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이글의 목적은 한국 장로교 예배의 형성과정을 서술함으로써 한국 장로교 예배의 개혁을 위한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있다. 특별히 이 글은 한국 교회 초기에 나타나는 여러 예배의 형태들을 서술하고 그것들이 오늘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데 관심을 가진다. 이렇게 우리의 지나온 예배를 살펴보는 것은 이후 우리들이 예배를 갱신할 수 잇는 중요한 기초가 될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글을 통하여 어떻게 한국 교회의 초기 예배가 진정한 예배라기 보다는 집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글을 통하여 어떻게 한국 교회의 초기 예배가 집회의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II. 초기 한국인들이 경험한 만주교회의 예배
교회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칼빈과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거행되는 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고 한다. 이말에 동의하게 된다면 한국 교회의 시작은 한국에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 들어온 1884년보다 훨씬 이전인 18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1879년 10월에 이미 만주에서는 한국인들 30여명이 정규적으로 모여 예배하고 있었고 그해에 4명의 한국 사람들이 최초로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모였던 이 한국인들의 초기 신앙공동체를 한국교회의 시작으로 보는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만주에서 신앙을 얻은 이들이 한국에 와서 초기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백홍중, 서경조, 이응찬등의 한국인들은 만주에서 만들어진 성경과 소책자를 가지고 이미 선교사들의 입국(1884) 이전에 한국에 들어와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만주에서 한국인들이 경험한 예배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만주에서 한국인들을 선교하였던 로스(the Rev. John Ross)선교사는 1903년에 자신의 선교를 회고하면서 Mission Methods in Manchuria라는 책을 서술하였는데 그속에는 만주교회 다양한 집회의 종류들이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이글에서는 만주교회에서 한국인들이 경험한 예배의 커다란 특징만을 정리하고자 한다.
만주교회 예배의 특징은 첫째로 만주교회의 예배가 특별히 성경공부 중심의 모임이었다는 것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모임이 많았다는 점도 원인이 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 당시 로스의 한국어 성경번역에 참여하였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주로부터 배운 한국인들의 예배 전통은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는데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경전을 읽고 해석하는 전통에 익숙하였던 동양인들에게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또한 암송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만주로부터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는 모임의 전통이 자연스럽게 한국의 초기 신앙공동체에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두번째 만주교회의 예배의 특징으로 성숙한 교인을 유창한 기도로 구분하는 만주 선교사들의 잣대를 들 수 있겠다. 만주교회는 세례 받은 사람은 누구나 공적인 자리에서 기도를 인도하도록 훈련하였고, 그들은 그러한 무기를 가지고 한국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만주교회로부터 얻은 예배의 특징으로 평신도들에 의해서 인도되는 예배를 들 수 있겠다. 한국에 성서와 기독교 서적을 가지고 전도하러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평신도로써 한국의 초기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고 또한 그곳에서 예배를 인도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한국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자국의 평신도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점에서 그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결국, 한국 초기의 예배는 평신도들에 의해 드려진 예배였던 것이다.
III. 선교사들이 소개한 예배전통
1984년 이후로 한국에 들어온 서구의 선교사들은 대부분 미국의 청교도 전통(Puritanism)과 부흥운동(Revivalism)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이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에 남겨준 예배 전통은 크게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발전한 기도주간(week of prayer)을 우리에게 소개하였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그들만이 영어로 예배를 드리던 1885년부터 이미 기도주간을 지켰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 주일동안 특별한 선교의 주제를 가지고 기도를 하였던 것으로 통성기도는 아니었지만 열정적인 기도의 주간을 보내곤하였다. 1887년 처음 한국 교회가 세워진 후에 바로 1888년 1월에 한국인들은 기도주간을 지켰다. 또한 그들은 가능한 자주 기도모임(집회)을 갖곤 하였다. 결국 이러한 전통은 한국교회에 부흥운동의 씨앗이 되었고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기도를 중시하고 신앙의 부흥을 열망하는 교회가 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또한 가지 초기 선교사들이 우리 한국교회에 전하여 준 예배 전통은 교단의 예비전통에 연연하지 않는, 탈 교파적 예배 전통이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선교적 열정 때문에 교단적 연대감이 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교 초기부터 한국의 선교사들은 감리교와 장로교가 함께 연합으로 예배를 드리는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1887년 12월 31일 감리교 전통인 야성회(Covenant Service)를 감리교인들과 장로교인들이 함께 드렸던 기록이 있다. 후에 이 예배는 송구영신 예배로서 한국교회의 전통적 예배가 되었는데, 한국교회의 예배는 이와같이 교파간 함께 드리는 연합예배가 하나의 특성이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후에 한국 장로교회 예배가 장로교회의 교파적 특성을 유지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IV.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초기 한국 장로교 예배
초기 한국 교회 예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1891년 선교사들이 받아들인 네비우스 선교(Nevius Methods)정책이 있다. 네비우스의 선교방법은 선교사역과 교회생활에 있어서 토착민의 참여를 극대화하였다. 네비우스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남자, 여자, 어린이 등 각각의 사람들이 지도자와 교사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즉 네비우스는 토착민에 의한 선교가 훨씬 효과적임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신자들이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네비우스는 토착민을 대리자로 만들었다. 선교와 예배는 몇몇의 장 훈련받은 조사를 통해 기본적으로 구성되어 진행된다. 조사들은 상당수의 교회를 책임지고 지도한다. 이와 함께 각 지역의 작은 교회들(신앙 공동체)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도자들이란 신앙적으로 잘 훈련된 사람들이 아니라 그 지방에서 평범한 사람들인 상인이나 농부들이다. 네비우스는 이러한 평범한 토착민들이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파하고 예배를 드릴 때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정규적인 신학수업을 받지 않은 평신도들이 예배의 인도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한국인 목사들이 배출되기 전까지(1907) 한국 교회는 이러한 평신도 인도자들에 의해서 예배가 인도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토착민 평신도의 예배적 주도권(worship initatives)을 유지하기 위해 네비우스는 예배 인도에 서투른 지도자를 돕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엇보다 네비우스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예배에서 조직적인 설교를 할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예배에서 설교를 하지 말고 성경을 읽고 해석하도록 하였다. 즉 설교(preacing)가 아니라 성경공부(teaching)를 하도록 권장한 것이다.
둘째로, 평신도들이 긴 순서의 예배를 인도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임시적이지만 가능한 간단한 예배순서를 만들어서 그 예배순서대로 예배를 드릴 것을 적어 놓았는데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찬미를 부를 것이요 (2)기도를 할 것이요 (3)성서를 볼것이요 (4)교우 중에서 한 사람이나 두사람이나 기도를 할것이요 (5)찬미시를 부를 것이요 (6)성서뜻을 풀어 가르칠 것이요 (7)기도를 할것이요 (8)연보전을 드릴것이요 (9)찬미시를 부를 것이요.
셋째로 네비우스는 예배인도자들이 함께 모이는 연합예비(Union Service)를 개발하였다. 한 두달에 한번씩 모이는 연합예배를 통하여 평신도 인도자들은 선교사나 조사들의 도움을 받아 앞으로 드릴 예배의 내용을 익히고 가르칠 성경공부의 내용을 익히곤 하였다.
넷째로 네비우스는 성경공부반(Bible Study)의 운영을 제안하였다. 농한기에 6주에서 두달동안 계속되는 특별 성경공부로서 이 기간에 신학교육등이 이루어 졌다. 후에 이 성경공부반은 사경회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네비우스의 선교정책이 한국 교회 예배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는데 크게 영향을 미친 내용으로는 평신도의 예배 참여가 만주교회의 예배이후 계속 네비우스 선교정책으로 유지되었다는 것과 간단한 예배순서가 평신도의 예배인도를 위하여 권장되었다는 점, 그리고 예배에서 설교가 아닌 성경공부가 권장되었다는 점이다.
V. 1907년 이후의 부흥집회
1907년에 있었던 한국의 대 부흥운동은 한국 교회 예배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또 하나의 단초가 되었다. 대부흥운동은 선교사들이 소개한 기도주간과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제안한 사경회가 연결되면서 일어났다. 결국 1907년 사경회에서 공동체의 회개를 동반한 극도의 감정적인 예배가 나타났다. 이러한 예배는 미국의 부흥운동과 유사한 형태로 단순한 예배와 함께 불신자들을 향한 구원초청과 회개의 기도등이 특징이라고 할수 있다.
결국, 이 부흥운동의 결과로 한국교회의 설교자는 불신자들을 구원하는 초청을 하는 기능자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예배의 중심에 불신자와 그들의 회개에 치우치게 된것도 이때부터이다.
이때 한국 교회에는 독특한 기도의 형태들이 나타나는데, 소리를 내어서 기도하는 통성기도와, 새벽에 모여 기도하는 새벽기도, 밤을 새우는 철야기도, 그리고 산에서 기도하는 산상기도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이러한 기도 형태는 한국의 독특한 형태로 발전하여왔으며 한국교회 예배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결국,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부흥회와 기도회등의 집회들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VI. 1920년대의 예배 갱신의 운동
평신도에 의해 주도되던 한국교회의 예배는 1907년 7명의 한국인 목사가 최초로 배출되면서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예배에서의 평신도의 역할이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1910년 곽안련(The Rev. Charles Allen Clark)선교사는 신학생과 목사를 위한 강도 요령을 발간하였는데 그 내용은 지금까지 성경공부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것이었다. 바야흐로 목사들에 의한 조직적인 설교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한국인 목사들의 역할은 예배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점차로 평신도를 위해 마련되었던 간단한 예배순서가 아닌 교파적 특성을 지닌 보다 길고 다양한 예배 순서들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1919년 곽안련 교수는 목사지법(The Pastoral Theology)이라는 책을 발간 하였는데 그 책에서 그는 목사들에 의해서 주도될 새로운 예배 순서를 제안하였다. 그 예배순서에는 칼빈과 장로교회의 전통적인 순서인 죄의 고백과 용서의 선언, 그리고 성서를 순서대로 읽어내려가는 것(lectio continua)와 설교와 관련된 성서를 읽는 것(lectio selecta)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선교사들은 초기 한국인 목사들이 없는 상황에서 임시적으로 유지하여왔던 평신도가 인도하는 예배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제는 한국 목회자들에 의해서 보다 정규적인 예배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는 이러한 선교사들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한국교회는 훈련된 목회자들이 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신도들에 의해서 드려지던 단순한 예배를 고수하였다. 1932년 새문안 교회에서 드려진 예배 순서와 1895년 네비우스 정책을 토대로 임시로 평신도들에 의해서 드려질 예배 순서의 초안을 비교하면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따른 새문안 교회 예전(1932)
마펫 예전(1895)
예배사
찬송 ..................................................................................찬송
기도 ..................................................................................기도(장로)
시편낭독
성경봉독 ..............................................................................성경봉독
기도(회중가운데서)
찬송 ..................................................................................찬양(찬양대)
성경공부 ............................................................................. 설교
기도 ................................................................................. 기도
봉헌 ..................................................................................봉헌과 기도
광고
찬송 ..................................................................................찬송
축도
이상의 비교에서 볼수 있듯이 한국교회의 예배는 목회자들의 배출이후에도 네비우스 정책으로 마련되었던 마펫의 순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곽안련선교사갸 제안한 고백의 기도라든가, 사도신경의 낭독, 순서대로 읽어나가는 성경본문등의 순서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국 평신도 인도자를 위한 임시적 예배의 형태였던 마펫의 예배순서가 한국교회에 자리잡게 되었다. 1920년도에 있었던 선교사들의 예배 갱신운동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평신도들이 모이던 집회의 형식을 고수함으로써 참다운 예배의 회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러한 예배순서는 1980년도에 새로운 예배갱신운동이 한국에 소개되기까지 계속되었다.
VII. 나가는 말
이 글을 통하여 우리는 특별히 한국교회의 예배가 평신도들에 의해 주도되어지게 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만주교회로부터 훈련받은 평신도들이 한국에 들어와 전도를 하고 가정교회를 설립하면서 한국교회는 평신도들에 의해 예배가 주도되기 시작하였으며, 한국에서 선교정책으로 받아들이 네비우스(Nevius Methods)은 한국 토착민의 자립과 자치를 장려함으로써 예배에서도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 초기 예배는 간단한 순서가 특징이었으며, 한국 교회는 한인목사를 배출하기 시작한후(1907)에도 계속 초기의 단순한 예배순서를 사용하여 왔음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서 파악하였다.
그러나 초기 선교사들중에는 한국 교회의 예배가 더 엄숙하고 형식을 갖춫 예배로 발전할 것을 희망하고 신학생들에게 가르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초기 한국 교회의 예배갱신운동은 불행하게도 결실을 맺지 못하였으며 도리어 1907년 이후 발전하기 시작한 부흥회와 각종기도회등의 영향으로 더욱 비형식적이며, 감정적인 집회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글을 통하여 발견된 예배에 관한 초기 한국교회의 정보들은 현재 한국교회의 예배가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할 지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1980년 이후 한국 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예배 갱신의 노력등을 통하여 과거에 집회의 형태로 발전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 교회의 예배가 보다 나은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바란다.(김경진님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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