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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 (요한계시록 3:14-22)

by 【고동엽】 2022. 9. 3.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  (요한계시록 3:14-22)  

<本文>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3:14-22)

<序言>  
  지난 3주간 동안 미국에 다녀왔습니다. 미국 켈리포니아 신학대학원에서 굳디에레즈(J.M.Gutierrez), 백위드(R.T.Backwith), 디하트(S.D.de Hart), 헬렐(J.P.Farrell) 교수로부터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영국 세퍼드대학과 옥스퍼드대학에서 학위(Ph.D)를 받은 분들로서 신학의 내용이 상당히 깊었습니다. 이틀 동안 멕시코 선교 여행도 다녀왔는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학교에서 정한 공식 일정을 마치고 며칠 동안 교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크리스탈 처치(로버트슐러)와 갈보리 채플(척스미스)과 새들백 처치(릭웨렌)와 하비스트 크리스탈 펠로우쉽(그렉로리)과 빈야드 처치(죤 윔버)를 방문했습니다. 크리스탈 처치와 갈보리 채플은 평일에 방문하여 선교부로부터 브리핑을 받았고, 새들백 처치는 토요일 저녁 구도자예배에 참여했고 하비스트 크리스챤 펠로쉽과 빈야드 처치는 주일 아침과 오전예배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이들 교회를 돌아보면서 '예배'와 '교육'과 '선교'에 집중하는 교회가 되도록 해야겠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처음 가진 비젼을 향해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주께서 소아시아 지방에 있던 일곱 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을 살펴 보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신 메세지를 얻기를 바랍니다 (22절).  

<本論>
     1.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부적으로 좋은 환경 가운데 있었습니다.

  17절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모직 공업의 중심지이며 금융거래가 활발한 곳이며 의약 수출과 의학교가 있는 곳으로서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바울의 동역자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이며 바울의 많은 관심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골4:12-13).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수치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연단된 믿음이  없었고 신령한 세계를 보지 못했고 의로운 행실이 없었습니다 (벧전1:7, 요9:39-41, 고전 3:16, 고후3;3). 좋은 환경 가운데 있으면 신앙적으로는 나태해지기 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환경 가운데 있다고 해서 다 나태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환경 가운데 있는 자들 가운데서도 신앙적으로 더욱 열정을 가진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좋은 환경을 신앙적인 열심에 활용하지 못하고 도리어 영적으로 나태해지는 데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번에 미국 교회 예배를 참여해 보면서 많은 특징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근본적인 특징을 세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습니다. ①예배입니다. 예배가 역동적입니다. 경배찬양과 기도와 설교로만 진행됩니다. 경배찬양을 할 때는 대부분 일어서서 찬양을 합니다. ②교육입니다. 평신도 리더들을 교육하고 셀 모임을 활성화시키고 있습니다. ③선교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미국 내에 뿐 아니라 외국에 많은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인식을 완전히 반전시키는 특징들이 몇가지 있었습니다. ①예배시간이 길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보다 예배시간이 짧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대부분 교회들의 예배시간이 짧은 곳은 1시간 30분이고 긴 데는 2시간 가량 되었습니다. ②헌금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열린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은 우리처럼 헌금 시간을 갖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가는 곳마다 헌금 시간이 있었고 바구니를 돌렸습니다. 새들백교회는 토요일저녁에 있는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그 예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든 구도자 예배이기 때문에 헌금 시간을 갖지 않을 줄 알았는데 헌금 시간이 있었고 헌금 바구니를 돌렸습니다. 릭 웨렌 목사님의 설교는 물질 사용과 십일조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너무 놀라워서 안내하는 목사님에게 물었더니 미국의 많은 교회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회원(등록교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③부유층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갈보리 채플 교회(척 스미스)와 하비스트 크리스챤 펠로우쉽 교회(그렉 로리)와 새들백 교회(릭 웨렌)가 전도의 대상을 대체로 부유층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LA 근교에서 대체로 부요한 지역은 오랜지 카운티나 가든 그러브입니다. 그 교회들은 학벌이나 지위나 물질이 안정적인 이른바 '쌤'들을 전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는 몰라도 새들백 교회가 그런다는 것에는 놀랐습니다.

  그런데 학벌과 지위와 물질이 안정적인 그들이 예배 드리는 광경을 보면 스크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얼마나 열정적인지 모릅니다. 찬양을 할 때는 대부분 일어나서 합니다. 환경이 좋다고 해서 다 신앙적으로 나태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환경을 오히려 신앙적 유익으로 삼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2.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적으로 미지근했습니다.

  15~16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앙적으로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고 미지근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미지근한 상태는 생명과 성장의 역사가 없습니다. 부패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는 상태는, 19절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 회개하지도 않고 열심을 내지도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애통해 하거나 회개하는 것도 없고 적극적으로 의를 이루어 가려는 열심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차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았던 스바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같은 상태입니다 (습2:1, 3:5, 마11:20-24). 더웁지 않는 것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한 소돔 고모라 성과 의인 1명이 없어서 멸망한 예루살렘 성 사람들의 상태와 같습니다 (창18:32, 렘5:1).

  예수님은 당시 세대에 대해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마11:17).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터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동무들을 불러 두 편으로 갈라서 놀이를 했습니다. 그 놀이는 당시 어른들의 결혼식과 장례식을 빙자한 놀이였습니다. 한쪽 편에서 결혼식에서 처럼 피리를 불면 다른 편에서는 춤을 추고 기뻐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쪽 편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쪽 편에서 다른 편에 있는 아이들을 계속 같이 놀게 하려고 장례식에서 처럼 애곡을 했습니다. 마땅히 다른 편에서는 가슴을 치며 호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쪽 편에서 애곡을 하는 데도 가슴을 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한 것은 당시 세대 사람들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메세지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고 무시하고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했습니다 (마11:21-24).

     3. 라오디게아 교회는 열심을 내라는 권면을 받았습니다.

  18~19절에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교회가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죄를 원통히 여기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말씀 가운데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상한 심령을 가지고 마음을 찢으며 어찌할꼬 하는 마음으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시51:17, 욜2:13, 행2:37, 욘3:5-6). 그리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롬12:11, 벧전3:13).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 말씀을 지키는 열심, 기도하는 열심, 전도하는 열심, 사명을 감당하는 열심,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열심이 특심해야 합니다 (겔22;30, 롬8:35-38, 히11:36-40, 단3:16-18, 6:10-16, 요2:17, 행20:22-24, 고후7:7, 9:2).

  ①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해야 합니다 (18절). 불로 연단한 금은 시련 가운데 연단된 믿음을 상징합니다 (벧전1:7, 4:12, 롬5:3, 욥23:10). 하나님께 바로 살려는 열심을 내면 반드시 시련이 오는데 그 시련 가운데서 인내 하면 부패한 성품이 빠져 나가고 순금같이 정결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시기 질투 다툼 허영 욕심 고집 교만 등이 빠져 나가고 신앙 인격이 만들어져 갑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사서'라고 한 것처럼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격이 만들어져야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됩니다. ②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해야 합니다 (18절). 흰 옷은 옳은 행실에 대한 상징입니다(19:8). 금은 내적 믿음의 인격을 말한다면 옷은 외적 행위입니다. 외적 행위에 있어서도 더러운 부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벌거벗은 수치가 드러나지 않도록 제어해 나가야 합니다 (고전3:15, 계16:15).  ③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해야 합니다 (18절). 안약은 순종에 대한 상징입니다 (요9:6-7, 왕하5:10-14).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만큼 영안이 밝아져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깨닫게 됩니다.

<結言>
  20~21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 문 앞에 서 문을 열어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5:2-4, 고후6:2). 문을 열면 주께서 들어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6:35, 55-58). 이기는 자, 곧 미지근한 상태에서 회개하고 다시 열의를 가진 자에게는 주께서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영광의 자리, 존귀한 자리, 칭찬의 자리, 상급의 자리 하나님의 것을 다 누리게 하는 자리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출처/차용철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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