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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멈추세요*이재철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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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좋다오

 

어서! 멈추세요.
-이재철 독사-
우리 속담에 '그림의 떡’이란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의 실체가 손에 달을 정도로 가까이 있긴
하지만, 결코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가령 진열대에 때알 좋은
떡들이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는 광경을 연상해 보십시다.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언제든 그
떡을 사 먹을 수 있는 사람에게 그 떡은 실재의 떡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허기가 졌음에도 돈이 없어 떡을 사 먹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그 떡은 불행히도
그림의 떡이 됩니다. 그때 그림의 떡이란, 떡을 그린 그림처럼 감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히 덕의 실체가 눈앞에 있음에도, 그 떡을 그림의 떡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비참
함을 스스로 확인하는 고통과 괴로움일 뿐입니다. 그 경우 당사자의 허기가 심하면 심할수록 그
의 고통과 괴로움은 가중되는 법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실재하는 떡을 그림의 떡으로 간주해야
하는 그는 불쌍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처럼 불쌍한 사람들이 성경에는 수도 없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
께서는 우주적 종말의 날이 될 당신의 재림과 관련하여, 그날은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음을 밝히시며,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던 노아 시대의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
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통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통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 성경 마태복음 24장 37~39절 말씀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만든 방주는, 길이 137.4미터에, 폭과 높이는 각각 22.9미터와
13.7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였습니다. 노아가 세 아들과 함께, 그 큰 방주를 짓는 데 얼마나
오랜 세월이 소요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긴긴 세월 동안,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좆
아 오직 먹고 마시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들 눈에는 멀평한 대낮에 그 거대한 방주를 짓는
노아가 정신 나간 사람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통수로 말미암아 방주에 들어간 노아
식구 여덟 명을 제외하곤, 패역한 인간들은 모두 멸망당한 것입니다. 그때 인간들이 통수에 휩
쏠려 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롤히 여겼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얼마나 후회했겠습니까? 그중
에서도 노아와 한동네 살던 사람들의 후회가 가장 컸을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노
아의 방주를 눈으로 보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서운 통수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방주는 여
전히 그들 앞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통수를 피해 방주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방주는 그림의 떡이었기 때문입니다.
들어가기만 하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방주의 실체를 눈앞에 두고도 그 방주를 그림의 덕으로
여겨야만 했던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인간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도 이처럼 불쌍한 인간을 또다시 만나게 됩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을라갈새. - 성경 사도행전 3장 1절 말씀 제 구 시란 오늘날의 시간으로 오후 3시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아침 9시, 낮12시, 오후 3시, 이렇게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기도하였습
니다.
유대인들은 새날의 기준을 해가 뜨는 시각이 아니라 해가 지는 시각에 두었으므로, 오후 3시라
면 해가 지기 전 그날의 마지막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인의 마지막 기도
시간에 맞추어 성전을 찾았다는 것은, 계속 이어지는 사도행전의 내용을 보건대, 그곳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
는 자라"- 성경 사도행전 3장 2절 말씀
그날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의 문들 가운데, 니카노르 문을 이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문을 가리켜 '미문’이라 불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문들 가운데 그 문이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생전에 그 문을 직접 목격한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높이가 23미터에
달하는 미문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금과 은을 입힌 황동으로 만들어진 이중문이어서, 웅장하고
장엄하기 그지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아름다운 미문 앞에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걸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가 그곳을
구걸 장소로 택한 것은, 미문은 성전 밖 '이방인의 뜰'에서 성전안 첫 장소인 •여인의 뜰'로 통하
는 줄입구이기에 평소 통행인이 가장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4장 22절]은 그
의 나이가 40여 세였음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앉은뱅이인 그가 매일 그곳에 나와 있을 수 있었
던 것은, 날이면 날마다 그를 메어다가 그곳에 두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앉은
뱅이를 앵벌이의 도구로 삼아, 자기 이득을 취하는 불량배들이었는지, 아니면 앉은뱅이의 가족
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그 앉은뱅이를 성전 안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한 것이 아니
라, 단지 미문 앞에서 구걸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에게 성전은, 삶의 시발점인 동시에 목
적지일 정도로, 유대인과 성전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앉은뱅이는 생명과도 같은 성전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미문 앞에 내
려놓고 구걸하게만 할 뿐, 누구도 그를 성전 안으로 데려다 주려 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력으로는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선천성 앉은뱅이인 그는, 태어난 이래 근 40년
동안 성전 미문 앞 이상을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성전은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았던 것
입니다. 날이면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성전과 미문을 그림의 떡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그가 겪었을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번민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더우기 그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 가장 아름다운 미문 앞임으로 인해, 그의 비참함과 불쌍함은
더욱 두드러져 보이기만 합니다. 그런데 다음 말씀은 그 불쌍한 앉은뱅이의 인생에 대반전이 일
어났음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 성경 사도행전 3장 8절 말씀

무려 40여 년간 단 한 번 일어서 본 적도 없던 그가 일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찬미
하며 성전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그가, 성전 안으로 뛰어 들어가기 위
해서는 반드시 미문을 먼저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앉은뱅이인 그에게 그림의 떡이기만 했던 미
문과 성전이 명실공히 미문이 되고, 명실상부한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 순간 그가 누렸을 감격
이 얼마나 컸을는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체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그에게,이처럼
극적인 대반전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
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 성경 사도행전 3장 6~7절 말씀
미문과 성전이 그림의 떡이었을 뿐인 그가, 자기 발로 미문을 통과하여 성전 안으로 뛰어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치유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도구 삼아, 당신의 생명과 능력으로 그를 친히
일으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가 미문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단순히
그가 미문과 성전이란 건죽물을 통과하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 인생길에 아름다운 미문이 새롭게 열리고,그의 인생 자체가 거룩한 성전으로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성전 미문 앞에서 벌어진 이 놀라운 사건 속에서, 이 시간 우리가 유의하고자 하는 것은, 베드로
가 대체 어느 순간에 앉은뱅이 걸인을 일으키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주님께서 어느 순간에 베드로를 통해 친히 역사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베드
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 성경 사도행전 3장 3절 말씀
미문 앞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 걸인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자 그들에게 적선을 요청하였습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을 알아서거나, 자기 앞에 나타난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이었기 때문에 구걸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앞을 지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습니
다. 그는 근 40년 동안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만 하면 단지 기계적으로 구걸하던 사람이었습니
다. 따라서 지난 세월 동안 그의 앞을 지나갔을 사람들 중에 절대다수는 그의 구걸을 외면하였
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해 매일 성전을 찾을 때마다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
은 앉은뱅이가 똑같이 구걸하였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지나쳤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합
니다. 그러나 그날 베드로와 요한은 달랐습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
리를 보라 하니" - 성경 사도행전 3장 4절 말씀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 걸인의 무의미한, 단지 습관적일 뿐인 구걸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
니다. 그들은 앉은뱅이 걸인을 보고, 그 앞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그에게 손을 내밂으로 그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멈중! 바로 이것이 해
답입니다. 그들이 앉은뱅이 앞에서 멈추지 않았던들, 주님께서 그들을 도구 삼아, 성전 미문 앞
에 앉아서도, 성전과 미문을 그림의 떡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던, 한 불쌍한 인간을 일으켜 세우
시는 생명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는 멈중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오늘 말씀이 던져 주는 교훈입니다. 사랑은 멈중
입니다. 어린아이가 울 때,엄마가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어린아이를 향하는 것은 아이를 사랑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다급하게 우는 데도 곁에 있는 여인이 하던 일을 도무지 멈추려
하지 않는다면, 그 여자는 그 아이의 엄마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사랑하면, 그 사랑은 반드시 멈
중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십니
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성경 [마태복음 1장 23절]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켜 |임마누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성경 마태복음 1장 23절 말씀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2천 년 전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
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이 땅에 강림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즉 인간을 사랑하시
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를 멈추시고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시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제
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자기 멈중'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던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멈중이 없었던들, 우리는 성전 미문 앞의 앉은뱅이 거지처럼, 영원을 사모하면서도, 영원과
는 전혀 무관한 불쌍한 영적 거지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 역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기 멈중입니다. 하나님의 말
씀을 묵상하는 것,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기 멈중입니다. 기도하는 것,자기 멈중입니다. 그리
스도인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도 자기 멈중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질주하던 인간의 자기
멈중 없이는 하나님 사랑도, 사람 사랑도 불가능합니다. 자기 멈중 없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생각과 판단 그리고
계산을 멈줄 때에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채움 받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
을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를 멈추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본래 세상적으로는 무식하고 보잘것없는 갈릴리의 어부였고, 영적으로는 하나
님의 심판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심판주 하나님께서 심판주이시기를
멈추시고, 도리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제물이 되심으로 그들이 구원을 얻었고, 그림의 떡이었
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들이 비록 세상적으로는 무식했
을망정,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기 멈중으로, 그들 자신에게 영원한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주신 것은,
그것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누리게 하심이 아니라,그들을 누군가의 앞에서 멈추게 하심으로, 그
누군가를 살리시는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함임을 바르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
무 의미도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구걸하는 앉은뱅이 걸인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멈추었
고, 그들의 멈중을 통로로 삼아 주님께서 친히 앉은뱅이 걸인을 일으켜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신화나 전설이 아닙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성전 미문 앞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역
사적 사실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기 우I해, 주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계산을 멈추면, 똑같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2천 년 전
성전 미문 앞에서 역사하셨던 주님께서는 오늘도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과 관련된 이
야기를 드리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8년 전 우리 교회에 소속되어 있던 제 장인어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나라로 가셨습
니다. 장인어른은 2005년 7월 10일 교회 창립 때부터 교인으로 등록되어 있었지만, 중환이시라
교회에 줄석하실 수 없었던 탓에, 대부분의 교우님들은 제 장인어른을 모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우님들께 번거로움을 드리지 않기 우I해, 고인이 제 장인임을 밝히지 말 것을 교회 사무실에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뜻과는 달리 고인과 저의 관계가 밝혀져 장례 기간 중 많은 교우님들이 조문을 오시
어 위로해 주시고, 또 봉사해 주셨습니다. 이에 교우님들께 미안한 마음과 아울러 깊이 감사드
립니다. 2■년 3월 13일 월요일 밤 9A| 45분경, 인사동에서 용인 순교자기념관 운영 위원들과
회의를 하던 도중에, 장인어른이 소천하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귀가하여 검은 예복으로 갈
아입고, 병원 영안실로 가는 내내 제 마음은 장인어른과 주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뿐이었습니다.
이롱날 입관 예식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믿던 장인어른의 영론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속에 안겨 있음을 알고 또 믿음에도, 입관
예식이 끝나기까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또한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장인
어른의 자기 멈중으로 인해 제가 살았기 때문입니다. 1983년 11월이었습니다. 아내와 제가 결
론하기로 하였을 때 가장 실망한 분이 장인어른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소문난 탕아였으니, 외동
딸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던 장인어른의 중격은 대단했습니다.
특히 아내를 아끼던 주위 사람들, 심지어는 아내의 대학 은사님들까지 결론을 말리라고 장인어
른께 중고하였으니, 그분의 상심은 더욱 컸습니다. 11월 하순에 접어들어 드디어 저를 부른 장
인어른은, 아침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당신 속에 있는 모든 말들을 다 털어놓으셨고, 저는 여
덟 시간 동안 무릎을 끓고 장인어른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질문에 답변을 드렸습니다.

 

마침내 여덟 시간 만에 장인어른이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내가 오늘 자네를 부른 것은
내 딸과의 결론을 거절하기 위함이었지만, 내 딸이 믿는 예수를 자네도 믿으니 나도 자네를 믿
고 이 결론을 허락하네. 부디 내 딸과 행복하게 살게." 그 순간은, 장인어른이 사랑하는 외동딸
의 결론에 대해 지니고 있던 모든 기대와 판단 그리고 계산을 멈추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장인어른의 그 자기 멈줌을 시발점으로 삼아 주님께서는 제 아내를 통해 선데이 크리스
천이었던 저를 살리셨습니다. 그날 여덟 시간 동안 장인어른 앞에 무릎 끓고 앉아 있던 저는 영
락없이 성전 미문 앞에서 적선을 요청하는 앉은뱅이 걸인과도 같았습니다. 만약 그날, 당신의
딸이 믿는 예수로 인한 장인어른의 자기 멈중이 없었던들, 저는 여전히 영적 앉은뱅이, 영적 걸
인으로 방황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인어른의 자기 멈중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 인생길에 새로운 미문이 열렸
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저 자신이 성전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바꾸어 말해, 장인어른의
자기 멈중 덕분에,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았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제 속에 임하게 된 것입
니다. 그래서 장인어른의 장례식을 맞아, 장인어른과 장인어른을 도구로 쓰신 주님께 드리는 감
사의 눈물을 틀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를 멈추시고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
난을 기리고,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한 우리의 그릇된 삶을 참회하는 기간을 사순
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순절의 참된 의의는, 우리 모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 멈중을
실행하는 데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말씀으로, 기도로, 멈추어 서십시다.
좆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사랑해야 할 사람 앞에서, 우리의 이기적인 판단과 계산을 멈
추고,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채움 받으십시다. 그때 우리는, 성전 미문 앞에 쭈그리고 앉은
이 시대의 뭇 앉은뱅이를 살리는 우리 시대의 베드로가 될 것입니다. 2천 년 전 성전 미문 앞 거
기에 계시던 주님께서, 오늘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줄처: 이재철 목사님의 저서
'사도행전 속으로2' 중에서-®
예수가종다오
글을 보시고 스크업 하시기 전에 그냥 가지 마시고 엇글로 따뜻한 소감으로 감사플 표하는 그리스도인미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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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一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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