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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대로 되라 (마태복음 9;27-31)

by 【고동엽】 2022.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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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대로 되라   (마태복음 9;27-31)

부산에 '라이트 하우스'라는 시설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자들을 수용하고 교육시키는 학교입니다. 수용돼 있는 많은 시각장애자들은 여러 가지 등급이 있습니다. 완전히 시력을 잃은 사람,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 이제는 시력의 회복이 전혀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있고 시력을 점점 잃어 가는 진행중인 형태의 시각장애자들도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소경 두 사람은 병이 진행되는 상태가 아니고 확정된 상태입니다. 완전한 소경들입니다. 이제는 희망의 여지가 없는 소경들입니다. 이 정도 되면 많은 사람들은 이대로 살다가 이대로 끝나는 인생이다 라고 체념을 합니다. 당신들은 된다고 하지만 내 경우는 달라. 나는 안돼 이렇게 체념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생이 이 땅에 태어나면 기대감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있으므로 오늘을 삽니다. 아들에 대한 기대, 딸에 대한 기대, 며느리에 대한 기대 등 우리 가족 모두가 기대감을 가지고 가정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기대를 가지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두 소경의 처지를 보면 기대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아무도 이들을 향하여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저 사람들은 언젠가 시력을 회복할 것이다' '저 사람들은 언젠가 훌륭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두 소경의 자세

   그런데 이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예수님께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두 소경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예수가 자기 앞을 지나갈 때 두 소경이 보였던 반응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예수께서 떠나가실 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마9;27-28).
   첫째는 예수를 따라 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는 데로 따라 갔습니다. 눈이 성한 사람이 사람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만 소경이 사람을 따라 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 가운데 이 두 소경이 예수님을 계속 따라갔다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그냥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디까지 따라 갔습니까? 예수님이 어느 집에 머무시는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소경이 보여준 이 모습은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의 자세를 보여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있어도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소경으로서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 틈 속에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어코 라도 만나겠다고 따라가는 소경의 이 자세가 바로 신앙인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때문에 주님을 바라보는 것을 포기합니까? 우리는 주님을 계속 바라보아야 되고 계속 그 분을 따라가야 하는데도 장애물을 핑계로 주님을 따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다섯 가지 거짓말

   스티브 챈들러 라는 사람이 좋은 책을 썼습니다. 「성공을 가로막는 13가지 거짓말」이란 책인데 다섯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첫째는 '너무 바빠 시간이 없어서'라는 말을 자주 쓰는 인생은 별 볼일 없다는 것입니다. 분석해 보면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그 말이 거짓말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세나 관심의 문제이지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거짓말을 자주 쓰는 사람이 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미 쓴 것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전과자입니다. 도리가 없습니다. 너무 많이 이 말을 가지고 거짓말을 많이 했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거짓말을 하면 편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지금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어' 라는 말입니다. 제가 45세 때 학위공부를 시작했는데 지방에 있는 친구가 "이 목사, 쟁쟁한 후배들이 모두 40이 되기 전에 학위를 따고  뛰어가는데 지금 시작해서 뭘 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친구는 내가 하고 나니까 자극을 받아서 시작했습니다. "이 목사, 그 때 내가 말을 잘못했는데 지금이라도 시작하려고 하는데 어떻겠나?" "안 늦었어. 얼마든지 하게." 그래서 5년 후에 공부를 마쳤습니다. 안 늦습니다. '지금 시작하기에는 이 나이에 뭘 해'가 아닙니다. 성공을 가로막는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왜 나에게는 걱정거리가 많이 생기지?' 라는 말입니다. 걱정하는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걱정하는 습관을 버리세요. 안 그러면 걱정하는 대로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걱정대로 되면 안 됩니다.
   네번째는 '사람들이 나를 화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분석해 보면 거짓말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화나게 한다고 생각하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버리면 화가 안 납니다.
   다섯번째는 '너무 오래된 습관이라서 버리기 어렵다'고 변명을 합니다. 버리려고 행동은 안 하고 버리기 어렵다는 생각으로 거짓말을 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요점입니다.
   그러나 두 소경은 이 다섯 가지의 거짓말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비록 눈은 멀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대단히 건강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끝까지 따라 갑니까?

   정확한 신앙고백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어떤 목표를 향해서 뛰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소리 지르며 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욕망은 믿음이 아닙니다.  
   두 소경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이 말에는 두 소경이 예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의도가 있고 기대가 있고 비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이 신앙고백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따라 다니고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도 불이익을 주려고 했습니다. 아무나 공개적으로 예수는 메시야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으로 온 메시야다 라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소경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뜨기 위해서 소리지르고 있는 일차적인 소원이 있지만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해줄 수 있는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오신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지르며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집안까지 갔습니다. 주님께서 그 소경들에게 안수를 해 주시지도 않고 아주 어려운 면접시험을 치르십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저희 믿음대로 되라"(마9;28-29).
   예수님이 그들에게 안수하시기 전에 면접을 치렀습니다. "내가 능히 이일 할 줄을 믿느냐" 여기에 주격이 주님입니다. 너희들이 눈뜨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눈뜨기를 원하여 소리지르며 따라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능히 너희들의 눈을 뜨게 해줄 것으로 믿느냐" 그때 아멘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고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너희 믿음대로 되라는 것은 또 다른 믿음을 요구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사실대로 자연스럽게 대답하십시오.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으십니까?  예수를 믿고 이 자리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다 아멘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 예수를 믿느냐? 라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아멘 하는 것은 쉽습니다.

   쉽지 않은 아멘

   그런데 "너희 믿음대로 되라"는 이 말씀에는 아멘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여기에도 아멘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아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촛점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능이 이일 할 줄을 믿느냐"라고 할 때 믿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믿음이 얼마든지 눈을 뜨게 하고도 남는 믿음으로 평가하셨기 때문에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뒤에 나오는 장면을 해석야만 답이 나옵니다.
   다시 성경을 보면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마9;30-31).
   소경들이 눈을 떴습니다. 이것은 소경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이 말씀대로 믿은 것입니다. 위로부터 하나님이 각양 좋은 은사를 부어주실 것을 믿고 이들은 주님을 따라 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14).
   당신이 그것을 받은 줄로 믿으면 당신은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대로 되라"하는 말씀에서 소경들은 믿음대로 눈을 떴습니다. 그것으로 오늘 성경이 끝나면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눈을 뜬 소경을 보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엄히 경계하시면서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주 의미 깊은 이야기입니다. 왜 예수께서 소경들의 눈은 띄워 주시고는 이 말씀을 하시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눈 뜬 소경들의 신변을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도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뜬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친구가 나가서 예수가 눈 띄워준 것을 전파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그 가족과 함께 출교당한 사건이 나옵니다. 출교는 어마어마한 형벌입니다. 이렇게 눈을 뜬 소경들이 유대인들에게 불이익을 당할 것을 주께서 아시기 때문에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는 예수께서 이적을 베푸시는 것도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베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음놓고 공개적으로 하시는 게 아니라 집에 들어가셔서 두 소경에게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이적을 베푸셨고 이 이적으로 인하여 당사자들이 불이익을 당치 않도록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온 땅에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불복하는 것입니다. 삼가 아무에게나 가서 말하지 말라 했는데도 본문은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온 땅에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기록은 상황을 많이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문맥을 가지고 이 상황을 이해를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부로 이 일을 아무에게나 하지 말라 했는데도 결과적으로 이 소경들이 나가서 온 땅에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온 땅에'라는 말은 '가는 곳마다'라는 뜻입니다. 한 곳에서만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그 일을 말했고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예수의 그 능력을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합니까? 눈 뜬 소경들이 온 땅에 다니면서 예수님이 그렇게도 당부했던 일을 하는 여기에는 우리가 다른 것을 첨가해서 보아야 합니다.

   은혜의 힘

   첫째는 목숨을 건 전도입니다. 소경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갈 위험이 있고 심지어 출교를 당할 수 있고 목숨까지 담보한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를 이 문맥에서 꼭 발견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은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온 땅에 전파하니라"고 했지만 '저희가 나갔다'는 여기에는 나갈 수밖에 없는 강한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경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에게 일어났던 기적, 저희 믿음대로 이루어졌던  그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에게 입혀졌던 그 은혜는 자기들이 시력을 찾고 팔자를 고치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도록 성령이 그들을 몰아낸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함께 이들은 목숨을 걸고 예수의 소문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소원 성취가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시력을 고쳐주시는 안과의사를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메시야로 오셨다는 것은 영생의 문제를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생을 해결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야입니다. 그 메시야를 알기 때문에 메시야를 만난 이들은 눈 뜨고 거기에 머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이 그 자리까지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믿음은 내 소원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소원을 넘어서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을 주실 때에는 우리 소원을 성취하는 것으로 목적을 종결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의 문맥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지만 이들이 목숨을 걸고 나아가서 메시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주님은 속으로 그것이 바로 너희들의 믿음의 능력이라고 박수를 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목적, 그것을 이루어 드리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는 것은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는 그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전부요 믿음의 동기요 믿음의 목적이 될 때 그 믿음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믿음의 기대를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하는 일에다가 믿음을 포함시키기 바랍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소망으로 기대를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만날 때 그 사람에게 기대를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도 믿음으로 기대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주께서 내 생활 속에서 이 일을 이루실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들과 딸들에게, 가족들에게 믿음의 기대를 가집시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는 그 믿음을 불어넣어 줍시다. 그 믿음에 근거하여 아멘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너희 믿음대로 되라는 주님의 음성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입에서 은혜를 해치는 말을 그쳐야 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가장 강한 힘

   이 소경들은 바리새인들도 막지 못하는 전도자로 나타났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들이 부르짖고 따라갔던 예수가 그들과 함께 동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에 대해서 학자들이 좋은 분석을 해 놓았습니다. 첫째 단계는 공격하는 힘이 제일 강하다고 합니다. 수비하는 힘보다는 공격하는 힘이 강하다고 합니다. 삽은 땅을 팔 때 강한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수비만 하는 모습보다는 공격하는 모습이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격하는 힘입니다.  
   둘째로 이것보다 더 큰 힘은 이기는 힘입니다. 이기면 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축구경기를 할 때 슛팅을 20개를 해도 슛팅 2개 한 팀이 한 골을 넣어 이겨버리면 강한 힘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공격하는 힘만 가지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긴 힘을 가지고 자랑하기 바랍니다. 내가 공격을 받더라도 끝에 가서는 이겨야 합니다. 끝에 가서 이겨버리면 도중에서 당했던 것도 다 회복이 됩니다. 게임에서 마지막에 이기면 중간에 부상당한 것도 다 이기는 것이 됩니다. 이기는 힘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세번째로 이기는 것보다도 더 큰 힘은 남을 도와주는 힘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이라 해도 남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을 도와주는 이 힘은 공격하는 힘보다 강하고 이기는 힘 보다 강한 것입니다. 이겨도 남을 안 도와주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겨 놓고는 패배자들을 짓밟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겼으면 패배자를 회복시켜주는 그 사람이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최고로 강한 자라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함께 하는 힘입니다. 이것은 영적이면서 실제적인 최고의 강한 힘입니다. 결속된 힘은 굉장히 강합니다. 성가대에서 연합세미나를 했고 또 교사들도 행사를 치르는 것을 보고 같이 대화도 나눠보고 하는 중에 참 마음의 고무적인 것이 많았습니다. 뭔가 해보려고 힘을 뭉치고 있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약합니다. 그런데 성가대를 위해서, 교사의 사역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 보겠다고 계획하고 힘을 모으고 결속하는 그 모습은 매우 강한 것입니다. 함께 하는 힘이 강한 것입니다.
   이 소경들에게 이제 메시야가 함께 하십니다. 이들은 아무도 해칠 수 없는 강한 전도자들로 예루살렘을 불사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소경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는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믿으면서도 왜 주님이 말씀하신 이것은 아멘하지 못하십니까? 믿음대로 되면 믿음을 주신 예수님의 목적대로 그 믿음을 쓰셔야 됩니다. 거기에까지 우리 믿음이 순수함을 못 가졌기 때문에 믿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맺는 말

   믿음은 기대가 있고 성취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하나님이 우리에게 넘치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적은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기 위해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여기에 착한 일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넘치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고 그 은혜 안에 파묻혀 버리는 은혜를 구할 것이 아니라 넘치는 은혜를 받아서 넘치는 착한 일을 이루어 드리는 이 일을 위해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이 말씀 안에 믿음대로 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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