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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교회’라는 신분사회

by 【고동엽】 2008. 3. 25.
 

        교회’라는 신분사회   
   이튿날 유대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를 비롯해서,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밖에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서 물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행 4:5~7)

 

한국소설의 고전인 <춘향전>은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돌아와 변학도의 손아귀에서 춘향이를 구해냄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바라던 대로 사랑을 성취한 춘향이가 (만일 소설이 계속되어진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녀는 양반집 애첩으로서 기생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신분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낳은 자식은 어찌 되었을까요.

 

첩의 자식은 서자라 하여 소설 <홍길동전>에서는 호부호형하지도 못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서자였던 길동이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했고 형들을 형이라 부르지도 못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집 떠나는 길동이에게 아버지가 호부(아버지라 부르는 것)를 허용하고, 이에 감격하여 우는 길동의 모습은 그 당시 서자라는 신분이 겪었던 처절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혈통을 통한 신분의 세습이라는 그 시대의 논리가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유대의 대제사장 가문 역시 핏줄을 통해 얻은 신분이 가져다준 권력을 누리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갈릴리 출신의 베드로가 정말 하찮게 보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혈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사장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그들의 혈통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혈통적으로 천한 갈릴리 출신들이 성전에서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누리는 상황이 도저히 수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그의 말과 행하는 바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냐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가 어디 출신이냐 어느 가문에 속한 것이냐를 판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오랜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보다는 그 일을 행한 자들의 가문과 출신이 더 중요했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의 천한 근원을 밝힘으로써 자신들의 위상과 권세를 확인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제사장직은 더 이상 봉사와 섬김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 사회의 권력을 장악하는 도구였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재물과 권력을 입맛대로 챙길 수 있는 탐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한 자리가 애비 잘 만난 덕에 공짜로 손 안에 쥐어지니 세습이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사회제도였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세습을 통해 혈통이 정해준 신분의 권세를 흔드는 사태가 가장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신분의 권세 앞에 고개 숙이는데, 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권세를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났으니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혈통의 이름으로 사도들을 제압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말씀 따라 귀머거리가 되고 소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혈통을 통해 세습되는 신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하지만 암암리에 사람들은 신분을 저울질하고 있습니다. 그 신분을 규정하는 가장 유력한 기준은 학벌과 돈입니다. 특히나 한국사회는 학벌에 대한 집착이 유별납니다. 그래서 대학 입시를 ‘신분고시’라 부르기도 합니다. 한 인간의 여생을 결정해줄 신분이 대학 입시에서 판가름 난다는 뜻입니다. 명문 대학 출신이 갖는 권세는 조선 봉건 시대의 혈통에 버금가는 위력을 행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목사도 학벌로 얻어진 권세?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교라는 학벌에 근거해 목사직을 수여하니, 결국 목사의 권세는 신학교 졸업장에서 오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정확히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이라는 기준은 현실적으로 실효성을 상실하였습니다. 일단은 신학교 졸업장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했는지의 여부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이유로 적당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라도 다 같은 신학교가 아닙니다. 공식적으로 (세상의 시험인) 대학 입시를 통해 들어가는 신학교와 대학 입시와는 별도로 은혜롭게(?) 들어가는 신학교는 신분상의 차별이 있습니다. 대학입시를 통해 들어가는 신학교 졸업장을 가진 목사들의 권세는 그렇지 못한 신학교 출신 목사들의 권세를 능가합니다. 신분적 우월감과 열등감이 암암리에 그들 사이에 잠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대학 입시로 보증 받은 신학교의 졸업장을 받으려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이미 교회를 개척하여 수년간 사역을 감당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나마 신학교 졸업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평신도라는 명칭으로 또 다른 신분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들은 아무리 공인된 시험인 대학입시에서 서열이 높은 대학 졸업장을 갖고 있어도, 교회라는 울타리 내에서는 대학입시와 무관한 신학교 졸업장 앞에서도 쪽을 못 씁니다. 신학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영역까지도 교회라는 울타리에서는 무조건 신학교 졸업장 끗발이 다른 대학 졸업장을 죽여 버립니다. 하나님의 종인 목사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니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주술에 교회가 세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강대상에서 한마디 외치면 그게 하나님의 말씀과 통해 버리니 누가 감히 토를 달 수 있겠습니까.

 

유대의 제사장이 혈통으로 얻어진 권세였다면 오늘날 교회의 목사는 학벌로 얻어진 권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제도가 주는 권세입니다. 인간의 제도에 근거한 권세에는 재물과 특권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그 비대해진 재물과 특권을 종국에는 세습을 통해 자식에게 대물림하려는 성향을 띠게 마련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역시 이러한 속성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사람을 섬기는 게 아니라, 아버지 목사가 이룩한 교회가 제공하는 혜택을 누리기 위해 목사가 되고, 아버지 목사의 이름으로 그 권세를 대물림 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서히 목사의 가문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평신도)을 향해 ‘네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같이 하는가'라며 따지고 들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유대 사회에서는 평신도였고, 그들의 스승이었던 예수께서도 평신도였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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