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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구원과 믿음에 대하여 2

by 【고동엽】 2006. 8. 15.
구원과 믿음에 대하여 2
(칭의와 언약)
2. 칭의를 말한 바울의 의도
ㄱ. 칭의는 바울의 창안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도말하고 의롭다고 불러 주기를, 즉 하나님으로부터 칭의 되기를 갈망했습나다.(시51:4, 143:2 이사50:7-9 쿰란문서 IQS11-15)
그러나 바울은 예수가 유대인들의 하나님나라 개념을 변형시켰듯이, 이들의 칭의 개념을 변형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은 죄를 완전히 없이해 주기를 바랬으나 바울은 칭의를 예수 십자가의 공로에 의해 선택될 수 없는 이방인(세계인)이 선택된 은혜로 사용했습니다.
ㄴ. 칭의는 완전 구원이 아닙니다.
바울은 십자가가 완전구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고 합니다.(빌2:12) 바울 구원관의 특징은 십자가가 완전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입니다.(로마3:25, 칼 바르트)
이장을 바르게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지므로 필자의 책 '로마서 읽기'를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ㄷ. 바울은 칭의를 유대인과 이방인(세계인) 그리고 경건파 그리스도인과 자유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 믿음으로 용납했으니 너희도 서로 용납하여 화해와 평화를 이루라는 도구개념으로 사용 합니다.
그는 로마서에서 '의롭다 하셨다' '용납하라' '받아들이라' 라는 칭의 용어를 42 번 사용하는데, 전부가 칭의 자체를 설명하는데 사용하는 게 아니라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도구 개념으로 사용 합니다.
ㄹ. 바울은 로마서 3 장 28 절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라고 합니다.
루터는 이구절을 근거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칭의 교리를 세우고 그것이 완전구원으로 이해되어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믿음이 지금의 삶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율법의 행위는 행위일반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용납하지 않는 그들만의 독특한 행위인 '할례, 음식규정, 절기지키기' 입니다.
바울도 자신의 법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말이 행위를 무시하는 믿음이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이말에 이어서 3 장 31 절에서 믿음이 율법(행위)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굳게 세운다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대립 개념은 행위가 아니라 법 입니다. 그가 말하는 법은 우리의 가치체계 모두인 문화, 종교, 사상, 이념, 법률, 교육, 도덕 등을 말 합니다.
3. 바울 칭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
바울의 염려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후학에 의해서 믿음을 관념으로 이해하는 히브리서가 쓰여지고, 로마서가 기록되고 2 세대 정도 지나서 믿음이 관념화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가 기록됩니다.
루터가(1483- 1546) 칭의를 관념화, 내면화, 영성화함으로써 행위와는 상관 없는 듯한 오해가 생기자 루터파와 칼빈파(개혁신학)와는 다른, 교회사가들이 항론파라 부르고 행위를 중요시 하는 알미니안주의(1560- 1609)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가 태동 합니다.
이렇한 결과는 기독교가 전적으로 로마서 읽기를 실패한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가 말한대로 루터가 말한 믿음이 행위와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된 것은 기독교의 비극 입니다. 바울의 믿음이 초기부터 행위와는 별개인 것처럼 이해되어 왔을지라도 그것은 현대와 같은 지경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믿음과 행위가 별개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이것은 초기에 기독교가 헬라화 과정을 거치고, 근대에 이르러 정교분리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모든 사유는 행위를 목표로 합니다.(앙리 베르그송,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179, 216p)
믿음은 관념론에 비판적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폴 틸리히, 프로테스탄트 시대 134p)
바울의 위대성은 초월을 관념화한데 있지 않고 그 초월을 삶에서 구현한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해야 합니다. 다만 그 구원은 완전구원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고 칭함을 받았으니, 즉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으니 우리가 그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나다. 개신교 칭의 교리는 정당 합니다.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하면 자랑과 교만이 생기기 때문이고, 업적을 위해 갈등과 불화를 일으키기 때문 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한 최초의 사람 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 이유가 자랑하지 않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엡2:9)
바울의 목표는 오로지 화해와 평화 입니다.
가톨릭신자들은 인간의 선행과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는 잘못된 통념을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개신교신자들은 선행을 게을리 하지 말고 하나님은혜를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김근수 행동하는 예수 255p)
4. 믿음으로 살아라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으라는 요구 입니다.
바울은 이제는 법 이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법으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으라 합니다.(로마1:16- 17, 3:21)
그가 말한대로 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법을 지킵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A. 교회 문제
교회를 물화(物化 reification) 시키다
강남의 대형교회 O목사가 유트브에서 오늘의 교회 사태는 전적으로 목사책임이라고 하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매우 맞는 말인데 설교하는 자기가 대표적 주범인 건 모릅니다. 소위 성공했다는 대형교회 목회자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은 오간데 없고 자신의 업적 자랑과 명예만 있습니다. 그 대형교회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자기들만의 멤버쉽 잔치가 되었으니 말 입니다.
교회도 사람이 모여 조직된 인간현실이므로 모든 행위와 그로인한 문제가 발생하면 구성원들간의 이해와 협의를 통해서 해결해 가야 하는데, 교회가 사람의 모임으로서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니라 물화(物化 reification)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의 사물처럼 다룬다는 뜻 입니다. 자기 업적의 자랑의 자리가 되거나 신의 뜻이라며 목회자와 몇몇 이해관계인의 권력 행사장이 되었습니다.(피터 버거외, 실재의 사회적 구성 140 - 141)
이것과 알아들을 수 없는 설교로 인해 공정성에 예민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교회가 게토화(고립)되었습니다.
게토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가 패망한 후에 각 나라에서 자신들만이 살도록 이룬 마을 입니다.
신앙용어를 남발합니다. 교회밖의 사람뿐만 아니라 교회안에서도 불쾌 합니다. 신앙지식의 고착화로 페쇄성이 생겼습니다.
페북에서 어느 고매하신 목사가 노회의 젊은 목사 안수식에서 자기가 설교로 섬겼다고 글을 올렸습니다. 분명 자기 자랑의 글인데 섬겼다고 해요. 섬김은 아랫사람의 발을 닦아주는 정도의 굴욕을 감수하는 행위 입니다. 소통도 없는 페친이고 역겨움에 차단했습니다.
B. 믿음과 법
교육학자들(문동환)과 동양학자들(김용옥)은 바울을 비난 합니다. 교육학과 동양학은 참자아를 찾는 것 즉 인간성 계발이 목표라서 바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울을 오해한 것은 교육과 동양학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주장은 믿음으로 교육과 동양학의 요구를 이루자는 것 입니다.
바울의 목표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변화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의식(意識)과 삶의 변화 즉 존재의 변화 입니다. 바울은 예수 만나기 전에는 선과 정의를 위해 헌신한 사람 입니다. 급기야 옳지 못한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 섰다가 자신의 옳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의 목표는 화해와 평화 입니다.
다음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약속(언약)과 그에 따른 믿음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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