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회적인 교회론의 개혁과 회복을 향하여
유 해 무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교의학)
한국교회는 세계 선교 역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만큼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 성장에 대하여 종교학적, 사회학적, 정치적, 문학적인 분석과 해명이 수없이 시도되었으나, 납득할만한 답은 여전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다만 이 성장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런데 이 성장에는 많은 폐단도 뒤따랐다. 물량주의가 교회안에 침투하고, 교회의 부패와 무기력이 나타나고, 성도들이 사회를 개혁하기보다 도리어 수많은 부정, 부패 사건에 연루되어 교회가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고에서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세세히 살피지는 않겠다. 다만 이러한 성장이 과연 공교회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심각하게 제기하려고 한다.
한국 기독교는 세계교회사의 큰 흐름 속에 진행되어온 기독교인가? 아니면 '별종'의 기독교, '아류'의 기독교인가? 우리는 교회론과 예배의 현실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한다. 한국 교회의 성장이 세계교회사의 흐름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공교회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를 향하여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아주 요긴하다고 하겠다.
우리 교회는 이미 선교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수출'하고 있다. 비록 선교에서도 아직 서구기독교의 유산을 따르고 있지만, 이제는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공교회적 이해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는가를 파악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신학은 모름지기 부흥한 교회에서 발전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처럼 크게 부흥한 한국교회가 신학에서도 세계적인 사명을 다해야 하는 당위성을 지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한국교회는 이제 안으로는 대사회적인 책임을 실천하며 창의적이고 독자적인 목회와 신학을 구상하여서 세계교회사에서 마땅히 기여할 힘을 축적하여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교회론과 예배의 문제는 여전히 혼란을 겪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교회론과 예배의 현실은 공교회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을 하면, 한국교회의 교회론과 예배의 현실이 세계 교회사에 나타난 공교회적 보편성 이해와 예배 전통을 제대로 섭취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따져 보아야 한다. "교회는 보편적이라 불리는데, 땅의 이 쪽에서 저쪽까지 세상에 두루 퍼져 있고, 우리가 알아야 하는, 가시적이고 불가시적이며 천상적이고 지상적인 모든 것에 관한 하나의 교리를 보편적이고 완전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 우리는 본고에서 특히 교회론과 예배론의 관점에서 한국 개신교회의 설교와 성례전, 특히 성찬의 현실이 얼마나 공교회적인가를 살피려고 한다. 사실 교회론과 예배의 문제는 성령론에 속한다. 이 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 안에서 성도들과 교회들이 누리는 자유를 이 말로써 설명하려고 한다. 곧 한 성령안에 있는 다양성이 주요한 원리이다. 성도들과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으로써 성령님 안에서 하나 되었기 때문에(은사), 하나 되어야 한다(사명). 이것은 맹목적인 단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각 민족과 지역에 따라서 교회론과 예배에 다양성이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다양성이 막연한 혼란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면면히 흐르는 전통 속에 존재하는 교회들은 서로를 파악할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Ⅰ.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구약의 총회나 회중은 제사를 드리거나 율법을 듣는 예배 공동체였다. 가령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나 성전 낙성식을 할 때와 같이 예배를 위하여 모인 이스라엘 백성이나 예루살렘에서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책을 읽을 때 모인 이스라엘 백성을 회중이라고 말한다(신 5:22; 왕상 8:22; 느 8:2). 이처럼 총회는 야웨의 부름을 통하여 형성된 무리이며, 야웨의 총회 또는 회중이다(민 16:3; 신23:2 이하, 9; 대상 28:8; 느 13:1; 미 2:5; 민 27:17; 31:16; 시74:2). 야웨는 부름에 응한 회중 가운데 계신다(민 16:3). 회막이나 성전을 중심으로 모일 때, 야웨는 거기에 임재하신다.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만나시고 말씀으로 당신을 계시하신다(시내산).
구약은 이스라엘을 백성이라고 하여, 이방 족속들 구별한다. 백성이란 말은 사회적 명칭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음을 표시하는 말이다(출 19:5; 신 14:2, 26:19).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여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고, 그들은 언약 백성이 되었다. 이처럼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한 섬김과 예배에서 회중, 교중이 된다. 예배에는 번제와 화목제 같은 제사가 있었다(수 22:27). 레위인들이 이 예배의 임무를 맡았고(민 8:11), 제사장들이 이 예배를 담당하였다(대하 35:10;10-16). 특별히 유월절 예식이 예배로 지칭되기도 하였다(출 12:25 이하;13:5). 이 예배는 회막에서 수행되거나(민 :33,35,39,43; 8:24, 18;4,33 등). 하나님의 전 또는 집(느 10:33; 대상 23;28,32, 25:6 등)에서 드려졌다.
이 예배라는 말은 이방신에 대해서는 결코 쓰여지지 않았다. 이처럼 구약에서는 예배를 위하여 모인 백성의 집단을 총회 또는 회중이라 불렀다. 칠십인역에서는 회중을 회당이라 번역하여 유대회당을 지칭하였고, 신약에서는 교회가 총회의 역어로 자주 쓰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구약의 총회의 유비를 따라서 승천하신 주님이 교중의 고백을 기초로 구체적 장소에 임재하심을 알고 있었다. 교중을 예배 집단으로 볼 때, 그 중심은 말씀과 성찬이었다(행 2:42, 20:7-11).
"교회는 예배 중에서 예전적 모임으로서 존재할 뿐 아니라 영속적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성전에서는 제사를 드렸고, 회당에서는 율법을 강해하였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 당시에 예배가 분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대교회는 양자를 결합한 예배를 드렸다. 즉 제사로 예표된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성되었기에 굳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명한 주의 만찬을 말씀과 더불어 기념하였다.
그런데 양자의 조화는 깨어지기 쉬웠다. 말씀과 성례, 특히 성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강조되느냐에 따라서 교회와 예배의 성격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고대 교회에서 교회는 성례와 직결되어 있었다. 이그나티우스(?~110년 경)는 감독 없이는 세례, 성찬이나 애찬등 교회와 연관된 어떤 일이라도 행하지 말 것을 강변하였다. 즉 감독이 있는 곳에 교중도 있으니 성례를 집행하는 감독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뒤에 유스틴(100~165)은 고대 교회가 매주 일요일에 회집하여 사도들의 비망록과 선지자들의 저작들을 읽고, 인도자가 교훈과 권면을 하고, 성찬에 참여한다고 지적하였다. 물론 기도와 감사와 구제헌금 등에 관한 언급도 있지만, 예배를 구성하는 중요한 두 요소는 설교와 성찬이었다.
교회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이미 상당히 일찍부터 로마에서는 설교가 예배에서 배제당했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설교가 여전히 시행되었다. 중세에는 보이는 말씀이 아니라 제사로 드리는 미사가 설교를 점차 배제하였다. 말씀과 성찬의 균형이 깨어진 것이다. 설교는 13세기의 탁발 수도사들의 순회 설교나 독일 권면 신비주의의 설교에서 명맥을 잇고 있었다. 이 때부터 한편으로는 설교가 더 이상 교회의 예배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속하지 않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찬이 배제된 설교 중심의 회집이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개혁자들은 성령님과 말씀위주의 예배론과 교회론을 정립하였다. 루터는 말씀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진실로 유일하고 항속적이고 무오한 교회의 표지는 항상 말씀이었다.…이 복음이 신실하게 설교되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존재한다.…말씀이 있는 곳마다 듣는 자나 가르치는 자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 …그러므로 말씀이 아닌 다른 표지들을 짜내는 교회는 오류를 범한다." 즉 말씀 사역은 성령님의 사역이다.
성령님은 말씀을 방편으로 삼아 우리 각자뿐 아니라 교회를 부르신다. 성령님은 복음의 방편, 곧 설교를 사용하여 교회를 세우신다. 성령님은 교회를 불러 모으며 복음을 통하여 '나'를 부르신다. 이처럼 교회는 복음을 통하여 모이고, 복음 때문에 회집한 무리이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나고, 성장하고, 유지되고, 강해진다. 교회의 모든 생명과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표지에 의해서 교회를 아는가? 여러 가시적 표지가 주어질 필요가 있는데, 그 표지를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다. 우리가 가진 표지는 세례와 성찬과 모든 것보다 강한 복음이다. 이 세 가지는 기독인들의 표지와 보물과 특성들이다.
그때는 어디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세례와 성찬과 복음이 있는 곳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로 만드신다. …복음이 있는 곳에 같은 신앙, 같은 소망, 같은 사랑, 같은 성령이 있고, 모든 것들은 그 속에서 동일하다. …복음은 성찬과 세례에 앞서는, 유일하고 가장 확실하고 가장 고귀한 교회의 징표이다.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교회는 배태되고, 형성되고, 자라나고, 생산되며, 배우고, 길러지고, 옷입고, 장식되고, 강해지고, 무장되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듯이, 폐일언하고, 교회의 모든 생명과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나는 기록된 복음이 아니라 발성된 복음에 대해서 말한다." 루터는 방편 중에서도 말씀을 가장 중요한 방편, 가히 유일한 방편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면서도 말씀과 성령님, 설교와 성령님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리하고 있다. 칼빈은 교리로 교회를 설명한다. "교리는 교회의 영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순수한 음성이 울려퍼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 고백에 머무는 곳마다, 그 말씀을 정상적으로 듣고 진보하려고 애쓰는 곳마다 의심의 여지없이 교회는 있다.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형제의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이어주는 고리이다. 교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을 우리 앞에 열어서 당신을 부르게 하신다. 그리고 성찬은 교리에 대한 확증으로서 부가되었다. 기도는 공중 기도이다. 이 공중기도는 신앙의 고백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개혁은 교리로서의 말씀을 강조하였다. 이것을 볼 때 개혁은 결국 제도나 의식 이전의 교리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교리의 관점에서 예배의 주요한 순서들이 해명되고, 교리를 중심으로 예배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교회의 터는 교리이다. "이 터가 여기서 교리로 취해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울은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자들, 곧 당신의 교회를 세우도록 하나님이 임명하신 자들을 언급한다. 바울은 교회의 신앙이 이 교리 위에 기초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원래 진짜 유일한 터는 홀로 온 교회를 지탱하시고 신앙의 규범과 잣대인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교리의 설교를 터잡아 간다." 이 터로서의 교리에 대해서 칼빈은 아주 고상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만약 교회의 기초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교리라면, 그 교리에 의하여 신자들은 그들의 구원을 오직 그리스도 안에 두라고 명령받는다면, 그 교리를 치워라. 그리하면 어찌 건물이 계속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칼빈은 교리를 강조하면서, 교리가 교회를 이루며, 예배의 핵심임을 거듭 강조한다.
이와 같이 교회와 예배의 상관관계는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예배의 구성요소는 설교, 고백, 찬송, 기도와 두 성례이다.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가 은혜의 방편이 되어서 교회를 모으는 곳에 교회는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설교되며 청종되며, 성례들이 그리스도의 제정을 따라 집행되는 것을 우리가 보는 곳마다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교회는 존재한다." 그러기에 은혜의 방편이 시행되는 예배 자체가 교회를 교회로 만드는 계기라 하겠다.
예배를 통하여 교회는 회집한다. 제도적으로 보자면, 예배는 교회가 공적으로 조직하여 교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개방되며, 그들에 의하여 드려진다. 그러므로 이 예배는 교회를 이루는 개별 신자들의 개인 기도, 심지어 교회 내의 선별되거나 자발적인 무리, 곧 길드나 회(guilds or societies)와도 구별된다. 고대교회에서 성찬이 예배에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비세례자를 성찬식 자체로부터 배제하는 배타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이 점에서 예배는 교회사의 초기부터 공적이라기보다는 사적(私的)이었다고 하겠다.
비록 성전에서 모였지만, 초대교회 신자들이 성전에서 성찬을 공개적으로 거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다락방처럼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사저(私邸)가 성찬을 겸한 예배의 처소로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집에서 떡을 뗐다"는 말의 의미이기도 하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에서 행하는 제사 중심의 예배와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율법을 강해하는 예배 형태가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개혁이 중세를 대항하여 말씀 위주의 예배를 강조하게 되었을 때 회당의 율법 강론 중심의 예배와 맥을 같이 하는 '우연'의 일치를 보였다는 것이다.
16-17세기에는 설교와 성찬이 동시에 왕성하였다고 말할 수는 있다. 비록 설교가 성찬을 위축시키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칼빈은 성례를 복음의 부록이라고까지 불렀다. 게다가 개혁자들은 예배의 근원과 원리에 대하여 깊이 있는 역사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들이 회복하려던 고대교회의 예배에 대한 지식은 초보적이었고 불완전하였다. 그래서 엄청난 영적 부흥의 시기에 이 열기를 유감없이 표현 할 수 있는 예배의 형태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대체적으로 개혁자들의 예배학적 성취는 부정적이다. 이 점은 성찬과 직분에서 두드러진다. 사제가 제사인 미사를 집전하는 것과는 달리 목사가 성경에 기초하여 행하는 설교가 예배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예배가 지나치게 말씀과 들음에 치우치고 성찬은 간헐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이 예배학에 끼친 영향은 시편찬송을 제외하고는 창의적인 면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Ⅱ. 설교와 설교자개혁자들은 말씀을 제일 중요한 은혜의 방편으로 강조하였다. 따라서 개신교회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우리는 이것이 로마교를 대항한 개혁자들의 올바른 기여임을 알고 있다. 칼빈은 감히 설교자가 하나님의 창조사역보다 더 크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로의 회개가 사람들을 영적 생명에로 회복시킬 때, 이 회개는 하나님의 고유한 사역일 뿐 아니라, 사실 인간의 창조 그 자체보다도 더 위대하다.
이렇게 볼 때 말씀의 사역자들은 하나님과 동등하다 하겠고, 하나님이 창조주인 한 그들은 하나님보다 위에 있다 하겠다. 즉 하늘 생명에로의 중생은, 죽을 존재로 땅에 태어나는 것보다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설교 사역을 맡은 목사는 항상 경성하면서 이 책무에 신실해야 한다. 칼빈은 디모데 전서 3장 15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목자직의 중요성과 가치를 찬양하고 있다.…바울은 목자들에게 직무의 위대성을 해명함으로써 어떤 신실성과 근면과 경의로써 이 일을 수행해야 하며, 동시에 실수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인 진리에 해를 끼치면 어떤 징벌이 기다리고 있는가를 상기시키려고 한다. 이 생각은 목자들에게 그들이 맡은 과업이 얼마나 황공한 것인가를 일깨우며, 그들을 낙망시키지 않고 큰 경계로 촉구한다. …사역으로서 진리가 보존되고 선포되니까,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다.
하나님은 진리를 공표하시려고 매일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오거나 천사를 보내시지 않고, 이 목적을 위하여 책봉한 목자들의 수고를 사용하신다. 교회가 말씀으로써 성도들을 새 생명에 이르게 하고, 평생 동안 그들을 가르치고, 양육하고, 강하게 하고, 결국 철저한 완전에로 인도하기 때문에, 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가 아닌가? 또 교회의 손에 쥐어져서 교리를 집행하는 직분은 진리를 보존하는 유일한 방편이다.
결국 이 칭찬은 말씀의 사역에 해당된다. 이 사역이 옮겨지면 하나님의 진리는 넘어진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니까, 설교없이는 신앙도 있을 수 없다. 인간에 대해서 교회는 진리를 보존하는데, 설교에서 교회는 진리를 순수하고 완전하게 보존하며 다음 세대에 전수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교리가 울리지 않고, 설교를 통하여 진리를 어두움과 망각으로부터 보호하는 경건한 사역자들이 없다면, 거짓, 오류, 협잡, 미신, 각양 종류의 부패가 극성을 부릴 것이다.
교회안의 침묵은 진리에서 떠남이요 억압이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이 위대함으로부터 목자들은 이 직분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큰 자각과 경의를 가지고 전무하여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과 교리를 잘 살펴서 자신과 청중을 구원해야 한다(딤전 4:16). "디모데에게 교회를 구원하는 일이 주어졌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즉 하나님을 위하여 획득된 것마다 다 구원을 받는다. 게다가 우리는 복음의 설교를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회집하기 때문이다.
목사의 부실과 나태함이 교회에 치명적이듯, 교회의 구원이 목사의 신실함과 근면성에 둘려지는 것은 지당하다. 하나님만이 구원하시고, 그의 영광의 호리라도 인간에게 돌려지지 않는 것이 진리이다. 그러나 구원을 수여함에서 사람들의 수고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은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만이 구원의 주인이시지만, 이 사실은 인간의 사역을 배제하지 않으며, 인간의 사역은 구원의 방편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 사역에 교회의 순결이 달려있기 때문이다(엡 4:l1)." 그래서 목사를 하나님의 대리자와 대사로 본다. 이처럼 말씀의 사역자인 설교자에게 큰 존경과 책임을 동시에 요구하는 전통은 한국교회에도 있다. 한국교회 안에서 목사가 받는 대우는 그의 일, 곧 말씀의 사역자라는 직무에 관련된 것이다. 이 대우가 결코 나쁘지는 않다. 토요일에는 목사님을 방문하거나 전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행동규율도 교인들이 말씀에 대해 가진 태도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변화가 왔다. 이 변화는 대체로 설교자들이 일으켰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이전에는 목사가 어떤 일이 있어도 강단만은 꼭 지킨다는 말이 상식이 되어 있었다. 이 말은 목회에서 설교가 지닌 위치와 설교자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목사나 강도권이 있는 자가 아닌 사람이 강단에서도 되는 풍습이 한국교회 안에 도입되더니, 이제는 열린 예배의 도입과 더불어 설교의 위치가 위협을 받고 있다.
과연 아무나 설교하여도 되고, 예배의 어떤 순서로 말미암아 설교의 위치가 강등되거나 위축되어도 되는가? 그렇다면 이미 개악인 개혁의 예배가 더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많은 교회들이 미자립의 형편일 때는 신학생이나 여전도사들이 설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해당 당회의 지도를 받아야만 했다. 영적 교리에 대한 책임과 감독은 당회의 주요한 소관사이기 때문이다.
주일학교에서 목사 아닌 사람들이 설교를 할 때도 당회의 감독하에 있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런데 이런 불가피한 경우나, 당회의 감독을 받는 정당한 경우와는 달리, 한국교회 안에는 목사 아닌 사람들이 강단에 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동안 유행했던 부흥회가 진원지라 하겠다. 이전에는 각 교단마다 강단에 설 수 있는 설교자의 교단 소속을 제한하였다. 그러나 교회 건축이나 교회성장이 주안점이 되면서 헌금을 잘 걷게 하거나 교회성장에 일가견이 있는 부흥사나 강사를 앞을 다투어 세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신중하게 강사를 선정하기도 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장로교 강단에 감리교나 성결교 목사를 세우는 일이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교회 연합회 집회에 교파를 불문하고 강사를 섭외하는 풍습이 생겼다. 이를 지도하는 상비부가 있을 텐데도 목사들이 감독을 소홀히 하거나 백안시하고 있다. 설교자의 교회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초청하는 습관은 설교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리하여 설교자가 아닌 사람이 간증형태로 강단에 서는 경우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이제는 이들이 성경을 읽고 설교를 모방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전에는 헌신 예배에 대개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성장의 바람과 함께 전도특강, 교회교육, 기독교 교육, 기독교 윤리, 농민교육, 남북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신자들이 강사로 초청되었다. 설교자가 아닌 사람들이 저녁예배뿐만 아니라 때로는 주일 낮 예배에도 서는 경우도 있다. 이런 식으로 한국교회 설교단은 공교회적인 전통을 벗어나고 있다.
만약 이런 사람들도 강단에 설 수 있다면, 정규신학교육을 통한 목사 양성은 왜 필요한지 근본적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다. 개혁의 예배학에 미흡한 점이 있다면 그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야 할 터인데, 도리어 개혁이 남겨준 중요한 유산인 교리에 관한 확고한 입장조차도 한국교회는 바로 인식하고 지켜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강단에서 행하는 것이 설교가 아닐진대, 간증이 설교를 대신하여도 되는가를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간증이 설교를 대신하는 이 상황은 설교의 위기상황이다. 누구라도 '은혜'를 끼칠 수만 있다면 강단에 세우고 개방한다면, 강단이 쇠멸할 가능성은 크다. 이 은혜는 '감동'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을 터이다. 물론 간증을 무조건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있는 예배를 먼저 드리고, 2부로 간증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설교가 배제된다면, 예배가 아니라 단순한 집회일 뿐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이 모든 집회를 '예배'라 부른다. 물론 이것은 한국교회의 일상적인 언어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누가 하든지 간에 '예배'라 부르는 습관은 상당히 일찍 한국 교회 안에 정착하였다.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즐거이 묵상하고 그 말씀에서 위로를 받고 그대로 살아가려는 것은 아주 좋은 풍습이다. 우리는 이런 좋은 풍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목사나 설교자는 교회의 각양 집회와 잦은 심방을 통하여 세계 어느 교회의 목사들보다 더 빈번하게 말씀을 읽고 가르쳐야 하는 짐을 지고 있다. 이것은 정작 더 많은 기도와 준비시간을 쏟아야 하는 주일 예배의 설교 준비를 부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주일 설교는 모든 교인을 향하여 하는 설교이기에 설교자는 이 시간을 통하여 성도들의 영적 양식을 제공한다.
그리고 교인들은 설교에 은혜를 받고 풍성하게 먹어서 엿새동안 힘차게 일할 수 있는 영적 양식을 제공받는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관례화된 설교가 과연 은혜의 방편이요 교회의 표지라 할 수 있겠는가? 은혜의 감동은 다르기에, 은혜가 없으면 영적 기근을 직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목사들은 설교를 강화하기보다는 도리어 전달방식에 주안점을 두어 듣기 쉽고 편한 설교를 개발하고 유포하고 있다.
이벤트처럼 부담없고 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설교와 예배가 유행을 타고 있다. 이런 설교자들이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표본이 되어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가 수년동안 인기리에 개최되고 있다. 자신들의 목회와 설교 방식을 파급시키고 그들의 목회와 설교를 귀감으로 삼으려는 이들의 관심사가 합하여, 정규신학교육을 부끄럽게 할만큼 신학과 목회의 사교육 현장이 확산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신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는데, 이들의 시도는 현장 교육이라는 단순한 의도를 넘어 신학 교육 자체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반면에 설교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는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신학교육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태에서 신학교는 정규신학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크게 자성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설교의 대상 이해에서도 분명하지 않다. 전도적인 상황인 사도행전에서는 전도와 설교가 잘 구별되지 않는데, 이런 상황을 한국교회는 여전히 계승하고 있다. 항상 전도하는 교회의 전통이 있기에 설교자는 설교에서 예배에 참석중인 불신자의 존재를 의식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예배 중에 전도가 아니라 교인들을 향한 설교를 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제는 설교가 만담이나 훈계조의 연설이 되고 말았다. 준엄하게 지옥과 영벌까지도 말하는 이전의 전도/설교는 사라지고, 예수를 믿는 것이 영육이 축복을 받는 현세지향적인 전도/설교로 바뀌었다.
이 결과로 명목상의 신자들이 양산되었다. 신자의 수가 증가하고, 교회당이 곳곳에 웅장하게 건립되고, 각종 대규모 집회가 개최되고, 명망을 지닌 직분자들도 많아졌지만, 교회와 교인들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보다는,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교회가 탈법을 자행하고, 신자라는 이들이 각양 부정과 부패의 주범으로 구속되는 모순이 속출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설교의 위기로 해명할 수 있다고 본다.
전도/설교나 훈계는 은혜의 방편인 설교를 대신할 수 없다. 은혜란 세례명령(마 28:19)에서 나타나듯이 삼위하나님과의 교제이며, 삼위하나님과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은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지칭하기도 하는데(고후 13:13), 이 은혜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며(요 17:23), 성령의 사역에 연결된다(요15:26). "은혜 또는 은사는 삼위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가 주신다. 그러나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은혜를 주시듯이, 우리 안에서 은사의 교제는 다만 성령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이 성령의 참여자가 되었기 때문에,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와 성령의 교제를 소유한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처럼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하고, 구체적으로 성령의 사역으로 지적된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여기서는 사역자와 방편들이 동시에 언급된다. 사역자든 방편이든 성령의 도구이며, 성령을 떠나서는 힘을 잃는다. 은혜의 방편인 설교도 하나님을 지향할 때 방편이 된다. 하나님은 설교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사용하는 길을 연다.
이와 같이 설교의 자리는 높은 곳에 있다. 우리는 이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형편을 돌아보면, 설교가 은혜가 아니라 단지 감동을 주는 수준으로 전락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설교 본래의 임무를 강조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성경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며,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도 설교의 주인도 삼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이후에 나타나는 설교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이었다. 그리스도의 이 사역의 배경은 구약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의 구속사역이다. 이 구속사 위에서 개별신자와 교중을 위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구속사의 하나님이 설교의 내용이며 주인이시고, 이 구속사 위에서 윤리적 권면이 가능하다.
말씀 사역자의 권위는 말씀 자체에 있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에서 설교자의 권위는 추락하였는가? 설교자들이 정말로 올바르고 성실하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가? 왜 많은 목회자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혼란의 일차적 책임은 목회자들에게 있다. "목사들에 대한 평가절하에서 말씀에 대한 경멸이 배태된다." 말씀이 왕성하게 전해지지 않고 설교의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목사들은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하며, 자신들을 파송하신 주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설교의 위기에 있고, 설교의 위기는 목사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목사들은 자신들이 받은 이 절대적인 책무를 얼마나 신실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항상 살피면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능력있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항간에서는 어떤 이들이 '만인 제사장직'을 이용하여 목사들을 대항할 뿐만 아니라 목사직에 대해서 의도적인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즉 만인 제사장직을 근거로 누구나 설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이미 우리 속에 상당히 깊게 침투하여 있는 듯하다. 그러나 만인 제사장직의 원래 뜻은 그게 아니다. 루터는 베드로전서 2:9을 인용하면서, 세례에 의하여 우리 모두는 제사장이 된다고 했다.
그는 말씀선포, 세례, 성찬집행, 열쇠권, 중보기도, 제사, 교리와 영들의 구별 등을 만인 제사장직의 내용으로 언급한다. 그리고 말씀 선포의 특별한 형태가 사죄선언이다. 이처럼 루터가 말하는 만인 제사직은, 세례에 기초하여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형제에게 영적 조언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목사는 이웃이요 형제이다. 이 이론은 신분이 아니라 봉사를 부각시키고, 특권이 아니라 의무를 부각시킨다. 이 이론의 의도는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계급으로서의 제사장의 중재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와 개혁자들은 '절대적인' 만인 제사장직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인 것은 옳다. 그러나 모두가 목사는 아니다. 그가 신자요, 제사장이라는 사실 위에 직분과 위임받는 교구도 가져야 한다. 소명과 위임이 목사와 설교자로 만든다." 비록 말씀과 성례 집행권이 교중과 전체 교인들에게 주어졌다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이 권을 스스로 행할 수는 없다. 먼저 청빙을 받아야 하고, 교중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 교중은 특정인을 말씀과 성례집행을 위하여 청빙한다. 이처럼 루터는 만인 제사장직으로부터 이 특별한 직책 곧 목사직을 도출한다. 쯔빙글리도 로마서 12장에 기초하여 만인 제사장직을 주장하지만, 우리 모두는 사도나 감독이 아님을 동시에 말한다.
칼빈도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모두 제사장들이라 말한다. 그러나 소명없이 교회안에서 공적 직분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것도 강하게 주장한다. "하나님의 사도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믿는 만인들을 참으로 제사장들이라 불렀지만, 목사직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신자들이 왕과 제사장들이 되었기 때문에 영적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따라서 제사장직과 목사직에는 큰 차이점들이 있다. 우리가 지금 말했던 바와 같이 제사장직은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으로 있는 것이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교황제도의 사제직을 추방시켰을 때, 교회의 설교사역까지 철회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이 개혁자들은 로마교를 대항하여 만인사제직을 주장하였지만, 청빙을 통한 목사직의 독특성을 희생시키지는 않았다. 목사는 만인제사장들과 달리 아주 독특한 직무를 부여받았다. 즉 사도들로부터 주어진 전통을 전수받아, 그것을 잘 간직하며, 훼손됨이 없이 잘 간수하는 파수의 사역이 그들에게 부여되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부탁한 것을 지키라고 권면한다(딤전 6:20). 이 부탁 받은 것은 목회자 디모데가 지켜야 할 것이고, 동시에 주님께서 그것을 지키신다(딤전 1:12, 14).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파수한다는 것을 뜻한다.
디모데는 바울로부터 교리를 전수받았다. 그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교리를 잘 파수하여서, 충성된 자들에게 부탁하여야 한다(딤후 2:2). 목사들은 만인제사장직과 같은 다양한 이유들이 빌미가 되어 강단이 위협받고 있는 이 빈궁한 상황을 말씀을 잘 파수함으로써 은혜의 방편이요 교회의 표지인, 자신들에게 맡겨진 설교 사역을 올바르게 수행해야 한다. 목사들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겔 3:18; cf. 행 18:8)는 하나님의 지엄한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목사들에게 교회 위의 권위를 주셨다. Ⅲ. 성찬고대 교회에서 예배의 절정은 성찬, 곧 '주의 만찬'(고전 11:20)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는 '유카리스티아'가 성찬 전체를 지칭하였다. '유카리스티아'는 성찬 전에 행하는 감사기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성찬은 매주 시행되었다. 주님은 잡히시던 밤에 성찬을 제정하셨다(고전 11:23). 바울이 이 최초의 성찬을 유월절 식사였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유월절 식사 중에 제정하셨음은 분명하다(막 14:12이하). 어떤 이들은 유대인의 공동 식사 풍습'chaburah')에서 그 기원을 찾으면서 성찬이 교제의 식사였다고 본다.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 중에 새로운 식사, 곧 성찬을 제정하셨다. 통상적인 유월절 식사에는 없는 절차였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에는 분병(分餠)과 분잔(分盞) 사이에 식사가 있었다. 예수님은 먼저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다(고전 11:24). 그리고 식사가 나왔는데, 이것은 애찬을 말한다. 그리고 잔을 주셨다.
그러나 세월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식사를 마치고 성찬을 시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찬은 상당 기간 계속되었지만 점차 소멸하였고, 성례로서의 성찬만이 남게되었다. 이처럼 예수님은 유월절 풍습을 그대로 취하지 않고 특정 요소만을 취하면서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셨다. '너희를 위하는'(고전 11:24)이라는 말은 속죄의 죽음을 말하는데, 화목과 대속을 뜻한다. 잔은 당신의 피를 말하는데, 새 언약 곧 새 언약의 백성을 이로써 세운다. 우리는 당신을 기념해야 하는데, 이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찬에 임재하시는 당신을 기념하라는 말이다.
특이한 것은, 몸과 피가 비교되지 않고, 몸과 언약이 서로 비교되면서 언약에 대한 부가 설명으로 피가 나온다는 것이다(고전 11:15). 마가복음에서는 '언약의 피'(막 14:24)라고 하여서 몸과 피가 비교되고 있다. 대속적 죽음과 새 언약 설립이 중심에 서 있고,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통한 교제의 의미가 부각되고 있다.
이처럼 성찬에는 교제의 의미도 있지만 성찬이 지니는 일차적 의미는 대속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자기를 주심에 있다. 축복의 잔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이요, 성찬떡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 몸을 이루는 일이다(고전 10;16-17). 우리는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주의 상에 참여한다(고전 10:21).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접붙혀지며, 그리스도의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가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서로 연합하여 한 몸, 곧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룬다.
그래서 고대교회에서는 큰 떡을 각자가 조금씩 떼므로 그리스도의 한 몸의 연합을 모든 신자들이 가시적으로 보게 하였다. 그러나 화체설 따위의 이론이 득세하면서 이런 관습은 폐지되었다. 고대교회는 성찬을 행하려고 모였다.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구교의 미사가, 비록 왜곡되긴 하였지만, 바로 이 점에서 고전적 형태의 예배를 계승하고 있다고 하겠다. 고대 교회의 예배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사도들의 편지와 예수님의 어록을 읽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첫 부분과 세례교인들만 남고 다른 참석자들은 회집 장소를 떠난다.
고대교회는 세례를 받은 교인들만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을 고수하였고, 성찬의 시행이 그만큼 엄숙하였다. 여기에는 성찬에 대한 아주 올바른 이해가 전제되어 있다. 성도들은 성찬 참여로 교회가 된다는 근본적인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세례와 성찬이 시행되는 곳이 가히 교회이다. 그러므로 특정 계층이나 교회 안의 어떤 집단이 모이는 것은 교회라고 하지 않고 단순한 회집라고 하였다.
주후 3세기까지 해도 교회는 교회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엄숙한 예배 회중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물론 기도회나 애찬을 위하여 일단의 신자들이 모이기도 하였으나 이런 모임은 교회가 아니라 회집이라 불렀다. 개혁은 성례 위주의 교회관과 예배관에서 말씀을 우선시켰다. 결과적으로 말씀은 강조되었지만, 성례, 특히 성찬이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칼빈은 매주일 성찬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제네바 시 당국이 반대하여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원치 않았으나, 분기별로 세례를 거행하였던 쯔빙글리의 입장을 따른 양상이 되었다. 쯔빙글리는 성찬을 은혜의 방편으로나 예배규범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루터와 같이 성찬을 교제의 관점에서 접근하였으나, 이 또한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다. 그의 기념설은 종교개혁의 예배학 가운데 가장 부적절한 것이다. 이 전통이 미친 가장 큰 악영향은, 성찬을 주일에서 분리시켜 주일 예배 규범이 아니라 부정기적으로 지키는 기념으로 보게 한 것이다.
한국교회도 이 점에서 칼빈의 견해가 아니라 쯔빙글리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고 하겠다. 게다가 미국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성례를 경시하는 풍조가 생겨났고 특히 성찬에 대해서는 기념설에 가까운 태도를 따르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와중에 교회가 성장하니 성찬을 의미있게 행할 수 없게 되었다. 세례와 성찬이 빠져 있는 예배, 말씀 중심의 예배에서 감독 중심의 간증이나 훈계풍의 설교가 지배적인 한국교회는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무시하고, 별종의 교회 전통을 형성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보이는 말씀인 성례가 없는 복음 설교는 불완전하고 실로 크게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무역사적(無歷史的)이고 무전통적(無傳統的)인 교회는 비록 성장한다고 하더라도 공교회적인 교회사의 본류에 진입할 수도 없고, 이어지는 세계교회사에도 기여할 것이 많지 않다고 하겠다. 성찬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는 교회를 교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중요한 전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 교회는 가히 말씀만이 있는 교회를 정착시켰다. 이전에는 목사의 수가 적었기에 성찬 시행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사가 많은 이때에도 이런 잘못된 습관을 고수하는 것은 공교회적 안목이 결여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말씀만 있으면 교회라 부르는 습관에 젖어 있다보니 성찬의 의미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성찬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교회를 교회로 부르지 않는 용단도 갖고 있지 못하다. 성찬이 바로 시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씀까지 약화된 교회의 장래는 예견할 만하다. 한국 교회 안에는 성찬을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만을 기념하는 추도식 정도로 지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물론 우리는 당신의 죽음을 기념한다. 그러나 우리가 당신의 죽으심으로 당신이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하는 것 이지, 죽은 주님만을 기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었을 뿐 아니라 부활하신 그 주님이 성찬에서 임재하면서 우리와 더불어 교제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거의 부각되지 않는다. 이 성찬이 지닌 종말론적 재림 대망은 더더욱 무시되고 있다. 한 몸에 참여함으로써 한 교회를 이루고, 한 몸이 되었다는 교제에 대한 이해는 아주 천박할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성찬 시행을 강행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별도의 회집에서 성찬을 시행하는 일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는 교회의 불충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성찬을 시행할 수 있는 교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정 회집이 성찬을 행하면서 주님의 몸을 훼손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교회의 불충 때문이다. 교회가 이 점에서 개혁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이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은 교회를 바로 개혁하는 동력이 될 수가 없다. 게다가 신학대학원과 같은 모임에서 성찬을 시행하자는 주장은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할 뿐이다. 신학대학원은 일차적으로 예배공동체가 아니다. 교회를 위하여 장래의 목사를 양성하는 목적을 가진 기관이지만,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는 기관이기에 신학대학원은 교회의 표지를 지니고 있지 않다.
성찬은 교제이기 이전에 대속의 죽음을 기념하고 언약의 새로운 백성임을 체험하는 성례이다. 이는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지, 교회 바깥까지 확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크게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고대 교회의 교회론이 비극적으로 상실된 현대의 교회들과는 달리, 특별히 아동이나 학생들이나 특정부류를 위해 시행되는 성찬은 없었고, 사적(私的)으로나 개인적으로 시행되는 성찬도 없었다. 이러한 일은 예배, 즉 같은 도시의 모든 신자들을 위한 '공무(公務)'였던 성찬의 공교회적인 성격을 정면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 성찬 공동체는 그 구성에서 공교회적 공동체인데, 이 말은 이 공동체가 계시와 실재적인 인(印)인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그대로 사회적 구분뿐 아니라 자연적 구분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 이처럼 예배의 본래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씀과 헌금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예배요, 따라서 성찬도 가능하다는 식의 주장은 공교회성과 교회 역사를 고려하지 않은 신중하지 못한 발언이다. 범교단 모임에서 성찬을 행하는 일도 자제해야 한다. 교파는 그리스도의 몸을 나눈 범죄행위이다. 이 분열의 죄를 먼저 자백하고 한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그것을 위한 모임이기 때문에 성찬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연합의 촉진제나 교제를 위한 성찬을 행한다는 것은 성찬을 주신 원래의 목적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성찬이 교제를 확인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는 아니다. 하나가 될 때까지 성찬 참여의 기쁨을 미루어야 한다. 약혼한 젊은이들이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지키는 것처럼 말이다. 나아가 여기에는 교회론의 문제가 끼어들어 있다. 분열을 야기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니지만, 개혁의 근본 관심사가 교리였는데, 교리가 다른 교단 대표들과 한 성찬에 앉는 것은 일관성 없는 조급하고 경망스러운 행위이다. 상이한 문제들을 인내를 가지고 서로 논의하면서, 다 함께 형제와 자매로 같은 성찬상에 앉을 날을 앞당기기 위해 노력을 더 많이 경주해야 할 것이다. Ⅳ. 결론한국교회는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한국 교회는 유래 없는 성장과 부흥을 이루었다.
그러면 이런 것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사의 흐름과 신학의 본류에 진입할 수 있는가? 이것은 공교회성을 확립하려는 자세와 연관되어 있다. 제 아무리 교회가 성장하였다 하더라도 '별종'의 기독교 또는 '아류' 기독교라면 세계교회와 교회사에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의 교회됨은 교회의 표지요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성례의 올바른 이해와 시행에 달여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13세기 탁발수도사들의 주도로 설교가 예배에서 독립되었고, 종교개혁 시대에는 쯔빙글리에 의하여 성찬이 없는 예배가 도입되었다.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 있는 한국개신교회는 성례보다는 말씀을 강조하는 전통을 세웠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교회에서 말씀 선포는 성경과 교회사의 본류에서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설교자의 자세나 설교자의 권위도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성례, 특히 성찬에서도 많은 문제점들이 노정(露呈)되었다. 종교개혁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성례집행의 빈약성을 회복하기는커녕, 성례자체가 귀찮은 것으로 푸대접을 받고 있다.
교회사에서 설교와 성례, 특히 성찬은 예배를 이루는 중요한 두 요소들이다. 그러니 설교와 성례의 위기는 예배의 위기라고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리고 예배의 위기는 곧 교회의 위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교회의 개혁은 예배의 개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개혁을 위한 선결 과제이다. 예배의 개혁은 말씀의 회복과 성례의 올바른 개혁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한국에는 말씀만 있으면 예배라는 쯔빙글리식의 천박한 의견이 널리 퍼져 있는데, 성례 특히 성찬의 회복을 통하여 올바른 교회를 확립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점에 서 있다. 예배의 올바른 회복은 성경적이고 공교회적인 교회론을 회복하는 정도(正道)요, 목회와 신학과 신학의 자립을 이루는 첩경이라고 하겠다. 말씀과 성찬이 함께 시행되는 고전적 형태의 예배 회복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이지만, 교회의 표지와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성례가 각각 회복되는 것이 선행하여야 할 것이다. 새 사람과 교회를 창조하는 말씀 선포, 이 새사람의 탄생을 공개적으로 축하하는 세례식, 죽었으며 부활하셨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참된 교제를 가지도록 하는 성찬이 더욱 엄숙하면서도 잔치를 방불하는 것이 되도록 새로운 이해와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사의 공교회적 본류에 진입한 교회만이 세계 교회에 목회, 신학, 선교적 사역에서 기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이드 죤스-우리를 굳세게 하는 것은 진리 뿐이다 (0) | 2008.06.27 |
---|---|
옛 군생활의 추억 (0) | 2008.06.26 |
로이드 죤스-영들을 시험하는 방법 (0) | 2008.06.26 |
로이드 죤스-티와 들보 (0) | 2008.06.25 |
로이드 죤스-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0) | 2008.06.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