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가 잠깐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27권 가운데 가장 해석하기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는 본문입니다. 더욱이 16세기에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났을 때 에라스무스라든가 루터라든가 쯔빙글리라든가 이런 사람들은 계시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계시록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그다음에 성경 전체에 대해서 주석서를 썼던 캘빈도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오랜 세월 동안 정통 크리스천들과 신학자들이 요한계시록을 점점 멀리하게 되면 될수록 이단들은 이 요한계시록을 가장 사랑하는 본문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상반된 두 극단의 반응이 있었는데 18세기 이후에 요한계시록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이 요한계시록은 핵심이 교회를 핍박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고 있는 짐승이고 음녀인 이 로마 제국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멸망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하는 내용이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라고 하는 이 순차적인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듯 보이고 이 세상을 장악한 듯 보이는 로마 제국이 어떻게 멸망 당하고 있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강조함을 통하여 로마 제국의 핍박 가운데 있는 교인들에게 로마 제국이 다스리는 이것은 한시적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바벨론은 무너진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 충성을 지켜내라, 온전히 승리하여라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궁극적인 선물,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 되어라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한계시록이 일제 시대 식민 지배를 받았던 우리 믿음의 조상들에게는 너무 잘 읽혀졌습니다.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해서 큰 위로와 힘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980년 이후에 한국 교회가 부유해지고 대형 교회가 많이 등장하고 그리고 교회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중산층 이상이 되면서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죠. 여러분 신앙인들 뿐만 아니라 오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절대 빈곤에 허덕이지는 않잖아요. 상대적인 빈곤은 있지만 절대 빈곤 상태에 놓여 있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풍요로운 시대를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극심한 고난, 극심한 핍박 가운데 있던 성도들에게 주었던 요한계시록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뭔가 좀 실존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사항을 이해하면서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잘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학자들 간에 합의된 의견이 없을 만큼 요한계시록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해석을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과거주의적 해석입니다. 과거주의적 해석이라는 것은 뭐냐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은 사도 요한이 있었던 AD 1세기, 그리고 AD 1세기로부터 길어야 4~500년 안에 성취되는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이런 과거주의적 해석을 붙잡게 되면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사도 요한과 요한의 편지를 받았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 그리고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았던 초대 교인들에게는 유효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과거주의적 해석입니다. 과거주의적 해석은 많은 신학자들이 지지합니다. 왜 지지하냐면 요한계시록을 보시면 사도 요한이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면서 “속히 되어질 일들”이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많은 묵시적인 내용들이 속히 되어질 일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속히 되어질 일들이라는 맥락 속에서는 요한계시록이 기술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AD 95년경 그리고 사도 요한의 편지를 받았던 핍박 받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 그들에게 유효한 말씀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해야 된다 이것이 과거주의적 해석입니다. 과거주의적 해석을 붙잡는 사람들은 초대 교회를 괴롭혔던 유대교, 초대 교회를 핍박했던 로마 제국 그래서 유대교와 로마 제국의 핍박과 박해로부터 신앙을 지켜낼 것을 강조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핵심이다고 봅니다. 그래서 과거주의적 해석은 특징이 뭐냐면 반유대, 반로마입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를 핍박했던 로마 제국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이 기독교 신앙을 국교로 선포한 이때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모든 예언의 말씀은 성취되어졌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과거주의적 해석입니다. 그다음에 미래주의적 해석입니다. 미래주의적 해석이라는 것은 뭐냐면 요한계시록 4장 1절 이하에 나와 있는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말하고 있는 묵시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이 미래주의적 해석은 특히 세대주의 종말론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이런 미래주의적 해석으로 요한계시록을 보게 되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뭐냐면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속히 되어질 일들”이라는 표현과 맞지 않는 겁니다. 그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라면 이 요한계시록을 쓰고 있는 사도 요한과 이 요한의 편지를 받고 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는 이 미래주의적 해석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과 요한의 편지를 받고 있는 사람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미래주의적 해석을 학자들은 그렇게 많이 호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대로 세대주의 종말론자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해석의 방법이지만 AD 1세기에 이 편지를 쓰고 받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이 되기 때문에 학자들은 미래주의적 해석을 그렇게 선호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미래주의적 해석으로 우리가 봐야 될 요한계시록 안의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천년 왕국, 백보좌 심판, 새 하늘과 새 땅 이런 것들은 미래주의적 해석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들 외 모든 것들을 다 미래주의적 해석으로 바라보는 것은 위험합니다. 굉장히 잘못된 해석으로 우리를 이끌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다음에 이상주의적 해석입니다. 이상주의적 해석이라는 말은 뭐냐면 요한계시록 안에 있는 이 큰 성 바벨론, 음녀, 사탄 이런 것들과 하나님의 싸움을 선과 악의 싸움, 기독교와 이교도의 싸움으로 보는 겁니다. 이런 맥락으로 요한계시록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이상주의적 해석입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시점에 주목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주의적 해석이라는 것은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썼던 그 당시의 맥락 속에서 요한계시록을 바라보는 것이고 미래주의적 해석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고 하나님께서 이 땅을 새롭게 하실 그때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주의적 해석이라는 것은 뭐냐면 과거와 미래라고 하는 특정한 시간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기독교와 이교도, 하나님과 사탄이라고 하는 이런 영속적인 투쟁의 맥락 속에서 이 요한계시록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이상주의적 해석입니다. 그다음에 역사주의적 해석입니다. 이 역사주의적 해석이라는 것은 뭐냐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어떤 일이 펼쳐질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타임 테이블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라는 겁니다. 이런 역사주의적 해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가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타임 테이블 가운데 어떤 시점이고 오늘 이 시대에 바벨론은 누구이고 이런 식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을 많이 합니다. 예를 들자면 루터 같은 경우에도 자기 시대의 교황을 적그리스도, 666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전형적인 역사주의적 해석입니다. 역사주의적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적용에 관심이 많은 겁니다. 그런데 이상주의적 해석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겁니까? 이상주의적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탄, 선과 악, 기독교와 이교도 가운데 영속적인 투쟁 이런 상징적 구조로 요한계시록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역사주의적 해석은 오순절부터 주님 재림할 때까지 하나의 타임 테이블로 요한계시록을 바라보고 자기가 살고 있는 시점이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타임 테이블 가운데 어느 시대인건지 이 시대의 바벨론은 누구인지 이런 적용의 관점으로 요한계시록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역사주의적 해석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난해한 이유가 이 네 가지 해석이 사실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하나의 해석만으로 요한계시록을 바라보는 것은 위험합니다. 네 가지 해석방법, 과거주의적 해석, 미래주의적 해석, 이상주의적 해석, 역사주의적 해석이 나름 타당성을 다 갖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본문을 바라보실 때 과거주의적 해석으로 바라봐야 될 본문이 있고 미래주의적 해석으로 바라봐야 될 본문이 있고 또 이상주의나 역사주의적 해석으로 바라봐야 될 본문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를 그때 그때마다 잘 활용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주에도 요한계시록 개론을 좀 더 살펴보고 세 번째와 네 번째 시간에는 요한계시록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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