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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여인의 믿음 (마태복음 15:21-28)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변화되어질 수 없는 것들은 받아들일 수 있는 침착한 마음을 주시고 / 변화되어질 수 있는 것들은 갱신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 그리고 이 둘이 어떻게 다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주옵소서.
수용하는 믿음과 실행하는 믿음
이 기도는 금세기의 유명한 신학자로 추앙받는 라인홀드 니버가 남긴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유명한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변화되어질 수 없는 것들은 받아들일 수 있는 침착한 마음을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변화되어질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키를 염려함으로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타고난 이 용모도 변화가 불가합니다. 이대로 살아야 됩니다. 그러면 이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소원해도 내가 아무리 고행을 해도 도저히 변하지 않는 것은 그저 받아들이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되어질 수 있는 것들은 갱신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하면 좋게 될 수 있는 것들을 위해서 용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만 하면 좋게 변화될 수 있는 것들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행할 수 있는 용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어떻게 다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앞의 기도와 뒤의 기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앞의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이고 뒤의 기도는 내가 순종함으로 성립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루실 수밖에 없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내가 노력하고 순종함으로서 열매가 맺어지는 믿음의 영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두 가지 믿음의 영역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이 둘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은 대단한 믿음의 여인입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예수님은 칭찬을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나 이런 말씀을 안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칭찬받은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믿음입니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여인의 딸의 병을 고쳐줄만큼 그 여인의 믿음을 큰 믿음이라 일컬었습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도성입니다. 마치 우리나라도 역사적으로 악평이 나있는 지방들이 있습니다. 이 두로와 시돈은 베니게 라는 나라에 있는 도성입니다. 악을 아주 많이 저질렀습니다. 이 도성에 예수님이 전도하러 가시는데 그 동네에 한 여인이 나와서 절규를 합니다.
22절에 "가나안 여자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나이다"라고 합니다.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내 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였습니다. 가나안 여자라는 이 호칭은 헬라인 혹은 이방인을 대표하는 호칭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여자라 하면 굉장히 천한 호칭입니다. 이스라엘과 관계없는 이방의 여자를 가나안 여인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그렇게 절규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고 대꾸도 안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이는 자꾸 시끄럽게 하는데 좀 꾸중을 해서 보내십시오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씀입니까? 주님의 의도는 이 여인이 듣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여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파격적인 주님의 저주 섞인 말씀입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러왔지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러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가리켜서 개라고 비유를 했습니다. 개들에게는 내가 떡을 던지러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만은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참으로 굉장한 여자의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 주시고 난 부스러기 은혜라도 내게 주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세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약속에 근거한 믿음
첫째는 이 여인의 큰 믿음입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라는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이 가나안 여자의 믿음은 약속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부를 때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아무 입에서나 나올 수 있는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 됨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여인의 입에서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이 여인은 선지자들이 말씀한 메시야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선지자가 예언했던 메시야로 확신하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것은 그 당시에 있어서 찾아보기 드문 신앙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믿음에서 부르느냐 하는데에 믿음의 본질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신앙고백은 벌써 이 여자의 믿음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확신하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은 지식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 가운데 이 고백을 하면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습니다. 예수가 메시야다, 다윗의 자손이다 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확실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여인입니다.
예수의 주되심
우리는 이 가나안 여자의 믿음에서 한 가지 배워야 되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예수가 주가 되셔야 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여자가 행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십시오. 정말 예수를 주로 그대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박대를 해도 개로 취급을 해도 모욕을 주어도 주가 그러시는데 종된 나는 주인의 처분대로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내게 주인이십니까? 그 분을 정말 주인으로 붙잡고 우리 믿음이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주인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개 취급을 받으면 절대로 그냥 안 있습니다. 주인에게 대듭니다. '은혜를 안주시면 안주시지. 우리보고 개라고요?' 우리는 그만 그 대목에 가서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주인이냐 라는 증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모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그분의 처분대로 끝까지 기다리는 이 여자의 태도가 우리에게 있어야 예수를 주인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상심할 때도 있고 시험들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주인의 자리에서 끄집어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주인된 자리를 침범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겁도 없이 침범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집의 주인으로 계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딸을 향한 열정
그 다음에 딸을 향한 사랑의 열정입니다. 이 여인은 어머니입니다. 딸이 지금 흉악한 귀신에 들려 폐인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 병든 딸을 부둥켜안고 고통하는 어머니로서 지금 주님 앞에 나아가서 애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모든 어머니들은 다 이럴 수 있다고 봅니다. 모든 어머니들은 이런 모정이 있습니다. 이 흉악한 병에 고통 당하는 딸을 둔 어머니는 기본적으로 이 여자와 같이 이렇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행동이 왜 그렇게도 큰 믿음이 되었느냐 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신실된 신앙고백과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믿음의 허점이 있는데도 인간적인 열정은 이 어머니 못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딸을 향한 애착은 이 여자 못지 않는데 이 여자가 갖고 있는 믿음은 내게 없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합해질 때 큰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딸을 향한 사랑에 자기 목숨을 던지는 이 어머니의 열정, 주 예수님이 아니면 내 딸은 희망이 없다, 예수님이 나를 한번 불쌍히 여겨주지 않으면 내 딸은 희망이 없다, 저 분만이 내 딸을 고칠 수 있다는 절대 믿음과 이제 내 딸을 위해서 내가 목숨을 걸고 해야 될 마지막 기회는 이것 뿐이다 라는 것이 합쳐진 것입니다.
빅톨 유고가 쓴 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블란서 혁명직후에 병사들이 숲을 지나가는데 전쟁에 지친 사람들 중에 한 어머니가 아이 셋을 데리고 길바닥에 굶주려 지쳐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상사가 빵을 하나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그 빵을 주워서 세 조각으로 나누어 아이에게 각각 주고는 자기는 먹는 것을 쳐다보고 웃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한 병사가 말하기를 "저 여자는 배가 고프지 않은가 봐." 그때 상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그게 아니야. 어머니이기 때문에 안먹는 거야." 어머니이기 때문에 자기는 굶어도 아이들에게 빵을 나누어주는 것을 기뻐하는 게 어머니의 모성입니다. 그와 같은 모성은 많은 여성들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약속에 근거한 믿음처럼 예수가 진정 내게 주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메시야로 오신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 믿음이 있어야 우리의 열심히 큰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여되면 인간적인 어떤 각오와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끈기의 믿음
그리고 끈기있는 믿음입니다. 응답 받기까지 수모를 감수하는 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여인을 왜 이렇게 높이셨습니까? 이 여자의 믿음을 왜 주님이 드러내셨습니까? 제자들과 무리들이 많이 보고 있는데서 예수님이 이 여자의 믿음을 높이 들어 보여 주셨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참된 믿음은 반드시 드러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 앞에 드러내어 본을 보이고 증거하는 믿음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 믿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오늘 우리도 큰 믿음의 사람으로 살 때 성령께서 나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시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드러내십니다. 큰 믿음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말 아래 있는 등잔이 아닙니다. 지붕 위에 있는 등잔입니다. 이 여인을 무리 가운데 높이 들어서 이 여인을 통하여 불신의 유대인들을 깨우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두로와 시돈에서 만난 여인입니다. 역사적으로 악과 불신과 하나님의 심판의 도성으로 이름나 있는 두로와 시돈입니다. 사사기에서 시돈이라는 도성은 이스라엘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또한 두로 사람들은 헤롯왕에게 아첨을 하였습니다. 헤롯을 두로 사람이 크게 환호해주고 위대한 왕으로 받들어 주니까 헤롯왕이 기고만장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교만하다가 벌레가 먹어서 죽은 사건이 일어난 곳이 두로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저주의 도성이며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도성입니다. 시돈이라 하면 바알과 대등한 아스다롯이라는 우상이 있는 도성입니다. 이런 도성에 이렇게 큰 믿음의 여인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도성에 예수님이 찾아갑니다. 이미 그곳에 가나안 여자가 메시야를 바로 믿고 그 분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가 드디어 자기 동네에 오신 주님을 맞이하는 이 여인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믿음은 환경을 역행합니다. 두로와 시돈에 이런 믿음의 여인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부족하고 여건이 안 좋을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련한 것과 약한 것들을 들어서 지혜롭고 강한 것으로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미련하고 보잘 것 없는 가나안 여자를 통해서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하는 유대인들을 정복하는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의 도성, 범죄한 도성에도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습니다. 세리와 이방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이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유대인들 앞에서 시위하시는 주님의 전도방법인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것을 주님이 직접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일등급의 삶
우리는 가나안 여인을 보면서 인생의 등급을 높이면서 살아야 된다고 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을 세 등급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일 낮은 등급은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업보라고 합니다. 과거에 매이는 것은 인생을 형벌의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상의 죄로 인한 형벌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등급의 인생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조상을 생각할 때에 희망이 없는 곳입니다. 예수가 우리 동네에 와봤자 우리 동네를 인정하겠느냐 그런 식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했던 죄를 생각하면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예수가 우리 땅에 와서 무슨 벌을 내려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의 의식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이등급 인생이 있는데 이것은 미래에 매여 사는 사람입니다.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미래에 매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에 매인 사람들을 보면 현재가 없습니다. 미래만 매여있는 것입니다. 탄광을 개발하는 사람들 가운데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래를 믿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온천을 개발하러 다니는 사람들도 그러합니다. 현재가 없는 미래는 문제입니다. 미래 없는 현재도 문제이지만 현재가 없는 미래는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현재가 없는 미래는 허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의 의식입니다. 이 유대주의자들의 의식을 분석해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현실을 송두리째 무시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는 앞으로 올 것이라는 허망한 미래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지금 왔는데도 저런 나사렛 목수의 아들은 우리의 메시야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메시야는 다시 오신다고 미래를 좇고 있는 유대주의를 말합니다.
일등급 인생이 있습니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현재를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삶의 모습이 일등급의 인생을 우리 앞에 예시해주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볼품이 없습니다. 병든 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아마도 다른 가족이 없는 불우한 여인 같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 앞에서 최선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불행한 일이든 행복한 여건이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현실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주님 앞에 수용하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납니다. 평생동안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것을 내 힘으로 대항하며 일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대항할 수 없습니다. 변화되어질 수 없는 것들은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변화되어질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고난도, 역경도, 운명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셨을 때 이 여인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를 주님 앞에 그대로 안고 나가서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 앞에 나왔지만 은밀히 보면 부끄러운 모습은 감추고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대로 다 주님 앞에 내어놓고 최선을 다하는 예배를 드려야 됩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맺는 말
제주도에는 삼무삼다(三無三多)가 있습니다. 삼무는 울타리가 없고 뱀이 없고 거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다는 여자가 많고 돌이 많고 바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삼무삼다를 적용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우리 안에서 없어져야 될 것이 있습니다. 원망이 없는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또한 탐욕의 욕심을 부리면 안됩니다. 그리고 교만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감사가 있고 평화가 있고 순종이 있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이것을 신앙의 삼무삼다 라고 규정해 봅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오늘도 주님이 찾고 있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하고 믿음없는 이 세대에 우리를 드러내시기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기 원하는 것입니다. 두로에 있는 여인의 큰 믿음을 이 시대에 우리가 본받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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