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시편 145:11-21 요한복음 17:1-6)

by 【고동엽】 2022. 7. 22.
 
전체 목록가기 영광 목록 돌아가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시편 145:11-21 요한복음 17:1-6)  

  
처음과 마지막

우리가 편지를 쓸 때, 첫 문장이 제일 어렵고, 마지막 문장이 또한 마찬가지로 어렵습니다. 영화에서 처음 5분간에 관객들의 관심을 사지 못하면 그 영화는 실패라고 합니다. 그러나 첫 5분 못지 않게 마지막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전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화뿐만이 아니라 학문의 세계에서도 통하는 원리입니다. 책을 읽을 때, 서론과 결론을 먼저 읽고서 책을 읽으면 그 책의 내용을 매우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론과 결론을 쓰는 것이 나머지 전체를 쓰는 것만큼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은 전체의 일부이면서도 전체의 내용을 대변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주기도에 있어서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부르는 부름과 함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하는 내용은 나머지 전체 기도의 내용을 대변하는 역할을 합니다.

주기도의 처음 하나님을 부르는 부름에는 이미 그 다음에 오는 각각의 모든 간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말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면서 기도해도 우리의 기도는 아주 훌륭한 기도인 것입니다.

갓난 아이는 엄마를 부르면서 그저 ‘응아’, ‘으앙’하면서 울기만 해도 엄마는 아이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아 차립니다. 아이는 ‘응애, 으앙’ 소리 만으로 “엄마, 나 배고파요, 나 추워요, 기저귀 갈아주세요” 하는 모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살짝 웃는 웃음 하나로, “나, 기분 좋아요. 배불러요. 따뜻해요” 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조금 컸을 때, 긴박한 상황에서 ‘엄마, 엄마’ 하고 외치기만 해도 엄마는 아이에게 가서 보고 아이의 필요를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고 하나님을 불러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임재하시면 우리는 모든 기도를 이미 드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기도의 마지막 역시 각각의 모든 간구가 요약되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의 마지막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하는 내용은 후대에 첨가된 내용입니다. 초대 기독교의 예배에서 기도를 하는데 기도의 형식이 잘 갖추어지길 바라는 의미에서 첨가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어 성경의 마태복음에는 괄호를 해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부분이 우리에게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있다는 고백과 영원히 있기를 바라는 소원은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고백과 소원인 것입니다.



주기도와 삶

먼저 주기도는 우리 삶에 중요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기도의 구조가 삶과 비유될 수 있습니다. 주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로 끝납니다. 이것은 모든 기도가 그래야 하며 우리의 삶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에 있어서도 마지막은 전체 기도와의 관계성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의 내용과 기도의 끝은 서로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기도에서 마지막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마치게 될 때, 모든 전체 기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됩니다.

주기도의 마지막은 사람의 일생의 마지막과 비유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마지막에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전체 인생이 결정되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이 삶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모든 과정을 판단하게 됩니다. 사람이 어떠한 삶을 살아 왔는가와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것은 일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기도를 할 때 겉으로 보면, 우리는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면서 기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가는 능동적인 행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셨고 우리가 생명 속에서 존재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으로서의 삶입니다.

세 번째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우리는 기도 중에 무언가를 말하고 무언가를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활 중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생활과 기도는 대립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생활과 기도는 함께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간의 문제)

우리는 실제적인 생활에 있어서 기도할 시간이 거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려면 특별히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외적 강제에서건 내적인 자기 강제에서건 규칙적인 기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언어의 문제)

그리고 우리가 막상 기도를 하려고 하면 무슨 언어를 써야 할지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똑같은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항상 떠듬거리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구역 예배 때나 기도회 때 새로운 주제로 기도를 하게 되면 그 기도 제목을 언어로 가다듬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떠듬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앵무새처럼 유창하게 하는 기도보다 머뭇거리는 기도가 어쩌면 더 진실한 기도일 수가 있습니다. 기도 속에서 우리의 삶이 언어로 요약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삶 속의 부족과 요청, 어려움, 배고픔과 과도한 삶의 부담들, 해야 할 과제들, 기쁨과 실망, 사랑과 두려움 등이 모두 언어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삶이 언어를 통하여 기도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삶이 기도 속에 들어와 있으므로 기도는 집중된 삶입니다. 기도 속에 우리의 삶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농축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잡다한 모든 것이 여과되지 않고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되고 본질적인 형태로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 무엇을 달성하나를 위해 이것 저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우리 자체가 무엇인가를 기도하고, 진리 안에서 우리 자신이 무엇이 되어야 하나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내가 무엇인가?” “내가 누구인가?” 하는 근본 질문 앞에 서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인간아 네가 어디 있느냐? 00야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는 하나님의 질문을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

기도는 삶 자체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인가의 물음에 도전을 받고 그 질문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단지 자신의 지배력과 명예, 자신의 능력과 업적, 자신의 성공과 실패, 자신의 인기 등등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잡다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단지 한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이 한 가지 기도가 바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결코 과도히 경건한 자가 아닙니다. 결코 신앙의 수퍼스타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이 좋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시험이 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위험한 기회를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괴로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때 하나님을 더 찾게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이 있을 때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단한 신앙인입니다. 마음으로 감사할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가서 물질을 구별하여 드릴 수 있다면 최고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어려울 때 하나님을 더욱 찾습니다. 어려울 때 더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한번 해 보십시오. 경험적으로 살펴보면 매일 같이 똑 같은 기도를 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기도가 하나님 앞에 소원을 아뢰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드린다든지 주문을 외우는 것이라면 똑 같은 기도를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므로 진정 하나님의 앞에 서서 기도하는 사람은 똑 같은 기도를 반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제 아무리 긴박한 상황일지라도 계속해서 울부짖을 수가 없게 됩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한 인간이 참된 존재로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나의 존재가 만날 때 내 존재의 비본질적인 군더더기들은 점점 의미를 잃어가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사람들은 삶의 결핍들보다는 도리어 삶 자체가 가야 할 길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게 되고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만 말을 하게 됩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듣게 됩니다.

기도 속에서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주제로 등장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간구를 하나님께 아뢰었지만 자기 자신이 기도의 중심이 결코 되지 못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중심이 되셔서 기도를 하나님만을 향해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나의 소원’이 더 강해지기 보다는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심으로 기도를 하면 도리어 내 뜻을 포기하게 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게 되고, 주님의 영광을 더 빌게 되는 것입니다. 참 기도는 자신의 관심사와 이해는 사라지고 하나님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

참 기도자는 나라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압니다. 나라는 특정한 지역 안의 사람들이 통치를 받은 곳입니다. 나라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권능

참 기도자는 권세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압니다. 권세는 남을 승복하게 하고 복종케 하는 힘 즉 지배력을 말합니다. 권세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영광

참 기도자는 영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압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인간에게 나타나는 임재방식인 것입니다. 무게, 명예, 중요성, 힘과 권위가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참 기도자는 단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권능과 영광만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내 명예와 내 세력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인정 받고 칭찬 받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가 완전히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커지고 내가 작아지는 순간이 은혜의 순간이요, 내가 완전히 없어지는 순간이 구원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내 능력의 더러운 옷을 벗고 하나님의 능력의 깨끗한 옷을 입는 순간입니다. 내가 사라지는 순간이 진리가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순간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허상들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실상만이 뚜렷하게 보이는 순간입니다.

나비가 고치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만, 나비가 그 속에서 나오고 나서 고치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을 속박하고 유혹하고 괴롭게 하는 온갖 삶의 감옥과 짐들이 고치처럼 쓸모없는 것으로 변하는 순간, 사람은 이 고치를 벗어버린 나비와 같은 자유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다윗의 영광 돌림

성서의 인물 중의 가장 아름다운 인물을 꼽으라면 그 중의 한 명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훌륭한 점은 단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것과 그의 왕국이 안정된 왕국이었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의 매력적인 점은 그의 인간됨에 있습니다.

다윗은 일생을 하나님의 전을 짓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군인 출신으로서 피를 많이 흘렸으므로, 하나님은 다윗의 손으로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을 짓기 위한 모든 준비를 하는데 자신의 일생을 바치게 됩니다. 그는 모든 준비를 끝낸 자신의 노년에 본문과 같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역대상 29:10-12).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고백이요 위대한 기도요 그의 위대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기도의 문제는 철저히 삶의 문제입니다. 삶의 모든 문제는 “왜 사느냐” “무엇을 위해 사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하게 됩니다.

여러분 거울 앞에 한번 서 보십시오. 그리고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오. “내가 이 썩어 없어질 고깃덩어리를 호강 시키려고 살아간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할까? 내가 이 썩어질 고깃덩어리를 꾸미려고 화장을 하며 온갖 그림을 그린들 그것이 얼마나 갈까?” 내가 이 썩어질 육체의 영광을 구한들 얼마나 갈까? 여러분 썩어질 고깃덩어리에 비단을 걸친들 호피털 외투를 걸친들 다 부질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기도는 주로 과거 지향적으로 지나간 영예를 되찾게 해 달라고 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다윗 시대의 영화를 되찾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미래지향적입니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기도는 순수한 환상이나 잃어버린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는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 구원이 없고 죄악이 만연해 있음을 애통하고, 이 죄악된 현실 속에 하나님께서 오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나라가 완전히 실현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으로 인한 많은 모순들이 사라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원하고 거룩한 뜻만이 편만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한 그 나라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곳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루어 진 곳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미 실현되는 곳이며,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이미 채워져서 이웃과 나누기에 넉넉하며, 사람들은 서로의 죄를 서로 용서하게 되고, 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하나님 한 분 만이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아멘

주기도문은 ‘아멘’으로 끝납니다.

아멘의 뜻이 무엇입니까? 아멘은 ‘정말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기를 바랍니다’ ‘진실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아멘’이란 말을 자주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강조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요 3:11)” 하셨습니다. 여기서 ‘진실로’가 바로 원어로 ‘아멘’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아멘 아멘’ 하시면서 ‘아멘’을 두 번씩 겹쳐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마무리하는 이 ‘아멘’은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몸소 교회의 기도를 함께 감당하시기 때문입니다(고후1:20; 계3:14). 원래 예수님의 호칭이 아멘입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계 3:14).

예수님에게는 아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이 아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는 아멘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아멘의 삶의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처/박병욱 목사 설교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