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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기(復活)-이재철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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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좋다오

뒤집기(復活)-이재철 목사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누가복음 24장 5절 하반절, 6절 상반절
십자가에 못박허 돌아가신 주님께 무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분면히 무명이 있긴 했지만 인
간의 무덤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달랐습니다. 인간의 무명이 인생의 종착역이라면,주님의 무명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시발점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장례 관습은 시체를 땅 속에 매장하는
우리 나라의 관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연 동굴 혹은 인위적으로 판 바위 동굴을 무덤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동굴 안 평평
한 바위 위에 시제를 안지한 후 동굴 무명의 입구를 돌로 막아 두었습니다. 따라서 필요할 때면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동굴 무덤 속의 시체가 다 썩으면 가족들
은 뼈를 추러 유골 항아리에 넣은 뒤 무덤 속 한켠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가족 중 다른 사람이 죽으면 같은 방법으로 그 무명을 다시 사용하였습니다. 만약 한 가
정에 초상이 연이어 일어나면 같은 무덤 속에 두세 사람의 시체를 동시에 안치하기도 하였습니
다. 주님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동굴은 아리마대 즐신의 부자 요셉이 자신을 위해 예비해 둔 새
무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명에는 다른 시체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시신이 그 속에 안치된 지 사를제 되던 날 새벽 미명, 평소 주님을 따르던 세 여인이 그
들의 관습에 따라 주님의 시신에 향풍을 발라 드리기 위해 무명을 찾았습니다. 아직 온 사방이
감감한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동굴의 입구를 막고 있던 들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명 속에는 응당 있어야 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갑작스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벌 떠는 여인들 앞에 나타난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 때는 이미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후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몰랐던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죽은 자의 무덤 속에서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결단코 죽은 자의 무덤을 찾아 순례하고 참배하는 무덤의 종교, 죽음의 종교가 아님니
다. 기독교는 무덤과 죽음을 뛰어 넘는 참생명의 종교,영원한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주님께서 무명으로부터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이 왜 중요한지, 부
활이 왜 기독교의 핵심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고 주님의 구원은 영원한 구
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당해 주시기 위해, 십자
가의 고난을 당하셨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주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그분의
구원은 이 땅에 국한된 유한한 구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죄의 문제와 더불어 가장 근본적인 죽음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해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
다. 당신 자신이 무명을 종착역 삼아 그 속에 시체로 누워 있으면서,어떻게 우리의 무명 이후를
책임져 주실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사망을 완전무결하게 분쇄하시고 영원히 부활하셨기에,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과 생명은 영원한 구원, 영원한 생명이 됩니다.
따라서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주님의 말씀입니
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열망하지 않
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
둘째,주님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영원히 부활하셨기에,주님의 모든 말씀은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말은, 그의 죽음과 함께 효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아
무리 졸고 옳은 말씀을 하셨다 한들,2000년 전에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
분의 말씀을 알 필요도 기억할 필요도 없으며, 믿을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영원히 부활하셨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분과 함께 그분의 모든 말씀도 영원한 생명을 지니며,
바로 이 순간에도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육제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도I, 오직 주
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 성경 베드로전서 1장 24절, 25절 상반절 주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주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의지나 능력만으
로는 거듭날 수 없음을 우리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 많은 것을 결심하지만,
얼마나 쉽게 허물어집니까?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기
에, 그분을 힘입어 우리는 거듭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경 고린도후서 5장 17절 부활하신 그분 안에서는 누구든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부활의 능력 때문입니다. 부활의 의미와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부활
이 없는 종교란 아무리 미화하고 꾸민다 한들 결국은 죽음과 무명의 종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부활의 종교만이 참생명의 종교,참진리의 종교, 참 거듭남의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
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
이요. - 성경 고린도전서 1S장 17절 말씀 주님께서 부활사지 않았다면, 이미 무염 속에서 흙이
되어 버렸을 그분을 믿는 우리의 행동보다 더 헛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부활이 이처럼 중요할진대,도대체
주님께서 부활하신 현장을 우리 중 누가 직접 목격했습니까? 우리들 가운데 2000년 전 그 현장
에 있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격하지도 못한 그분의 부활을 믿
을 수밖에 없는 증거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오늘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새 생명을 얻고 있다는 사실입
니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돌로 쳐죽이는 일에 앞장 섰던 폭도 사을이 주님 안에서 사도 바
울로 변했습니다.
회대의 탕아 어거스틴이 누구의 이름으로 거듭났는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
다. 아프리카 특인들을 사냥질하여 노예 시장에 팔아먹던 인간 백정 존 뉴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
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우리는 도대체 누구로 인해 거든났습
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이었습니다.
그분이 아니었던들, 저는 오늘도 서을 밤거리 어딘가를 탕아처럼 배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부활
하신 예수 그리스도,그분의 이름으로 오늘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새로워지고 있습니
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불교 신자듈온 부저님에 의해 중생을 얻고 있습니다. 따라
서 이것이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유일한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이 세상에는 소위 주님의 무명이란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종교에는, 그 종교 창시자의 왕
릉 같은 무명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창시자의 무덤을 웅장하게 꾸일수록, 자기 종교의 권
위가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무명이 있다는 것은。그 창시자의 종착역이 죽옹
이었옴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무명이 없습니다. 무염의 핵인 시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부활하
지 못하셨다면, 주님을 추종하던 자듈온 이스라엘 어딘가에 반드시 태산같이 거대한 무명을 만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남은 자들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 그 어느 곳에도,혹은 지
구 위 그 어디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무명은 없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현장으로 알려진 동굴만
이 존재할 뿐입니다. 무명 없는 예수 그리스도, 이것은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당시 대제사장들은,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시체를 홈쳐간
뒤에 부활을 거짓 증거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
다. 마지막 중거는, 주님의 제자들이 전했던, 다시 말해 성경이 전한 부활의 중거가 지난 2000년
동안 허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닉슨 대동령의 보좌관윤 지냈던 찰스 플슨은 자신의 고백록인 (백악관에서 감옥까지)에서, 다음
과 같이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1972년 5월 미국 대통렁 선거를 약 5개월
정도 앞두고,워싱턴 DC소재 워터게이트 건물에 세둘어 있던 민주당 본부에 절도범이 들었습니
다. 그 자체로는 전적 대수로율 것이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체포된 절도범
중 한 사람의 주머니에서, 백악관 직원의 이름이 적힌 쪽지가 발견됨으로씨 파문이 일기 시작했
습니다. 소위 워터게이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 11월, 닉슨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유례 없는 압승을 거두면서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1973년 2월에는 그 지긋지긋하던 월남전옳 종결시켰습니다. 말하자면 닉
슨 대통령은 최고의 절정기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블구하고 워터게이트의 망령
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러 날이 갈수록 더 확대되어 갔습니다. 마침내 닉슨 대통링의 보좌관 10
여 명은, 1973년 3월 21일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한 용모콜 꾸였습니다.
당시 그들은 미국에서 쟁쟁한 명성을 날리던 일류 변호사들이었고,최고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
습니다. 그콜은 누구보다도 법묻 잘 알았고 어떻게 은폐하면 확실하게 그 사건을 가릴 수 있는
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 닉슨에게 매료된, 닉슨의 열렬한 신봉자들이었습니다. 그래
서 미국에서 가장 높은 수입이 보장되는 일류 변호사직도 미련 없이 던져 버리고, 오직 닉슨을
위해 백악관으로 둘어간 자콜이었습니다. 그둘은 닉슨을 위하여 24시간 동안 근무하는 것도 주
저하지 않았고,닉슨움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버릴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보좌관들묻 위해 닉슨 대통령이 위임해 준 권한 또한 대단했습니다. 이물테면 그들이 제의하
면 장관,장성, 군대률 어디로든 옮길 수가 있었고, 공무원들의 재용, 승진,해임의 권한을 위임받
았으며, 천문학적 숫자에 달하는 연방 정부의 예산을 그들의 뜻대로 주무플 수 있었습니다. 그
런가 하면, 전화 한 통화로 리무진은 알할 것도 없고 제트기까지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국립 미술관 소유의 그림은 무엇이든지 대여하여 자기 집무실에 걸어 물 수 있었
고, 붉은 상의콜 입은 스튜어드(미국의 백악관에서 고위관리들을 위해 시중 드는 사람)가 24시
간 방문 앞에 대기하면서 그콜옳 위해 봉사했으며,그들이 원하는 곳이라면 사막에라도 즉시 전
화률 가설할 수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1급 비밀 경호원몰이 24시간 그콜옳 밀착 경호해 주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촉권이었
습니다. 미국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누러 보고 싶을 만한 특권이었음이 름림없습니다. 그
보좌관들은 그 같은 특권과 자신들의 명예콜 지키기 우ᅵ해,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그토록 열
일히 신봉하는 닉스 대통령을 위해 완벽하게 사건을 은폐하는 옴모물 꾸였습니다. 그둘의 법콜
적인 지식으로 볼 때, 그들이 꾸민 은폐 기도는 완벽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로부터 겨우 18일이 지난 4월 8일, 그듈의 옴모는 콜통나고 말았습니다. 그
처럼 최고의 법률 엘리트들이 꾸민 완벽한 음모가 어찌 3주를 못 버티고 송두리째 허물어지고
말았을까요? 이유는 오직 한 가지,그것이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든 지혜콜 종동원
하여 거짓을 지키려 했지만, 그것온 거짓이었기에 서로의 진술이 엇갈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물에게는 그 어떤 생명의 위협도 없었습니다. 그들움 협박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들을 삼키려는
맹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내 그 거짓을 지길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성경이 전하는 부활 이야기란 대제사장들의 주장처럼. 주
님의 시제콜 숨긴 제자들의 거짓말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미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꾸민 거짓말
이 18일을 넘기지 못했다면, 무식한 갈릴리 어부둘이 아무리 알을 잘맞추었다고 한듈 그둘의 거
짓이 며칠이나 유지될 수 있었겠습니까?
더욱이 주님의 부할묻 증거할 때마다 그묻은 생명의 위업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사자의 밥이 되
기도 하고 순교률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탈의 중언이 철회되기는커녕, 그들은 죽는 순간
까지 주님의 부활을 외쳤습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부활의 증거콜 허물어뜨리기 위한 술한 도전과 시도가 있었지만, 성경의 증
언은 결코 허묻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부할의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부
활하신 주님율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부활은 요란한 평과리 소리 속
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정적에 쌓인 새벽 미명에 여인들이 주님의 무염을 찾아갔을 때는,
주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신 뒤였습니다. 마옴 가득 세상을 풍고서는 예배당에서 밤낮으로 산다
한들 부활하신 주님윤 만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영론이 고요한 새벽갈이 비어 있을 때, 우리는 특암 속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인
격적으로 만난 사랑에겐, 참된 거듭남이 있고, 그의 삶엔 진리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참된 결
신욘 오직 참된 생명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아무리 좋욘 묘목이라도, 생명 없는 사막에서는 죽
어 버리는 것과 갈은 이치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영원한 죽옴"이라는 알을 했습니다. 죽옴이란,한 번 죽으면 영원히 끝이기
때문입니다. 증은님듈! 지금 증은님들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현재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증은
님의 일생이 됩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영원히 죽어지는 인생이 될 것인지,아니면 부활의 주님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인생이 되겠습니까? 좋은님이 지혜로운 분이시라면, 무엇이 바른 해답
인지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벌쥐: 이재철 목사님의 저서 '청년아 묻더라도 뿌려야 한다' 中에서-®
예수가종다오
글들 보시고 스크랩 하시기 전에 그냥 가지 마시고 엇글로 따뜻한 소갑으로 갑사플 표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一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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