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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터지는 가르침-이재철 목사 |

by 【고동엽】 2021.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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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좋다오

심장 터지는 가르치심-이재철 목사
요즘 세상에는 [의리]라는 단어가 유행입니다. 중 길게 늘려서 '으리 으의리' 하면서 의리를 강조
합니다. 교회의 역사와 주님을 좆는 사도들의 행함의 역사를 밝혀 주는 성경 사도행전의 첫머리
는 그 막이 이렇게 오르고 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에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
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사도행전 1장 1〜2
절 말씀
누가복음의 말씀을 쓴 누가가 주님께 대해 두 번째 사용한 동사는 _가르치셨다' 는 것입니다.
어린 자식은 부모와 함께 살면서도 부모의 언행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수준 차이 때문입 니다.
주님과 우리의 차이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입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단지 행해야 할 것
을 행하기만 하셨다면, 우리는 그분의 행하심을 눈으로 보고도 무엇 하나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행하심만으로 그지지 않고,당신의 행하심과 관련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모
든 것을 몸소 자상하게 가르쳐주셨을 뿐 아니라, 바울과 같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도 가르쳐 주
셨습니다. 인간을 가르지는 것은 주님의 주요 사역 중 하나였고,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을 본받
아,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모든 면에서 세상을 가르치려 자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지셨다는 누가의 기록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입장
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은 인간을 가르치시는 주님께 먼저
배우려는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크리스천이 주님을 좆아 행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첫
번째 의무지만, 그 행함의 토대와 지향점이 주님의 가르치심이 아닐 경우, 인간의 행함이 열심일
수록 인간은 그 행함으로 인해 도리어 주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질 따름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
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처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마태복음 28장 19-20절
상반절 말씀 주님께서는 분영히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
께서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신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무려 3년 동안이나 제
자들과 함께 숙식하며 밤낮으로 제자들을 가르지신 다음,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승천하기 직
전에야 제자들에게 가르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가르지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것보다 먼저 배우
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분부하신 것' 다시 말해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가르치라 명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 아니고는 인간과 세상을 가르칠 수도, 살릴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가
르지심 없이 우리 일상의 삶이 세상에 주님을 투영하는 화면이 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렇다
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언제나 주님의 가르치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그러기 위해 항상 두
가지 사항을 유념해야 합니다. 주님의 가르치심을 받기 위해서는 첫째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1970년을 전후하여 한국 교회가 세속적인 물질주의에 오염되기 시작하면서,즉 교회가 교인보
다 교인들의 헌금을 더 중시하면서, 교회는 교인들의 귀에 거슬리는 진리의 선포를 스스로 삼가
려 애써 왔습니다. 오래도록 교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해온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날 크리
스천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상처 받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말에도 상처를 받
고, 조그만 상처에도 몸살을 치르며, 그로 인해 특정인과의 인간관계를 아예 단절해 버리기도 함
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상처 받지 않고 주님의 가르지심을 받는 길이란 없습니다. 누구든 그런
길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골을 대로 골은 환부를 찢거나 도려내지 않고도 깨끗하게 치유할
수 있다는 것처럼, 전혀 사리에 달지 않는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성경 히브리서 4장에는 주님의
가르치심인 하나님 말씀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할력이 있어,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론과 영과 및 관
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
나느니라.-히브리서 4장 12〜13절 말씀
주님의 가르지심이신 말씀은 마치 확대경과도 같아,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추어진 죄와 욕망
의 찌꺼기마저도 여지없이 드러나게 합니다. 그 말씀은, 이 세상의 어떤 수술용 메스보다 예리하
여, 우리 심령에 가득 찬 죄와 옥망의 고름 덩어리를 가차 없이 죗고 도려냅니다. 그 외에는 우리
를 살릴 도리가 없는 탓입니다. 하나님의 알씀이 임한 예레미야는 회개를 족구하는 하나님의 말
씀을 유대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예레미야에게 갖은 핍박을 다했습니다. 견
디다 못한 예레미야는 더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담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했지만, 그 결심은
번번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를 스스로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매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뻣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
다 못해 그만 항복히고 맙니다.-예레미야 20장 9절 말씀(표준새번역)
예레미야가 자신의 결심과 달리 하나님께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주님의 말씀이,주님의 말
씀을 등지려는 예레미야의 심장과 뼛속까지 불태워 버린 화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는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예레미야
15장 18절 말씀- 표준새번역)하고 절규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상저는 주님의 말씀에 의해 블태워지고 도려내진 그릇된 심령의 상저였고, 그의 고통은 죄
의 고름투성이인 유대 백성의 심령을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이 찢어 주어야 하는 고통이었습니
다. 예레미야가 위대한 선지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의 가르지심인 말씀에 의한 고통
과 상저를 피하지 않았기에, 그는 위대한 선지자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 상저를 두려
워하여 외면해 버렸다면 결코 이를 수 없는 존재적 변화였습니다. 지식은 아무리 쌓아도, 지식을
쌓는 당사자의 심령에 상처를 입히지 않습니다. 지식이란 두뇌 창고에 축적되는 정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지심인 진리의 말씀은 본래 인간의 심령에 새겨져 인간의 심령을 찍기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에 의해 그릇된 것들이 찢어지고 도려내진 상저속에만 새 생명이라는 진주가
잉태됩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에게는 상저가 더 이상 상처나 아등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상처이기 이전에 보다 성숙한 생명을 위한 필수적 발판인 까닭입니다.
도대체 오놀의 허물이 찢어지지 않고 어떻게 내일의 생명이 오눌보다 나을 수 있겟습니까? 그래
서 주님의 가르치심 속에 거하는 사람에게 말씀에 의한 졎어짐은 아둥이 아니라 새 생명의 희열
이요,그 회열을 가능케 해주는 주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어떤 꿀보다 달고 유익한 생명의 송이
꿀이 됩 니다.
주님의 가르지심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둘째, 언제 어디서나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한마디로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형편없이 연약한 존재임을 자각한 사람
만 영원하신 주님의 가르지심을 변함없이 좆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한 인간
은 주님올 이용하려고만 들 뿐。주님의 가르치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콜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
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2장 10절 말씀 (새번역)
자신의 약함묻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전능하신 주님의 가르치심에 자신을 더욱더 의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직계 제자가 아니면서도 바울이 사도행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
은, 이와 같은 그의 겸손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때로 우리의 사지에서 우리의 삶에서
온 힘이 빠지게 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에게서 힘이 빠지
고, 그로 인해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가
르치심에 전적으로 귀률 기율이게 됩니다.
2005년 7월 10일, 100주년기념교회가 창립된 후 저옴 맞는 주일날이었습니다. 제게는 교회 창립
이후 담임목회자 자격으로 처융 설교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2001년 제네바한인교회를 떠난
뒤 담임목사로 4년 만에 처음 하는 설교니만큼, 긴장감 속에서 얼마나 많은 준비률 해야 했겠습
니까? 주일 이틀 전인 7월 15일 금요일에 하루 종일 설교콜 구상하고, 그날 방 늦게 설교 도입
부분의 원고 작성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다융 날인 토요일 아침 8시 30분부터 시작하여 10시간
30분 만인 저녁 7시경, 나머지 원고 작성을 막 끝내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전화별이 울렸고, 받고 보니 잘못 걸려 온 전화였습니다. 저는 수화기콜 내려놀고 작업을
마저 끝내려고 다시 컴퓨터 화면을 콜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원!일입니까? 화면에 있어야
할 설교 원고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처옴에는 설마 됐지만,원고의 종적은 묘연하기만 했
습니다. 검색엔진을 통해 모든 파일과 묻더콜 살살이 뒤졌지만,어디서도 원고콜 찾을 수 없었습
니다. 저는 단지 잘못 걸러 온 전화벨 소리에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을 뿐이었습니다. 그 몇 초 사
이에 설교 전문이, 어떤 른적도 없이 송두리째 실종되어 버린 것입니다.
1998년부터 컴퓨터로 설교문을 작성한 이래 처융 겪는 불가사의한 일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
시오. 이를에 걸쳐 진액을 짜듯이 준비한 설교문이 종적없이 몽땅 날아가 버렸다면,얼마나 황
당한 일이요,얼마나 힘 빠지는 일입니까? 저는 텅 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할 수밖
에 없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저의 힘을 빼놀은 분이 주님이시라는 각성과 동시에, 제게 겸손할
것을 명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느3습니다.
저는 스스로의 연약함옳 망각한 재 자신의 능력만으로 첫 쏜교콜 준비한 어리석옴옳 회개하고,
주님의 가르지심을 겸손하게 간구하며 다시 설교문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성
경 사도행전 본문을 동해, 주님께서 제게 가르쳐 주시려는 바를 더 정확하고 바르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두 번제 설교문이 완성되어 그 원고콜 다시 읽으며, 당신의 방법으로 첫 번
째 원고콜 폐기시키고 내게서 교만의 힘을 빼어 놀으신 뒤에야,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회자로
첫 강단에 서게 하신 주님께 얼마나 감사률 드렸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가르지심 없이 제 능력만으로 어찌 감히 바른 설교콜 할 수 있으며. 바른 목회인둘 가능
하겠습니까? 두 번씩이나 설교문을 작성하느라 방잠을 설친 제 육체는, 주일 예배가 시작될 즈
음 지침 대로 지친 상태였지만, 사도 바율의 고백처럼 저의 약함율 가장 크게 절감한 그날, 저는
주님의 가르지심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할 수 있었습니다. 작금 우리나라는 정지,경제, 사회
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어러용에 처해 있습니다.
독히 여야콜 막론하고 국정을 책임진 정지인둘이 당리당략에 따라 벌이는 이전투구콜 보노라면,
저들에게 과연 애국심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그들의 정지력 속에서 살
아가야 하는 국민으로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림이 빠지곤 학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임묻 진정으로 믿는다면,오늘 우리의 힘옳 빼놓으시는
분 또한 주님임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실은 주님보다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것을
더 신봉해 온 우리가,주님 앞에서 철저하게 겸손해질 때요,우리의 연약함을 주님 앞에 고백할
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든 교만의 힘이 빠진 사람만, 주님의 가르지심 속에서 강철보다 더 강
한 진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증은님들! 주님을 진정 믿는다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움 찢는 상처를 두려워하
지 맙시다. 방이나 낮이나 예배당 안에서나 밖에서나 겸손한 마옴을 견지합시다. 때로 까닭 없이
우리 인생의 힘을 빼놓는 상황을 도리어 기쁘게 받아들입시다.
이제부터 주님의 가르지심에 귀콜 기울입시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가르치심 속에 우리 자신
을 온전히 내어 말김시다. 그때 우리가 입으로 단 한 마디 말을 하지 않는다 해도,주님의 가르지
심 속에 거하는 우리의 삶 자체가 세상을 향한 위대한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의 가르지심 속에 살아가는 우리 일상의 삶을 통해,주님께서 친히 이 세상을 가
르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발취: 이재철 목사님의 저서 ’사도행전 속으로 r中에서 일부를 먼집-®
예수가종다오
글을 보시고 스크랩 하시기 전에 그냥 가지 마시고 앳글로 따뜻한 소감으로 갑사클 표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一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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