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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바른이해

by 【고동엽】 2006. 10. 21.

 

 
 

율법과 복음 바른이해

- 바울이 개신교회의 신학자로 인정받고 주장되는 것은 그의 서신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가르침이었고, 이 칭의 교리는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요, 원리였다. 바울 신학의 중심점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에서 전개한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는 구원의 서정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고 구원사적 관점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 구원을 성취하는데 집중했다.

 

바울은 1.[롬1:29-32] "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등등(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에서는 이방인의 죄는 사형에 해당하고...[롬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 모독받기 때문에 유대인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다 라고 했다.

 

2.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기록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어 의롭다함을 얻었는데 다시 할례를 받음과 율법의 의무인 절기와 규례들을 지킴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쓸데없다는 것이다. 그 배경은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고 돌아오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어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얻는다하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혼란을 일으켰던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강권한 이유는 포로귀환후 에스라 서기관이 율법을 백성들에게 열심히 지켜야 구원을 이루고 메시야 도래를 앞당긴다고 했기 때문이다. 더우기 저들의 나라가 망한 이유도 율법을 못지킴으로 알았다.

 

그러나 바울은 반대로 율법은 지킬수도 없고 또 구원의 길도 아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무거운 죄만 가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사명은 온전히 율법을 지킬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오심을 열망하도록 하는 인도자밖에 되지않는다는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요지이다.

 

3.[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율법은 죄만 깨닫게 하고또 [롬3: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을 심판아래 있게 한다는 것이다.

 

4. [롬4:9-12]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 아브라함은 율법의 유대인뿐 아니라 율법과 상관없는 이방인의 조상이기도 하는데 그는 하나님이 내실 의의 길을 믿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믿음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시고 그 의를 인치시기 위해 할례를 받게 하셨다.

 

바울이 구원의 길로서 율법을 시비할때 모세를 걸어 말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들어 말한것은 구속사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불가능 정황에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 했을때 아브라함은 통상적인 동양인의 관념대로 하나님이 내게 한씨를 주셔서 내이름이 끊기지 않고 대를 잇게 하시는구나 하고 인간적 혈통이 이어짐을 감사하고 믿은것이 아니라 이삭을 주시기로 약속하실때, 그것도 젊은시절 다 지나고 인간적 가능성이 다 지난후 한아들을 주시겠다 하심은 혈통이 이어지는 축복이 아니라, 세상 구원의 섭리가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진리를 갈 3:6-18에서 밝힌다.

 

[갈3:6-9]"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

 

[갈3: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 하나님께서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셨을 때 많은 자손이 아니라 한 자손을 지칭 하시고 이를 네 자손이라고 하신 것은 이삭이 아니라 이삭의 씨를 통하여 세상의 구속주를 주시겠다는 섭리를 아브라함은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아브라함은 보고 기뻐하며 웃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에서 그리스도의 출생을 보았다. 이 사실을 [요8: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 그리스도 자신이 증거하셨다." [갈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 그러니 처음부터 구원의 길은 430년후에 율법이 와도 변경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갈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에서 하나님은 그 약속의 씨를 기다리게 하지않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지키며 살라고 하셨는가? 이 섭리는 율법준수로 구원됨이 가능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불가한 율법으로 백성들을 죄아래 가두어 그리스도 믿음에서 오는 의의 길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이다. 갈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 율법은 범법때문에 더해졌는데, [약2: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 한 계명을 범하여도 전 율법을 범함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약속의 자손이 오시기까지만 유효하다.

 

5. .[갈3:24-25]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夢學)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있지 아니하도다 " 바울은 율법의 기능을 몽학선생으로 기술하는데 "당시 주인은 똑똑하고 학식과 덕이 겸비한 노예에게 모든 권한을 주어 자기자식을 교육하도록 맡긴다. 그 노예는 주인의 자식이지만 교육이 마치기까지는 노예의 자식과 같이 엄하게 다스리며 교육시킨다. 그러나 그 교육이 다 마치면 다시 주인에게로 돌려드리는데 그때엔 전에 교육때와는 전혀 다르게 주인 자식에게 절대적으로 노예로서 복종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온후에는 믿음으로 사는데 이것은 전혀 율법의 지배를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롬8:2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그리스도를 믿는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는데 그 이유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했기 때문이다.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에는 구원의 길로서 율법의 기능은 종결되었던 것이다. 6. 히브리서의 가르침에서는 아론의 제사직이 죄를 깨끗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구약의 피제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제사에 비하면 그림자요, 예표였고 그리스도의 제사는 실체요,그 원형이다. [히7:19]"(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 그래서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모세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 보았다. 따라서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의 기능의 종결에 관하여 바울보다 더 과격하다.

 

[히7:27]"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희생이 모든 것을 다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7: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 율법을 폐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피제사를 반복하지 않는다(세대론자들과 전천년기론자들은 재림후 메시야왕국때 구약의 모든 제사복귀 주장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행위이다).

 

[롬10: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고 완성인데도 옛언약의 백성들은 제사제도를 계속할 것이 틀림없으므로 이 제도를 하나님은 성전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고 자신의 심장을 내보이셔서 물리적 방법으로 폐지하셨던 것이다.

 

그래도 성전이 있는 한 레위제사가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AD 70년에 로마의 디도장군을 들어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시켜셨다. 그후 성전재건은 이뤄지지 못했고 또 시온주의 결과로 유대인들이 2차대전후 팔레스틴에 귀환하여 이스라엘을 세웠어도 아직도 성전을 세울수 없는 것이다.

 

성전만 아니라 제사장 가문을 완전히 허물으심으로 지금까지도 사독의 뒤를 이은 제사장의 후예를 확인해낼 길이 없다. 그들의 성씨가 코헨이란 사람을 찾아 제사장으로 세울수도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로 코헨은 제사장이란 뜻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코헨이라는 성씨를 가진 자도 찾을길이 없다.7. 그리고 율법은 그리스도 오심으로 이미 성취되었지만 그 기능이 아직도 유효한 것은 의식법,시민법,윤리법 이 셋중 윤리법이라 하겠다. 의식법이란 구약 피제사를 가르킴이요. 시민법이란 재판법이다 이스라엘의 재판법이 세계 각나라의 법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공의는 살아있다(공평하게 재판하는 것). 윤리법이란 "살인치 말라"는 지금도 살인치 말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더욱 깊게하고 확대해석한 것은 이웃을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살인으로 보았다.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 언약 백성들의 생활규범 으로 역사한다. 하나님이 자기백성과 맺은 언약의 거룩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였다. 율법이 그렇게 되지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구약 백성들을 일시적으로 심판하실때 그들이 율법을 범했다기보다는 그들이 언약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공의회때 주의 형제 야곱보가 결정적으로 율법을 구속사적으로 보는 것을 지지했다. 그후 야곱보가 순교후에 베드로가 예루살렘교회을 감독하면서 그길을 택해 진행해 나갔다. 성경전체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경륜을 십자가의 구속사적으로 봐야 옳다. 특히 교회가운데 말씀선포도 예수의 피 구속사건이 빠지면 그의 설교는 본래의 취지를 망각하는것이다. 예수 자신은 율법의 전체 의미를 사랑 이라는 말로 대치시키기도 하셨다.

 

그러나 율법과 복음이라는 구체적인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종말 이기도하다. 한방울의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지배아래에 있는 사물들의 망망대해보다 더 무게가 있다. 하나님의 기준에 측정하여 볼때 인간이 지니고 있는 우월성들은 그 높이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상실한다. 골짜기는 높이 솟았고 산들은 낮아졌기 때문에 인간들은 동일한 선 안으로 등장한다. 그들 인간의 “감추어진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 아래 서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끝이지 또 하나의 새로운 두 번째 역사의 시작이 아니다. 역사는 이로서 종결되었고 그것은 지속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심판자로서 철저한 분이시기 때문에 시간과 영원,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 이편과 저편을 뗄레야 뗄수 없이 서로 묶어 놓는다. 무의미를 폭로하는 것은 또한 의미의 계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진노아래 이뤄지는 복종은 그의 의에 대한 믿음이다. 이유는 하나님은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으로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으로서 하나님은 다른 본질들과 병존하는 형이상학적 그 무엇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것에 대한 영원하고 순수한 근원이다.

 

유대인만이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그 가능성은 다른 여러 가능성들 가운데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고 바로 그들 자신에게서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그들이 갖고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은 이 세계에 구속이 존재한다고 하는 불가해한 것의 이해 가능한 증언들이다. 가장 심오한 인식을 위해 열려진 문이요, 그 인식의 제공이다.

 

하나님의 신실은 배신될 수 있을지 모르나 지양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사는 무시 당할 수는 있으나 취소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관용은 외고집의 인간들에게는 심판이 되면서 한 치의 변화도 없다. 어느곳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헛되게 계시하지 않는다. 마치 그것이 완전히 불타버린 찌꺼기라 할지라도 “율법”이 있는곳, 거기에는 하나님의 신실의 말씀 또한 존재한다.

 

부름받은 자들이 도처에서 자기들의 사명을 완수치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의 소명을 의심하거나 그들을 부르신 것을 비판한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하나님의 통고의 가치는 인간적인 역사의 흐름에 의존되어 있지 않다.인간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역사라고 하는 파도의 격랑위에서도 하나님의 신실이 고집스럽게도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의 행위는 인간의 의의 철거이지 그것의 건설이 아니다. 율법의 행위는 육적 영역의 한계내에서 볼때 하나의 부정이지 긍정이 아니다. 율법의 행위는 그것이 오직 하나님편에서 바라보아질때 그 어떤 가치를 지닐수 있고 또 높이 평가할수 있고 탁월한 것이다.

 

곧 인간의 감추어진 것을 심판하시는 것 많큼 비례하여 인간에게는 그의 본질의 가장 은밀한 깊은 곳에 붙잡을 수 있는 어떤 휴식처도 없다. 그토록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그리고 홀로 그만이 모든 개개 사람에게 “각자의 행위대로”갚으시는 많큼 비례하여 인간의 모든 행위 가운데는 자신을 위하여 유리하게 제시할수 있는 어떠한 것도 남아 있지 않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포하고 자신의 평가에 의하여 “갚으시는”것은 그 자체는 육이 아니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어서 이세상에서는 크다거나 혹은 무게있다고 해서 인정받지 못한다.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놓여있는 거리 때문에 야기된 곤경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는 도움은 홀로 하나님 뿐이시다. 오직 그분만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율법을 통하여 이뤄지는 것은 죄의 인식이다. 율법은 바로 그 율법을 갖고 있는 자들을 향해 모든 감상성과 낭만성으로부터 끄집어 내어 창조주와 피조물, 영과 육사이에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앞에 이끌어 내야만 하는 그러한 것이다.

 

율법은 그들을 고발하고 그들을 하나님 앞에 죄인들로서 선포한다. 율법은 그들로부터 속한 모든 것을 빼앗고 심판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넘겨준다. 이것이 이뤄지면 인간은 율법의 판결을 듣고 자신의 특수성 자신의 체험, 그리고 자신의 경건 가운데서 자신을 이해하며 그런다음 그는 궁극적 진리, 구속의 진리, 화해의 진리 그리고 무덤 저편에 있는 진리를 듣는다.

 

계시의 흔적이 계시에 대한 하나의 지시로서는 모든 것에서 영원한 실재성인 것이다. 경건한 자들의 기다림은 사실적인 모든 것에서 그것이 바로 자신의 철저한 모호성의 증언이라고 하는 한에서 그 자체안에 영원한 내용을 간직하고 있다.

 

모든 현존과 상존은 자신의 비존재가 인식되는 한에서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심판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있는 인식가운데 유일하고 가능한 하나님의 현재하심이 세상에 보여지게 된다.

 

그 이유는 근본적인 빛 가운데서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그의 존엄성 가운데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태인이 갖고있는 특수한 것이고 할례가 갖고있는 가치이다.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은 인식된다. 즉 불경건한 인간을 의롭다고 선포하며 죽은자들을 살려 일으키며, 존재 하지 않은 것을 존재하게 하는 분으로서 말을 걸어 오시는분, 그리고 그분은 다만 소망에만 의지하여 믿어질 수 있는 분으로 인식된다.

 

하늘과 땅의 주인, 그분이 입을 열면 하늘이 갈라지고 무덤들이 입을 벌리고 태양은 기브아에 머무르고, 달은 아알론의 골짜기에 머물러 있게 된다. 시간이 아닌 시간, 비공간적인 장소, 불가능한 가능성, 창조되지 아니한 빛의 빛은 이제 방향전환에 관한 복음이,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 나라이다. 세계 안에서의 구원, 심판 가운데서의 무죄 선고, 시간 속에서의 영원, 죽음 가운데서의 삶, 이 모든 것에 관한 복음이 터 닦아진다. “나는 새로운 하늘과 땅을 보았다; 첫 번째 하늘과 땅은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율법”있는 곳에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율법”이 없는 곳에서도 그는 역시 말씀하신다. “율법”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할때 그것은 “율법”이 있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그가 말씀하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시다.

 

“하나님의 의”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에 자신을 고백하심으로 그리고 그 인간과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서 자기 자신앞에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하신다. 그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신다. 그것은 이 세계를 향하여 요구된 것으로 지속적으로 유효한 것이며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요구이다. 우리가 그 앞에 서 있는바 곧 그 법정의 저편에 항상 그가 계시니 이것이 그의 판결의 내용이다.

 

그 법정의 엄격성과 극복 불가능성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의식되어지면 되어질수록 하나님은 더더욱 분명하고 강력하게 자신의 의와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시려고 한다. 인간적인 우리 고유의 모든 것, 선악 혹은 신,불신이든 간에 이것들이 마치 유리와 같이 투명해지면 투명해질수록 하나님에 의해서 보여진 우리들은 더더욱 확정적으로 하나님의 권력 영역안에서 존재케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와 구원과 위로는 우리 밖에 있으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받아들여질때에는 거룩하고 지혜로운 반면 우리 자신 안에는 죄와 불의와 미련함 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는 사실은 높은 설교이고 천상의 지혜이다.

 

하나님의 의롭다고 하는 이것이 계시되었다. 곧 하나님의 긍휼이 승리한다 라고 하는 대답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면 하나님과 인간의 이러한 긍정적 관계는 하나의 절대적으로 역설적인 관계로서 확고히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여기 두려움과 떨림과 피할수 없는 필연성의 압력아래 선포되었다. 즉 하나의 사건으로서 영원한 그것이다.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인식,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에 거히시지 않는 하나님, 그 누구를 필요로 하지않는 분의 인식, 따라서 그러한 자로서 모든 자들에게 생명과 호홉과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인식을 전파한다.

 

우리는 그분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 곧 우리 가운데 누구에게도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으시며 우리가 살고 활동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 저편, 비록 우리가 변질되었다해도 우리에게 신실하게 머물러 계시는 그러한 본성을 가지신 그 분을 찾게 하기 위하여 저 모든 것이 주어졌다고 하는 것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이 인간에게 신실하게 머물러 계시며 그의 신성은 인간의 예술이나 창작활동의 그 어떤 형상과 동일시될 수 없음을 전달하고 또 하나님께서는 자기에 대한 인간 무지의 시기를 눈감아 주셨다는 것도 전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하여 인간에게 한계가 그어졌고 울타리로 둘러 쌓여 있음을 본다. 우리는 역사의 무의미 가운데서 의미를 보고 진리가 자기를 속박하고 있는 족쇄를 끊어바리는 것을 본다. 우리는 인간속에 “육”이상의 것을 보며, 동이 터오는 구원을 본다. 우리는 가장 높은 인간의 기대와 희망이 무너지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끈질긴 신실을 본다. 이 계시된 것으로부터, 나타난 것으로부터, 가르쳐진 것으로부터 우리는 출발의 근원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의는 모든 약속의 성취이며 모든 인간적 소망과 추구와 기다림에 대한 대답인 바 그것은 곧 소망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하면 할수록 더더욱 확실하게 된다. 하나님의 의는 모든 현존과 상존의 영원히 진실된 내용이기 때문에 심판아래 분명히 있으면 있을수록 그렇다.

 

역사가 자기 자신 스스로에 대하여 고발자가 되면 될수록 하나님의 의는 모든 역사의 의미이며 창조된 모든 것의 구속인바 그 창조된 모든 것이 자체의 단순한 피조성 가운데서 인식되어져 더욱 확실하게 자기 자신을 넘어 자기 저편으로 지향하면 할수록 확실하게 된다.

 

어디 계시의 흔적이 전혀없는 곳이 있을수 있을까? 비유가 말하고 증인들이 증언을 말하며 눈은 이미 자기 앞에 서있는 것을 보며 귀는 벌써 자신과 애기하는 것을 들으며,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항상, 그리고 도처에서 모든 사람에 의하여 믿어진 것을 진실로 믿게 된다고 하는 것, 바로 이것에 문제의 본질이 놓여 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신실을 통하여”계시된다. 하나님의 신실은 저 신적인 끈기인 많큼 역사의 본래적인 기선으로서 인식되어진다. 즉 하나님의 의 그 자체이다. 하나님의 신실은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와 만나진다는 것 안에서 입증된다.

 

기독교의 의미는 구속이요, 시대의 전환이며 부활이고 예수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침묵하게 하는 것이니 곧 하나님의 비명시적인 것이다. 모든 인간적 사건 진실된 내용은 바로 예수에 의해서 선포되었고 그 분 안에서 구체화 되고, 곧 용서되니 그 용서 아래 모든 사건이 있다.

 

예수의 생애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며 한 죄인의 모양으로서 그 자신 죄인들과 같이 한다. 예수는 세상위에 내려지는 그 심판아래 자신을 완전히 세우고 스스로 자신을 다만 하나님에 대한 질문으로서만 현재할 수 있는 그러한 곳으로 자신을 세운다. 그리고 그는 종의 형태를 취하면서 십자가로 향하여가고 죽음 가운데로 들어간다. 그는 자신의 길의 정상에서, 그리고 목표지점에서 순수한 의미에서의 부정적인 모습이다.

 

즉 그는 결코 하나의 어떤 심리적 힘의 운반자가 아닌 많큼 바로 이 부정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당신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비명시적인 다른 것에게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가능성, 생각 가능한 인간적인 가능성 모든 것을 희생시키니, 바로 여기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넘어 가리키며, 율법과 예언자들 안에서 스스로 최고로 향상시키는 인간적 발전 가능성의 완전자이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 올리셨고 그 가운데서 그는 그리스도로서 인식되었으며, 그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모든 것 위에 비취는 종말론적 빛이 된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을 본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 앞에 신실 그 자체이다.적나라하게 하나님 앞에 서 있는자의 회개이며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하여 가난하게 된 자, 그리고 예수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자의 근본적인 새로운 방향설정이다. 믿음은 아직도 항상 그리고 거듭거듭 하나님에 마주하여 모든 인간적인 긍정과 신념과 업적과 배후, 그리고 그런 것들 위에 있다. 따라서 믿음은 결코 종결되지 않으며 손에 쥐어지는 것도 아니고 보장 되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심리학적 견지에서 볼때 거듭거듭 새롭게 불확실한 것, 어두움 그리고 텅빈 공중으로의 도약이다. 혈과 육이 그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는다(마16:17). 어제 내가 듣게 되었던 것을 오늘 새롭게 듣게 되며 내일 다시 새롭게 들어야만 할 것이다.

 

예수 안에 나타난 계시, 바로 그 계시가 하나님의 의의 계시라고 하는 것에서 그것은 동시에 생각 가능한 가장 엄격한 하나님 자신의 감추심이며 자신을 알아 채릴수 없게 만드심이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진실로 하나의 비밀이며 알려지지 않은 자로서 자신을 알게하시는 분이시고 영원히 침묵하시는 자로서 말씀하시는 분이다.

 

예수안에 계시 되어졌음으로해서 하나님은 유대사람에게는 하나의 거리낌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셨다. 우리는 이 믿음을 우리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요구하는 바 이 요구가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근원을 가진 것은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신빙성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을 위해서는 우선 먼저 마땅히 밟아야만 할 그 어떤 인간적인 길 인도라든가, 또 어떤 단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믿은은 항상 최초의 것이요, 전제요 기초의 제공이다. 유대인이나 헨라인이나 남녀노소 유, 무식 상관없이 누구나 믿을수 있다.

 

믿음의 요구는 종교, 도덕, 삶의 영위, 견식과 사회적 위치, 이 모든 것들의 차이를 가로질러 뚫고 나간다. 믿음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쉽고도 어렵다.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도약, 곧 공허 속으로의 도약이다. 믿음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은 그것이 또한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의 실재성은 그의 의 보편성 가운데서 확증되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자유로운 의지요, 그분으로부터만 존속하는 바 인간안에 있는 어떤 심리적 힘이 되지 않으며, 이 자연 가운데 어떤 우주적 힘이 되지 않는다. 은혜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요, 또 그 능력으로서 존재하며, 새로운 인간의 예고이고, 새로운 자연, 새로운 세계, 하나님 나라의 예고이다.

 

그리고 또한 은혜는 외적 인간이 사라짐과 함께 내적 인간이 날로날로 새롭게 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모든 날의 날에 현실적이 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그리고 예수 안에서 예고된 성취의 날과의 관련하여 믿어져야만 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이 창조자가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 곧 육에 따른 그리스도는 여러 다른 가능성 가운데 있는 가능성이다. 하지만 이 가능성은 불가능한 것의 모든 징후를 자신안에 운반하고 있다. 역사 가운데 역사적이고 시간 가운데 시간적이며 인간 가운데 인간적인 것이 그의 생애이다.

 

그러나 그의 생은 의미로 가득찬 역사요 근원과 종말에 대한 지시로 가득찬 사물성이요 영원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찬 시간성이요 말씀하시는 신성으로 가득찬 인간성이다. 이 한조각의 세계성 가운데서 어떤 것이 이 세계로부터 유리되어 새로운 빛을 주니 이것이 한밤중에 비춘다. 이것이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자들 가운데 평화이다.

 

그의 피안에 있는 자신의 신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 예수를 화해의 덮개로 정하셨다. 하나님은 그 위에 거하시며 이야기 하시는 장소로서 예수는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경륜안에서 정해지신 바 되었고, 지금 시간안에서 인간들 앞에 역사 안으로 세워졌다. 예수의 생애가 하나님에 의해 화해를 위하여 질적 의미가 부여된 한 역사의 장소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셨다(고후5:19). 하나님의 나라가 이 장소에서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그의 오심 그의 구속하는 능력과 의미가 바로 이 자리에서 감지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가 그토록 가깝기 때문에 바로 여기서 그의 인간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과 말씀하시고 또 자기의 평화 안으로 인간을 부르시는 그의 의지가 오해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며 바로 여기에서 믿음은 하나의 강권하는 필연성으로 강요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구약의 카포레드(덮개)가 하나님의 숨어 계심과 현재 하심을 선포했었던 것과 같이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화해 역사하심이 계시되어 있기도 하고 또한 은폐되어 있기도 하다.

 

화해라고 하는 것은 화해의 장소에서 다만 피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죽임을 통해서만 살리신다는 엄숙한 기억을 통하여 일어난다. 바로 그의 피 가운데서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보여주고 자신을 인류에게 향해진 하나님의 신실의 처음이요 마지막 말씀으로서 확증하며 우리 구원의 불가능한 가능성의 열림으로서 자신을 보여주고 하늘나라 예고자로서 자신을 확증한다.

 

그것은 십자가를 향한 그의 길에서 그의 삶의 희생에서 그리고 그의 죽음 가운데서 비로소 그가 가까이 가져다주는 구속의 철저성과 그가 선포하는 새로운 세계의 새로움이 빛에 밝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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