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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믿음의 사람 (느헤미야 1:1-11)

by 【고동엽】 2022.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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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믿음의 사람   (느헤미야 1:1-11)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특별히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우리 앞에 붙기를 원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숙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성숙한 사람이라는 말만큼 소중한 말이 없습니다. 성숙한 대통령, 성숙한 장관, 성숙한 목사, 성숙한 장로, 성숙한 사장, 성숙한 자녀, 성숙한 아버지....성숙하다는 말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말입니다. 오늘은 이 성숙한 믿음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요즘 저는 느헤미야서에 빠져서 앞으로 계속 저녁시간에는 느헤미야서를 강론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집중하여 말씀을 들으면 큰 깨달음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 느헤미야서는 느헤미야라는 성숙한 사람을 통해서 무어진 성벽을 재건하는 역사적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지금으로부터 2450년의 역사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의 포로 2세로서 당시 대재국인 메대 파사의 아닥사스다 왕의 술맡은 관원이라는 높은 관직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좋은 믿음을 보시고 그를 높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기슬르월 어느날 느헤미야가 왕궁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의 동생 하나니가 몇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돌아왔습니다. 느헤미야가 묻습니다. ‘예루살렘이 어떻더냐?’ 그래서 하나니가 보고를 하는데 너무나 참담한 보고를 합니다. 백성들은 큰 환난을 당하고 성벽은 무너졌고 문들은 화재로 다 타버렸다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을 통해서 1차 포로귀환이 있었고, 2차는 에스라를 통해서 포로귀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루셀렘의 형편은 그와 같이 참담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하는구나!” 자기 할 일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리며 금식 기도했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그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이스라엘백성들을 도우리라.’ 느헤미야의 기도는 응답되어져서 수산에서 예루살렘까지 1,200km, 부산에서 서울까지 세배가 넘는 그 먼 거리, 당시 교통으로는 너무나 먼 그 길을 가서 마침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어깨에 힘이 빠지고 낙심해 있을 때 그 좋은 지도자 느헤미야를 만남으로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한손에는 칼을 잡고 한 손에는 도구를 잡고 일을 하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일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을 해야하는 그 난공사를 52일 만에 완공을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안정과 소망과 기쁨을 주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북산은 미사일을 쏘고, 육자회담은 무산되고, 북산에서 일하는 우리 사람들을 다 몰아내었습니다. 또 FTA는 협상이 진척되고 있지 않습니다. 노사간의 관계는 더욱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사용자도 책임이 있고, 근로자도 책임이 있는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청년실업인구가 그렇게 많은데 올해는 이런 복합적인 요인들로 더 취업이 어려울 것이라고 합니다.
물가는 치솟아 올라갑니다. 이런 때에 느헤미야와 같은 성숙한 사람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이 땅에 1,200만의 기독인구가 있다고 해도 느헤미야와 같은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없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시대에나 성숙한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그냥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믿음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성숙함이란 아름다움의 총체적인 표현입니다. 아름답다는 말보다 더 좋은 표현이 성숙하다는 말입니다. 나무도 성숙해야 열매를 맺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나무에서 열린 열매는 먹을 수 없고 씨가 될 수 없습니다. 무르익을 대로 익어야 많은 기쁨을 줍니다. 성숙한 사람은 그릇이 큰 사람입니다. 성숙한 사람이 미숙한 사람과 다른 것은 보는 것,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릇자체가 다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성숙한 믿음의 사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숙한 믿음을 사모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니의 보고를 듣고 예루살렘의 불행과 고통과 황폐화됨을 듣고 성숙한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미숙한 사람은 “누가 이랬노...”라고 하며 원인을 찾고 비난거리를 먼저 찾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다릅니다.
느헤미야의 그 성숙함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를 보십시오. 높은 권력을 가져도 성숙하지 못하면 폭군이 됩니다. 많은 돈을 가져도 성숙하지 못하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느헤미야로부터 성숙함을 배워야 합니다.

1.느헤미야의 성숙함은 불신자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불신자인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았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이삭이 그랬습니다. 이방인들이 그와 친숙해지려고 존중했습니다.
여러분, 안 믿는 사람이라고 무조건 박해하는 것 아닙니다. 처음에는 모르기 때문에 박해하고, 모르기 때문에 싫어하지만 나중에는 그 성숙한 인격에 감동되었을 때 그를 누구보자 존중합니다. 성숙한 믿음이 이것입니다.

2.느헤미야는 관심이 달랐습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은 관심이 다릅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니를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물은 것은 “지금 예루살렘의 형편이 어떤가?”였습니다. 관심이 자신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내 조국의 형편이 어떤가가 느헤미야의 관심이었습니다. 고통당하는 내 공포들이 그의 관심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주요한 관심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성숙되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자기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집니다. 자기이익에만 집착합니다. 자기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라야 어떻게 되던, 이웃이야 어떻게 되던 관심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성숙함이 무엇입니까? 남에게 대한 배려요 관심입니다.
느헤미야는 수산궁에서 왕의 총애를 받으며 호의호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염려 걱정없이 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오로지 예루살렘성이었습니다. 성숙한 사람의 관심은 과연 다릅니다.
여러분도 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데 여러분의 관심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느헤미야와 같이 나 외에 나의 이웃에, 나의 조국에, 나의 교회에, 사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되시기를 바랍니다.
관심의 차원이 성숙의 차원입니다. 어떤 사람과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 자신의 관심이 무엇인지 다 드러내지 않습니까? 오늘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나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솔직히 질문하십시오. 솔직히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돈버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까? 관심이 차원이 다릅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하나님 안에서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3.느헤미야는 눈물이 달랐습니다.
예루살렘성의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그 자리에 앉아서 수일을 울었습니다. 눈물이 다릅니다. 성숙한 사람의 눈물은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눈물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성도들 중 10만 명만이라도 느헤미야와 같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이 나라는 지금과는 다릅니다. 지금과 같은 성도들이 1억 명이 있으면 뭐합니까? 느헤미야와 같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아브라함이 기도할 때 의인 열명만 있으면 이 성을 사해주시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이 죄악된 세상, 이 악한 세상을 위해서, 이 사회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내가 병들었을 때 웁니다. 내 가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 웁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웁니다. 솔직히 생각합시다. 십년 예수 믿었습니까? 이십년 믿었습니까? 삼십년 믿었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흘린 눈물을 달아보십시오.
다윗은 기도할 때 “하나님 내 눈물을 병에 담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울었습니까? 수 십 년을 살면서 한번이라도 국가의 문제로 가슴 앓았던 적이 있습니까?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습니까? 성숙한 사람은 눈물이 다릅니다. 이걸 여러분이 기억하세요.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주여, 느헤미야의 눈물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정말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느헤미야처럼 울수만 있다면 그 어떤 세상의 일도 하나님께서 해결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성숙한 눈물, 성숙한 사람은 눈물이 다릅니다. 교회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포항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수해를 당한 분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노사간의 대치를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비난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은 성숙한 사람만이 흘릴 수 있습니다.

4.느헤미야는 슬픔과 한숨을 기도로 바꾸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눈물로 끝낸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슬픔과 아픔을 기도로 바꾸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사람을 찾아가지 않습니다. 어려운일 만날 때 사람을 붙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4절에 보면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라고 했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했다. 성경을 연구하면 이 느헤미야의 기도는 넉 달 동안 계속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상황이 급하기 때문에 금식하며 “하나님! 속히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느헤미야가 성숙한 믿음이 없었다면 아마 자신을 총애하는 아닥사스다 왕을 설득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었습니다. “왕이여, 내 조국 예루살렘이 어렵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사람을 보내주시고, 필요한 재목들도 허락해 주십시오. 왕께서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왕이 도와줄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을 깨들읍시다. 결자해지라는 말 알지 않습니까? 이 성벽이 왜 무너졌습니까? 유대인의 조상들, 내 부모님의 세대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여 그 징계로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무너뜨린 것을 사람이 세울 수 있습니까? 돈있다고 세웁니까? 힘있다고 세웁니까?
성숙한 사람이 왜 기도합니까? 하나님이 무너뜨렸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의 힘으로 세울수 없습니다. 왕권으로 세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실 때 세울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돈있다고 일합니까? 하나님이 눌러버리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힘있다고 일합니까? 하나님이 결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이걸 압니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벌주시고, 그 하나님이 무너뜨렸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찾아 나아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늘의 크신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돌아오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당신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오니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돌아보아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요즘 제가 소개하는 “믿음으로 성경한 이 시대의 사람들”이라는 책에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님 간증이 들어있습니다. 저는 그 간증을 읽으면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숙대가 100년역사가 되는 구한말에 왕족이 세운 학교입니다. 그런데 숙대가 너무나 어려움을 겪어 이 총장님이 취임할때는 숙대가 너무나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돈이 많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때 총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느헤미야같은 성숙한 분입니다.
총장이 될 때부터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학교는 하나님의 학교입니다. 하나님이 손대지 않으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총장의 역할을 감당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를 않습니다. 해외에 출장나가 있어서도 전화가 옵니다. “총장님, 큰일 났습니다. 이 일에 부결되었습니다. 지금 돈이 몇 억이 필요합니다.” 방법이 있습니까? 또 엎드리지요.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이 책에 보면 기도하면서 그 문제를 풀어가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너무나 귀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사람을 찾아다지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느헤미야는 기도했습니다. 4절에는 금식하며 기도했고, 6절에는 주야로 기도했습니다. 11절에는 기도의 동지를 모아 기도했습니다. 이경숙 총장도 숙명여대를 위한 기도팀을 만들어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바로바로 역사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대흥교회 성도들이여! 믿음으로 성숙해져서 느헤미야처럼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해나가고 공동체의 평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심지어는 모금을 하는데 총장에게 하나님이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2억이상을 모금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총장에게 지혜를 주시는데 엄청난 금액을 목표를 정했습니다. 그 당시 등록금이 백오십만원이었는데 모든 동창들이 한 학기분의 등록금을 더 내는 목표를 정하고 대회로 모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걱정을 합니다. 그냥 오라고 해도 안오는데 돈백오십만원가지고 오라고 하면 누가오겠느냐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총장님은 도시락 이천개를 준비해놓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이총장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천명이 안오면 그 돈 내 월급에서 10년 동안 제하면 안 되나.” 학교 손해안보이고 내가 손해보면 안되느냐는 마음으로 강행했더니 성공한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도시락이 모자랄 정도로...사람들이 꽉 차서 그날 60여억원의 모금액이 들어왔습니다.
느헤미야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얼마나 필요하지 않습니까? 어려움만 있으면 하나님앞에 나가서 기도하고...

5.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파손을 자신의 죄로 고백하며 회개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예루살렘성이 훼파되고 성문이 소화된 것은 느헤미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조상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와 같은 성숙한 믿음의 사람은 모든 역사의 현장에 어려움이 생길 때 내 책임부터 찾습니다. 내 잘못부터 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어떤 조그마한 일이 생겨도 다른 사람의 잘못부터 따지지 않습니까? 비판부터 합니다. 내 잘못, 내 책임은 전혀 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 몇 명만 있으면 엉망진창이 됩니다. 문제는 더 미궁 속으로 빠지고 맙니다.
성숙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내 책임, 내 잘못부터 찾습니다. 이게 느헤미야입니다. 6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누가 먼저 나옵니까? 내가 먼저 나옵니다.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이게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내 잘못이 무엇인가를 먼저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잖아요.
어떤 여집사님은 남편이 너무너무 잘못합니다. 남편으로서는 너무 형편이 없서요. 남편을 많이 미워했어요. 못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성숙한 믿음의 은혜를 받고 목사님께 와서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다 내 잘못입니다. 내가 잘 했더라면 내 남편이 지금처럼 안되었을 것인데 아내로서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내가 성숙하지 못하여 내 남편이 이렇게 된 것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신을 깨닫기 되니까 남편의 모든 허물을 받아들이게 되는 거예요.
성숙한 사람은 작은 자기 잘못이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성숙한 사람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6.느헤미야는 자신이 높은 직책을 맡게 된 것이 어려운 이 때를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숙한 사람과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많은 물질을 벌었습니다. 좋은 재능을 주셔서 인기를 얻게 하셨습니다. 또 좋은 지위를 주셔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자신의 영광만을 취하고 자기 안일만을 위하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미숙한 사람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 보고를 듣자 ‘하나님께서 나를 술 맡은 관원의 자리에 올려주신 것은 이 때를 위함이구나“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성숙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자리까지 인도하신 것이 이 때를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말은 에스더서에도 잘 나옵니다. 국가와 민족이 죽음의 위기에 당했을 때, 모르드개는 울면서 에스더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왕비 에스더야, 하만의 음모로 민족이 죽게된 이 위기 상황을 왕께 나아가 아뢰라.“ 그러자 에스더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빠여! 왕이 나를 부르지 않은지가 한달이 넘었습니다. 이 나라 국법으로는 왕이 부르지 않는데 나가면 왕비라도 사형을 당합니다.“ 이 말을 들은 모르드게가 ”에스더야, 하나님이 너를 왕비로 세워주신 것은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는냐? 너 이때 쓰려고 하나님이 왕비 세워주신 것이지 너 혼자 호의호식하라고 왕비 세워주신 것이 아니야.“ 이 말을 듣고 에스더가 깨닫습니까? 못 깨닫습니까? 깨닫잖아요. 그리고 유명한 말을 하지요. 3일 금식하고 ”죽으면 죽으리이다.“
여러분 성숙함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수십년 예수님을 믿어도 내 신앙이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기회를 다 놓치고 맙니다.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걸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때 쓰시려고 나를 술맡은 관원장의 자리에 올리셨구나. 이 때를 놓치지 말아야지.“
그래서 가장 인생에서 위대하게 쓰임받을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습니다. 성숙하지 못하면 그게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물질도 지위도, 명예와 재능도 하나님이 쓰실 목적이 있어서 주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아! 이 때를 위함이구나”를 깨닫고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실 때 온전히 헌신하실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7.느헤미야는 내가 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1절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사람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서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게 해주십시오.” 이 날은 내가 가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왕께 매인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감동시켜 주셔서 내가 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려운 문제가 부딪쳤을 때 다른 사람에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겠습니다. 내가 헌신하겠습니다. 내 이 일을 책임지겠습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이게 성숙한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오늘 기도할 때도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기도할 때 이렇게 하잖아요. ‘하나님 대흥교회를 부흥시켜 주옵소서.“ 그런데 누가 부흥시키는 일에 앞장선다는 말입니까? 이제는 기도를 바꾸세요. ”교회 부흥을 위해서 제가 앞장 서겠습니다.“ 따라합시다. ”교회 부흥을 위해서 제가 앞장 서겠습니다.“
아무도 하지 않더라도 저 혼자라도 뛰어들겠습니다. 우리 회사를 위해서 제가 희생하겠습니다. 내 가정을 위해서 내가 하겠습니다.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사람, 성숙하지 않으면 그럴 수 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호화로운 생활을 다 접어두고 그 고생길로, 1,200km을 가서 그 황폐한 예루살렘성을 재건하겠다는 것입니다. 돈만 되겠다는 것 아닙니다. 내 마음가 정성을 다 쏟아서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앞장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런 귀한 성숙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느헤미야를 통해서 너무나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백성들에게는 귀한 소망을 주고, 너무나 존귀한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믿데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느헤미야처럼 성숙한 믿음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좋은 열매 맺는, 가정을 평화롭게 하고, 교회를 부흥케 하고, 나라와 민족을 복되게 할 수 있는 대흥교회의 모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최낙보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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