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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출제경향(2)
마태복음 4:1-11
설교방송 (설교본문)
지난 주에는 사탄의 첫 번째 시험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사탄의 두 번째 시험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시험에 실패한 사탄은 예수님에게 성전에서 뛰어 내리면 천사가 발을 붙들 터이니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뛰어내리시면 천사들이 와서 얼마든지 예수님의 발을 붙들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모습을 보게 된다면 예수님은 하루 아침에 세상 말로 스타가 되실 것입니다. 수도 없이 많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추종하게 될 것입니다.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스타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영광을 받게 하려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우리로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숨어있는 사탄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싫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 사탄의 목적인 것입니다. 사탄은 압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말로 스타가 되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있는 힘을 다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헛된 영광에 눈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헛된 영광에 눈어두워 사는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살 수 없습니다.
저는 71년도에 신학교에 입학하였었습니다. 20명이 정원이었는데 12명이 지원하여 미달 되었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사히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이것 저것 하다가 안되면 '신학교나 갈까?'라는 말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신학대학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서울에 있는 어느 기독교대학에는 장신대반이라는 반이 있답니다. 고시반과 같이 장신대 입학을 준비하는 모임이라고 합니다. 신학대 경쟁률이 보통 4대 1, 5대 1이 되기 때문입니다.
71년도 신학교에 입학하던 해 다니던 교회에서 장로 선거를 하였습니다. 집사님 한분이 장로로 피택 되셨는데 자기 장로 못한다고 극구 사양하더니 결국 다른 교회로 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그런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 아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서로 교회의 장로가 되려고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모릅니다. 선거 때가 되면 세상 선거 못지 않게 운동을 합니다. 은근히 상대방을 깍아내리는 말도 흘립니다. 저는 최근에 장로로 피택이 되었는데도 장로 하지 않겠다고 도망가는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왜 71년도에는 신학교가 미달이었는데 지금은 그토록 경쟁이 치열할까요? 왜 71년도에는 장로로 피택이 되면 도망을 가셨는데 지금은 서로 장로가 되겠다고 세상 못지 않게 운동을 하며 그러는 것일까요?
너무 부정적인 생각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제 해석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옛날에는 교회의 목사와 장로가 된다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는데 지금은 목사와 장로가 된다는 것이 면류관을 쓰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목회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가난했습니다. 제가 어려서 다니던 교회를 작은 교회가 아니었는데도 목사님의 생활은 어려웠습니다. 얼마 전 목사님으로부터 그때 집에 참기름이 없었다고 말씀하시며 '참기름 먹는다고 배부른가 뭐'라고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만큼 목회자들의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신학교가 미달이 되었던 것과 목회자 생활의 어려움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도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게 생활을 하시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개척교회를 하시면서 생활을 할 수 없어 우유배달도 하시고 유치원 버스 운전도 하시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예전 보다 많이 나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대형교회들이 생겨나면서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넉넉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는 목회자들이 많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그 안정되고 넉넉한 목회자의 생활과 신학교 과열경쟁 또한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교회가 가난했을 때 장로님들의 주 임무 중 하나는 빚을 얻는 일이었습니다. 장로님들이 얻어 온 빚은 자칫 잘못하면 교회가 갚지 못하고 그 빚을 빌려온 장로님들이 갚아야만 했습니다. 그만큼 교회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장로가 되겠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그런 교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고 교회에 따라서는 넉넉한 교회재정으로 인하여 그것을 집행하는 장로의 권한이 세상 못지 않게 당당한 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장로의 인간적인 권위의 증대와 장로 선거의 과열 또한 무관하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교회가 커지고 대형화되면 될수록 세상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이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인 수가 불과 몇 퍼센트 되지 않을 때 우리 한국 교회는 한국을 이끌어가는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인의 수가 1,000만을 넘는다고 하고 물론 교인 수로만 평가한 것이지만 세계 50대 교회 중에 절반 이상이 한국에 있다고 하리만큼 교회가 성장한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그 지도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도력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으며 지도를 받는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것이 우리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십자가를 망각하고 헛된 영광에 눈 어두워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면류관만을 좇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탄의 두 번째 시험을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등록 교육 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게시판에 공개강의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이기도 하지만 다시 설교에 인용하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계시는 정동수 장로님께서 장로고시를 보실 때 면접을 하시는 목사님께서 '교회의 주인이 누구냐?'라고 물으셨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대답을 하시자 면접하시던 목사님께서 '그거 말구'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 목사님의 질문 의도는 교회의 주인이 목사냐 장로냐를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장로님 한 분이 여러 해 전 저에게 농담처럼 '장로교니까 장로가 주인 아닙니까?'라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참으로 아찔했습니다. 저는 마음 속으로 이 분이 장로교를 Prestsbyterian church 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Elder's Church로 이해하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장로란 교인의 대표로서 마치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과 같은 존재입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일 수는 있지만 국민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이 시대에 국회의원이 국민의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한다면 그는 정신이 없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장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마치 국민의 주인인 것과 같은 착각을 하는 국회의원들이 더러 있듯이 교회 안에도 장로가 교회와 교인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는 장로님들이 교회 안에 없지 않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에는 Elder's church가 제법 많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에 Elder's church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만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신탁을 받은 주의 종인 것처럼 교인들을 현혹(?)하여 목사 마음대로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교회도 없지 않아 많은 것이 불행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런 교회를 우리는 Pastor's church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몇 년 전 '생사를 건 교회개혁'이라는 책을 출판하고 나름대로 교회의 민주화에 대해서 열심히 주장하고 있을 때 어느 교회 당회에서 일간 신문에 다음과 같은 입장 표명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권위를 담임목사에게 위임하 셨다. 그러므로 담임목사의 뜻에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것이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마치 중세 교황청의 발표를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이 일었습니다. 저도 물론 교회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신본주의는 신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를 가장한 인본주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 교회가 우리 한국에는 많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교회를 우리는 Pastor's church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71년도에 신학교에 입학했었습니다. 20명 정원에 12명이 지원하여 미달이었을 때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신학교가 대부분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 하다가 안되면 '신학교나 갈까?'하는 소리를 쉽게 할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소리 어림도 없습니다. 신학대학 4대 1, 5대 1이 넘어서서 웬만한 사람은 입학하기가 어려운 학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71년도 신학교가 미달이었을 때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장로 선거가 있었습니다. 장로로 피택된 집사님 한분이 끝내 자기 장로 못한다고 사양하다가 다른 교회로 가 버리셨습니다. 그때는 그와 같은 일도 전혀 생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교회로 가 버리시는 것까지는 아니더래도 보통 장로가 되겠다고 운동을 하거나 하는 일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서로 장로가 되겠다고 은근히 암투를 벌입니다. 장로 선거가 되면 세상 선거까지는 몰라도 그에 못지 않은 운동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거기 까지는 몰라도 하여튼 장로로 피택이 되었는데 그것을 사양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왜 71년도에는 신학대학이 미달이었는데 지금 경쟁이 치열할까요? 왜 71년도경에는 장로 되는 것을 가급적 사양하는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적극적으로 장로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요?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목사와 장로가 된다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는데 지금은(물론 지금도 목사와 장로가 된다는 것이 십자가를지는 것과 같은 교회가 많이 있지만) 면류관을 쓰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교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손님처럼 아웃 사이더가 되려고 하였던 사람들이 교회가 커지고 재정도 넉넉해지고 그로 인해 세상적인 권력이 교회 안에 생기면서 교회의 주인이 되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신학대학이 미달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신학대학이 인기학과와 대학이 되어 경쟁이 치열해 지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로로 피택이 되었는데도 못한다고 다른 교회로 가 버리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서로 장로가 되겠다고 세상 선거 못지 않게 선거가 과열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목사와 장로 되는 것이 세상적으로 인기가 좀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고 해서 목사와 장로를 무조건 깍아 내리고 무시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목사와 장로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면 교회는 무질서한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교회 안에 목사와 장로 즉 당회의 권위가 바로 서야 반듯한 교회가 된다고 생각하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절대로 당회 없는 목회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전형적인 장로교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정치는 있을 수 없지만 저는 장로교 정치가 나름대로 반듯한 교회를 정치를 할 수 있는 정치 중에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가 주인이 되는 목회를 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그것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서 목사의 진정한 권위와 전문성이 부정되는 그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의 지나치고 잘못된 권위주의는 부정되어야 하지만 또 그것이 지나쳐서 목사의 진정한 권위와 전문성이 부정된다면 교회는 또 다른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다만 오늘 제가 이 설교를 통하여 말씀드리고 싶은 그 목사와 장로의 권위가 지나쳐서 권위주의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고 그것이 지나쳐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저는 97년도인가 동안교회에 정식으로 사표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사택과 자동차 그리고 전화기까지 다 반납을 하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이사까지 한 상태였으니 그냥 한번 사표를 내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안수집사님 한 분이 저에게 찾아오셔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조금만 참으시면 동안교회 owner가 되실 터인데 그것도 참지 못하시고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저는 그 때 제 마음 속에도 동안교회의 owner가 되고 싶어하는 무의식적인 본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동안교회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제가 하나님께 제일 먼저 드린 기도는 '제 마음 속에 있는 그 죄악 된 본능과 싸우겠습니다. 동안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로 돌아와 교인들에게 그와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교인들이 박수를 하였습니다. 박수가 끝나기도 전에 저는 다음과 같은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가만 보니 저만 동안교회 주인이 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님들 중에도 더러 있어 보이고 교인들 중에도 상당히 있어 보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동안교회의 주인 노릇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눈감아 주지 않겠습니다. 무섭다고 꼬리 내리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힘이 들고 손해를 본다고 하여도 정면에서 싸워 줄 것입니다. 동안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정말 선전포고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말로만 그래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할 작정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높은 뜻 숭의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정말 훌륭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주인이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목사도 주인이 되지 아니하고 장로도 주인이 되지 않으며, 연보를 많이 하는 사람도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도 기쁨으로 종노릇 만 할 뿐 절대로 교회를 좌지우지하지 않는 그런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오직 그분의 뜻만이 높힘을 받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우리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부인하고 헛된 영광을 위하여 시도 때도 없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시험하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 사탄의 이 두 번째 시험에 걸려 든 것이 아닌가를 반성해 보아야만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교회와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교회 안에 쓸데없는 헛된 영광과 자리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눈 어둡게 합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 위하여, 자녀들에게 축복으로 물려 줄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하여 힘쓰고 힘써야 할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사탄의 두 번째 시험에 패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자기를 부인하고 헛된 영광에 눈 어둡지 아니하고 묵묵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을 좇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힘써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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