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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녹취 1

by 【고동엽】 2022. 11. 29.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오늘부터 4주에 걸쳐서 요한계시록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개론을 다루려고 하는데요. 요한계시록 하면 많은 사람들이 좀 어렵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많이 보이고 그리고 일반적인 정통 교회에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설교나 성경 공부를 거의 하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대해서는 두 개의 극단적인 상반된 반응이 있는데 왜 그렇게 정통 교회에서 요한계시록을 주목하지 않았는가, 초대 교회부터 요한계시록은 임박한 종말 신앙과 천년 왕국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요한계시록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하면 이단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열심히 공부하고 요한계시록을 열심히 말하게 되면 이단이 아닌가, 임박한 종말 신앙을 믿고 있나 이런 오해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정통 교회에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요한계시록을 점점 멀리하게 되었고 도리어 이단들의 전유물처럼 활용되는 것이 교회 역사였고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요한계시록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어 있는데 하나가 지나친 결핍이고 또 하나가 지나친 과잉입니다. 이 지나친 결핍이 바로 소위 정통 교회가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보이고 있는 반응이고 지나친 과잉이라고 하는  이런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에 대해 보이고 있는 반응입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의 경우에는 요한계시록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빠져 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이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예언들을 벙어리 예언이라 취급을 했습니다. 어쨌든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시게 되면 굉장히 많은 환상이 나오고 수와 관련된 표현이 많이 나오고 상징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이해하기가 난해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정통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보기는 봐야 할 것 같은데 읽기가 너무 어렵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고 그리고 너무나 많은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을 강조하다 보니까 요한계시록 잘못 읽다가 나도 이단에 빠지는게 아닐까, 그래서 정통 교인들에게는 약간 금서처럼 취급받고 있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요한계시록이 정통 신앙인들에게 홀대를 받게 되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은 뭔가 좀 어렵고 난해하고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기가 좀 힘들다 라는 뿌리 깊은 편견이 있습니다.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의 성경이 있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이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본문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유다서까지 65권과 연결되어 있는 말씀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창세기부터 유다서까지 이전의 성경의 말씀과 연관성 속에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노력이 일단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거나 주장할 때 임박한 종말 신앙, 아니면 천년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사이비 이단들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은 한계가 뚜렷합니다. 그것보다는 사도 요한이 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었는가,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 목회적인 관심 속에서 요한계시록을 바라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보십시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는 로마 제국이라고 하는 바벨론이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황제 숭배라는 것을 통해서 초대 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하나님께만 충성과 하나님께만 순종해야 될 초대 교인들이 황제 숭배라고 하는 크나큰 시련 가운데에서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릴까 아니면 하나님께만 순종할 것인가 그 갈등 가운데에서 로마 제국에게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인들만 그런 로마 제국이라는 바벨론의 시험과 공격과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형태를 달리 하지만 하나님께만 충성을 바쳐야 할 신앙인들을 하나님께만 충성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 시대의 바벨론이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아가려는 신앙인들은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바벨론의 공격과 유혹 앞에서 동일하게 신음하고 동일하게 핍박을 받고 있는 겁니다. 그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이 로마 제국의 핍박과 로마 제국의 공격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교인들에게 이런 핍박과 박해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을 견지하는 것을 촉구하는 맥락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형태를 달리하고 있지만 여전히 바벨론의 공격과 유혹 가운데에서 신앙인의 분투, 신앙인으로서 힘겨운 분투를 하고 있는 이 시대의 신앙인들에게 어떻게 우리가 이 시대에 존재하는 바벨론 제국에 무릎 꿇지 아니하고 온전히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묵상하고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면 사도 요한이 목회자의 마음으로 소아시아 일곱 교회 교인들에게 이 요한계시록을 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왜 우리가 바벨론에 무릎 꿇어서는 안되는가, 왜 하나님께만 일편단심의 충성을 바쳐야 하는가 궁극적으로 이 바벨론이라는 제국의 통치를 하나님께서 끝장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런 확신을 주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이 어떤 장르인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약 27권은 4개의 장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4개의 복음서가 있고 1개의 역사서가 있고 21개의 서신서가 있고 요한계시록이라는 묵시록이 있습니다. 신약의 4개의 장르는 70인 경의 4개의 장르를 그대로 따라한 겁니다. 70인 경을 보시면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토라, 오경이라고 하는 본문이 나오고 그다음에 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 역사서가 나오고 욥기부터 아가까지의 시가서가 나오고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의 예언서가 나옵니다. 이 장르 배치 순서를 그대로 따라 한 것이 바로 신약 성경의 배치 순서입니다. 토라를 보시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인 출애굽과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과 율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나와 있는 것이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토라가 제일 앞에 배치된 것처럼 복음서를 제일 앞에 배치했고 그다음에 역사서가 배치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약도 복음서 다음에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이방 지역에 주의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게 되었는지, 이방 지역에 어떻게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는지 그 초대 교회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사도행전이 나옵니다. 그리고 역사서 다음에 시가서가 나옵니다. 이 시가서에 대응하는 것이 바로 서신서입니다. 그래서 21권의 서신서가 나옵니다. 그리고 구약의 제일 마지막에 예언서가 나옵니다. 이 예언서에 대응하는 것이 바로 묵시록인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 문학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묵시라고 하는 것은 예언과 구분됩니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3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언의 말씀은 청중의 반응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 가능한 것이 바로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는 예언조차도 청중이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은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셔서 그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뭐죠? 그 예언자가 선포한 것처럼 하나님이 너희를 심판할거야 이것을 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언자의 경고를 듣고 제발 돌이켜라 그래서 하나님이 경고하셨던 이 심판이 시행되지 않을 수 있도록 빨리 돌이켜라, 회개해라 이것이 바로 예언의 말씀을 주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래서 예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뭐냐면 청중의 반응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 가능한 것이 바로 예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예언의 말씀을 주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인가, 이 땅에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분야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구현되지 아니하고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겁니다. 잘못된 정치, 잘못된 경제, 잘못된 종교 그래서 그것을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질타하고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교정되고 변화 되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예언의 말씀을 주시는 목적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 이 예언의 말씀은 인간 예언자를 통해서 주로 전달됩니다. 그래서 예언의 중요한 특징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가 청중의 반응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 가능한 것이 예언이고 이 땅의 잘못된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교정시켜 내고 변화시켜 내는 것이 예언의 목적이고 세 번째는 인간 예언자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바로 예언입니다. 그런데 묵시는 여기서 예언과 3가지 뚜렷한 차별성을 드러냅니다. 묵시라는 것은 청중의 반응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겁니다. 그 결정되어 있는 시나리오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묵시입니다. 그래서 예언이 청중의 반응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 가능한 것이다 라면 묵시라는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 잘못된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교정하고 변화시켜 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묵시는 이 땅의 잘못된 정치, 이 땅의 잘못된 경제, 이 땅의 잘못된 종교를 부분적으로 교정시켜 내는 것에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묵시라는 것은 언제 등장하는 거냐면 그 조금 조금 잘못된 것을 고쳐낼 수 없다고 판단될 때, 한마디로 하자면 이 악과 죄라는 것이 이 땅에 너무 만연해서 뭔가 조금 고친다고 해서 나아질 가능성이 없을 때 등장하는 것이 묵시입니다. 그래서 묵시는 부분적인 변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지금의 땅과 지금의 하늘을 완전히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교체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언과 묵시를 어떻게 이해하실 수 있냐면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청소기가 고장났을 때 그 청소기의 고장난 부품을 바꿔서 다시 그 청소기를 사용하는 것이 예언이라면 묵시라고 하는 것은 청소기 안에 몇 개의 부품을 교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겁니다. 그래서 아예 청소기 자체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묵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예언자를 통해 전달된다면 묵시는 천상적 존재, 즉 천사와 같은 천상적 존재에 의해서 하나님이 결정하신 바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묵시입니다. 그래서 예언과 묵시는 이런 세 가지 뚜렷한 차이가 있는데 요한계시록은 신약에 있는 유일한 묵시 문학임을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요한계시록은 언제쯤 쓰여졌을까 라고 했을 때 학자들마다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가 수용하는 것은 도미티안 황제 때 기록된 묵시 문학일 것이라고 봅니다. 이 도미티안이라는 황제는 AD 81년부터 96년까지 로마 제국을 다스렸던 황제입니다. 그런데 이 도미티안이 이전에 존재했던 황제와 뚜렷한 차별성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자기를 주님과 신이라고 공식적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대 주재자라고 부르게 만들었습니다. 원래 로마는 다신교 체제 아닙니까? 다양한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황제들은 로마 백성들이 섬겼던 신들보다는 자기를 약간 하등적 존재로 규정했는데 이 도미티안이라는 황제는 로마 백성들이 섬겼던 신들과 자기를 거의 동급으로 올려놓았습니다. 그것 가운데 하나의 증거가 뭐냐면 에베소에서 이 도미티안 황제의 신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신상의 높이가 거의 7~8미터 정도 됩니다. 이것이 뭐냐면 당시 로마 백성들이 섬겨왔던 신상의 크기와 도미티안 황제의 동상이 거의 비슷합니다. 그만큼 일반적인 신들의 위치만큼 자기를 격상시켰던 인물이 바로 도미티안입니다. 그래서 도미티안이라는 사람은 자기를 신과 주님으로 고백하게 만들었고 세계 역사를 통치하는 대 주재자로 고백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소아시아를 비롯한 이 로마 제국의 사람들에게 자기를 신으로 숭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황제 숭배의 맥락 속에서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황제에게 무릎 꿇었지만 끝까지 황제에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신앙을 지켜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누구냐면 사도 요한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사도 요한이 도미티안 황제 때 황제 숭배를 거부한 것 때문에 밧모라는 섬에 유배를 가게 되었고 유배를 가게 되었던 밧모 섬에서 하나님의 묵시인 요한계시록을 받아서 이 요한계시록을 기술했다고 보통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밧모라는 섬에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로마의 군인들이 감시하는 상황에서 그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로마에 의해서 유배를 간 것이 아니라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 때 사도 요한이 밧모라는 섬으로 피신을 간 것이 아닐까 이렇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후자적 견해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왜 그러냐면 만약 유배를 갔다면 로마 군인들이 시퍼렇게 감시하고 있는데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 요한계시록을 기술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중요한 것이 고대 어떤 자료를 봐도 밧모라고 하는 섬이 유배지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밧모라는 섬에 유배를 갔다 라고 하는 것은 초대 교회 이후에 만들어진 주장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가 뭐냐면 요한계시록 1장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요한이 밧모라는 섬에 유배를 갔다고 생각하고 그 근거로 요한계시록 1장을 말하고 있는데 요한계시록 1장에서 사도 요한이 자기가 유배를 갔다고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 신앙 때문에 이 밧모라는 섬에 왔다 라고 말하지 유배를 왔다는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그 밧모 섬에서 요한계시록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을 보게 되면 유배를 간 것이 아니라 박해를 피해서 피신을 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도미티안이라는 황제의 박해 때 기술되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만연한 그리고 이 땅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악의 체제인 로마 제국, 즉 바벨론을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말하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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