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믿음에 대하여 1
(칭의와 언약)
이명박 장로님은(존대했슴) 뇌물죄로 감옥에 가면서 측근들에게 믿음으로 이기겠다 라고 말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2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 기도하면 용서해 준다.
2. 나는 구원받은 사람으로 그동안 신앙생활(종교생활)을 열심히 해 왔으니 문제될 게 없다.
1. 죄용서 문제는 다음에 살펴 보기로 하고 오늘은 2. 구원의 확신 문제를 논구 하겠습니다. 이에 관해 칭의와 언약 그리고 그에 따른 믿음이 무엇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받았다고 하는 인식은 '하나님이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는 개신교 중심교리인 '칭의'로 인해서 입니다.
이에 대해서 루터의 오해, 바울의 의도, 칭의의 올바른 이해 순으로 설명 합니다.
1. 칭의에 대한 루터의 오해
어느날 루터는 수도원 복도를 지나다가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실에서 로마서 1 장 16- 17 절 읽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에 주목해서 3 장 28 절의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라는 말씀으로 개신교 핵심교리인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세웁니다. 루터가 칭의에 대해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ㄱ. 의롭지 않은 인간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인정해 주었다.
ㄴ.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인간에게 전가된 것이다.
ㄷ. 칭의교리는 교회의 존폐를 가늠하는 중요한 교리다.(니콜라스 페린외, 예수 바울 하나님의 백성 307p)
칭의는 어떤 지성, 도덕행위로도 구원받을 수 없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개신교 핵심교리 입니다. 이것의 정당성은 뒤에 가서 밝히겠습니다. 그러나 루터와 후학들은 바울의 칭의를 오해 했습니다. 오해 3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ㄱ. 의롭다는 용어를 하나님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선한사람으로 인정해 주었다. 즉 개인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는 것으로 이해하여 그는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되었다고 합니다.
ㄴ.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칭의는 완전구원이다 라고 합니다.
ㄷ. 믿음이란 로마가토릭의 도덕적 제의적 행위를 거부하고 교리를 수용해야 하는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톰 라이트, 톰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104- 105p)
ㄱ. 의롭다고 인정해 주었다에서 '의'는 이스라엘의 천 년 이상 내려온 아주 다양한 의미를 가진 개념 입니다.
간단히만 말하자면, 이사야의 용법에서 하나님의 '의'를 말할 때는 그 '의'는 구원이고, 인간의 '의'를 말할 때는 '관계' 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므로 그가 말한 '의'인 히브리어는 '관계'라는 의미의 '체다카'인데 성서엔 그리스어인 '선과 정의'라는 뜻의 '다카이오슈네'로 기록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성서비평이 없었으므로 루터는 그리스어로 써진 성서 그대로 해석해서 칭의를 하나님이 우리를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었다고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좋은 관계를 맺었다가 바른 표현 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합니다.
존 파이퍼는 이것을 지지하고 톰 라이트는 무슨 '의'가 날아다니냐 하면서 반대 합니다.(존 파이퍼, 칭의 논쟁)
ㄴ.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의롭다고 한 칭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고 우리가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칭의를 완전구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르트를 비롯한 모든 학자들은 칭의를 완전구원으로 이해했습니다. 김세윤은 처음에는 완전구원으로 이해했다가 최근에는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마지막 심판날에 최종적으로 칭의가 이루어진다는 유보적 칭의를 말 합니다.(김세윤, 칭의와 성화 45p)
필자를 포함해서 예수믿고 도덕적으로 선하게 된 사람을 여태 보지 못했습니다. 성품이 좋은 사람은 그렇게 태어난 사람 입니다.
폴 리꾀르는 성격(charicter)은 변하지 않고 인격(persnality)은 믿음이나 지성과 교양으로 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DNA는 변하지 않습나다.
이 완전구원에 대한 인식은 역사가 깊습니다.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한 콘스탄틴 대제는 아내와 장남을 불륜을 의심해 죽인 사람 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죄가 없어진다는 교리 때문에 죽기 직전에 세례 받았습니다.
볼테르의 '관용론'에 보면 중세의 핀란드 어느 마을에서 자기 집에 한 사람은 반드시 천국에 보내기 위해 세례 직후에 옆집 사람과 서로 교차해서 아들을 죽이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ㄷ. 칭의가 믿음이란 선한 행위, 더욱이 사랑의 행위도 아니고 교리를 수용하는 것으로 대체된 것은 개신교의 비극 입니다.
이것 때문에 신앙인이 믿음을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즉 믿음을 관념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올바른 교리를 수용하는 것이라고 한 때문에 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삼위일체신론이 실종되었습니다.(로저 올슨)
또한 바른 교리를 세운다며 수많은 유사 기독교가 탄생했습니다.
교리는 이념이고 지식 입니다. 그게 아니고 진리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을텐데요, 신앙인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입니다.
계몽주의 이래로 지배계층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객관적 지식은 없습니다. 지식이란 높은 사회적 위치의 기득권자에 기초되어 있습니다. 즉 지식이란 권력을 지키려는 욕망 입니다.( 피터 버거, 토마스 루크만, 실재의 사회적 구성)
구원의 확신이라는 교리는 교회 지도자들이 통제하고 지배하여 결속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성서에서 반대되는 말씀은 무시하고 입맛에 맞는 말씀만 택해서 만든 아주 나쁜 신학 입니다. 지금도 페북에서 자기가 개혁신학(칼빈) 전통에 있다면서 구원의 확신을 아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성골이라고 주장하는 건데 필자도 그런 의미의 성골 입니다.
기독교 신학이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소수자들에게 해를 끼쳤습니다.
루터가 오해한 근본 원인이 바울의 의도를 살펴 보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믿기지도 않을 것이고 우습기도 하겠지만 지금도 성서 해석에서 저자의 의도를 살펴서 맥락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1. 기존신학의 정당성을 성서에서 찾기 때문이고(성서보다 신학이 우위 입니다)
2.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라 해서 저자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자라고 하지 않고 기록자라는 의미로 기자( 記者)라고 합니다.
그래서 각 구절 별로 해석 하지, 문학적 구조를 파악해서 문단이나 맥락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성서가 문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기절하려고 합니다. 편지가 문학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서를 저자의 의도를 찾아 해석한 최초의 사람은 영국의 스퐁신부이고요, 로마서를 저자의 의도를 찾아 전체 맥락(context)으로 해석한 사람은 필자가 최초 입니다.
(아정만, 로마서 읽기- 역사 문학적 맥락으로 CLC)
이어서 바울의 의도, 칭의의 올바른 이해, 언약과 그에 대한 믿음을 설명하겠습니다.
감사 합나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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