 그처럼 존귀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평생토록
하나님의 집에 거하겠노라 고백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다윗이 자신의 젊은 남들을 하나님을 향한 믿옴 속에서,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 속에서 스스로 책임 있게 최선율 다해서 가꾸었율 때,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미래가 새로워졌고,그 한 사랑의 신앙고백인 시편 23편을 통해 수없이 많은 사랑들의 미래가
계속 새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오늘 그대 청년의 때에, 곤고한 날이 아직 이르기 전에, 하나님의 꼴러스
알파■ 겸허하게 구하며,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의 은종속에 거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오직 주님
안에서 최선율 다하며, 주님율 목적으로 삼으며,주님 안에서 조회를 이루어 가는 사람둘이 되
십시다.
그렇게 할 때, 그 한 사람의 청년으로 인해, 이 민족과 인류의 미래가 기필코 새로워질 것입니
다. 왠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대 청년들은, 현존하는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 줄
처: 이재철 목사님의 저서 '청년아, 울더라도 뿌러야 한다' 中에서 올려보았습니다.
[이재첩 목사 - 청년둘에게,하나님의 플러스 알파 +a 중에세-®
____________ 예수가종다오
글을 보시고 스크랩 하시기 전에 그냥 가지 마시고 앳글로 따芸한 소갑으로 갑사퓰 표하는 그리스도인미 됩시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뒤집기(復活)-이재철 목사 (0) | 2021.12.29 |
---|---|
심장 터지는 가르침-이재철 목사 | (0) | 2021.12.29 |
어서! 멈추세요*이재철 목사 (0) | 2021.12.29 |
부정적 사랑의 순서는?-이재철 목사 (0) | 2021.12.29 |
베드로의 자부심, 자긍심 (0) | 2021.12.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