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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받는 사람(요14:18-24)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몇 시간 앞두고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며 여러 가지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한심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닥쳐올 어떤 환난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어디론가 가신다고 하는 문제로 큰 걱정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만 있으면 설사 파선되는 배 위에 있어도 걱정할 것이 없고, 빈 들에서 배고픔을 만나도 걱정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론가 가시므로 헤어져야 하는 문제 때문에 벌벌 떨며 근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몇 가지의 약속을 주시며 위로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든지, 만났으면 헤어지는 것이 삶의 이치라든지, 끝까지 진실하게 살라는 등 어떤 인간의 도리를 들어서 위로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여기에 기독교와 불교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인생이 무상하다. 그러니 그렇게 알고 위로를 받으라는 어떤 당위적인 이해나 합리적인 이해로는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위로 받을 수 있는 오직 한 길은 다시 만난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귀중한 진리입니다. 다시 만난다는 구체적인 약속이 위로하는 종합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위로에 위로를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적인 약속은 믿을 때만 이 위로가 되는 것이지 믿지 못하면 천하에 없는 약속을 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필요없는 말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이 있지만, 그 약속을 믿는 자만이 약속이 주는 위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앞장에서는 성령에 대한 약속이 있었고 이 본문에서는 부활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본문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약속을 주시되 "오리라, 보리라, 살리라, 알리라, 나타내리라"는 약속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약속들을 받는 제자들이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전혀 위로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본문 28절에 보면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 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아듣고, 또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믿을 수만 있었다면, 지금 가심을 오히려 기뻐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찬송을 부르며 기쁘게 송별회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몰랐고 그래서 위로를 받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후에 성령이 강림한 다음에야 알았고, 믿었으며, 그리고 위로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늘 말씀을 듣지만 말씀을 모르는 자에게는 어떤 위로도 될 수 없으며 말씀의 생명도 없습니다. 언제라도 믿어질 때 그 순간부터 말씀의 능력이 내게 임하고 진정한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 : 18)고, 고아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고아라고 하면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아이들을 말하는데, 헬라 원문의 뜻으로는 단지 아버지가 없음을 뜻합니다. 동양적인 사상으로서 어머니는 있어도 아버지가 없으니, 고아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과부와 고아를 불쌍히 여기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 역시 남편과 아버지가 없으면 둘 다 불쌍한 고아라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로, 예수께서 너희들을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아니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아버지를 바로 찾는 일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를 올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고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석학 임어당 선생님이 40년을 방황하다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면서 말한 첫 마디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지난 40년은 완전히 고아와 같은 생활이었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는 원래 신학을 공부했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는데, 중간에 타락을 해서 40년간 하바드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신론적인 책을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며 지난 생활을 고아 같은 생활이었다고 의미 깊은 술회를 한 것입니다.
고아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치관 전체가 고아라고 하는 그 의식에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령, 아이들이 놀 때에 친구도 좋아하고 장난감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엄마가 옆에 안 계신다 하면, 친구나 장난감이 전혀 흥미 없습니다. 아빠 엄마가 계시고서야 친구도 장난감도 소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 없이 고아의식을 가지고 자라나면 항상 울적하여, 철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불안이란, 어느 사건에서 정의하기를 "이유 모르는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배가 고프거나 누가 괴롭힌 것도 아닌, 즉 뚜렷한 이유없이 늘 불안한 것입니다. 또한 좀 자란 아이들은 함께 어울려 놀 때는 고아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됩니다. 그러나, 해가 져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면 완연히 달라집니다. 한 편에서는 서둘러 아빠 엄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지만, 고아들은 해지는 들녘을 바라보며 서성거립니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는 장례식 때 드러납니다.
믿는 사람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므로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갔다가 다시 올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웃은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의 관계로 살아갑니다. 지구는 아버지의 집으로써 아버지의 품안에 살고 있으므로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므로 평안합니다. 베드로가 풍랑을 만나 몹시 두려워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적게 믿는 자여, 어찌 의심하느냐"고 귀한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사는데 풍랑이 문제입니까? 분명히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겠다고 하셨으므로 고아의식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고독이나 고독으로 오는 불안은 불신앙에서 생기는 부산물이므로 분명히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행동이나 기분까지도 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의식으로 살아야 하며, 특히 십자가로 보증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산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오리라고 다시 오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뜻을 몰랐습니다. 온다는 말에서 그저 어딘가에 가셨다가 다시 오는 물리적인 현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사실 "간다"라는 말이 "죽음"을 의미하고 "온다"는 것이 "부활"임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잠깐 가는 것이고 또 올 것임을 믿습니다.
유명한 피터 마샬 목사님께서 세상 떠나실 때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마샬 목사님의 임종 시간이 가까워 오자 부인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납시다"라고 말씀하시며 돌아가셨다 합니다. 부인은 여기서 믿음의 용기를 얻어 "나의 남편은 목사였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그녀는 계속 글을 써서 여러 권의 책을 내어 미국의 베스트 셀러 작가로 유명하게 된 것입니다. 필자는 이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에 하늘 나라를 알게 되었고 거기서 받은 영감과 감격이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피터 마샬같은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는 그저 "갑니다. 또 만납시다"하며 잠깐의 이별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장례식이라고 말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히 끝났다고 생각하여 영결식이라고 말합니다.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남은 옷가지를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유해를 안장하는 예식일 뿐 영결식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갔다가 다시 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요 주께서 하신 약속입니다.
제자들도 좀 분명히 알았으면 그들의 태도는 달라졌을 것이지만, 몰랐고 믿지 않았기에 우울했으며 근심했습니다. 또, 한 가지 여기에 신학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얼핏보기에는 부활과 성경강림이 엇갈리어 어디까지가 부활을 말하며 어디까지가 성경강림을 말하는 것인지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잘 읽으면 "오리라"는 말씀은 부활이며 "내가 너희 안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성령의 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 여기에 "보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계속 보기를 원합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다녔을 때 그들이 보지 못해서 믿지 않았습니까? 보지 않아도 아는 자는 알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자는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보고 싶어하므로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볼 것이다"라고 주님은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부활하신 후에 분명히 나타나시어 약속대로 그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다음,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고 과거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적인 독특한 표현이며, 또한 헬라 사람들은 확실한 미래를 나타낼 때 과거사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내가 살았고 지금도 살고 앞으로도 살 것이라고 확실한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너희도 살겠다는, 즉 절망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귀한 약속들을 그 당시에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뒤늦게 사건들이 현실화한 다음에야 깨닫고 기뻐했습니다.
필자는 그들이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생애 속에서 한 가지, 두 가지씩 말씀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항상 일이 터진 다음에야 알게 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가령 돈이 있을 때 귀한 줄 알아야 하는데, 다 잃어버리고서야 귀한 줄을 알게 되니 딱하다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젊음의 가치를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늙고 병든 다음에야 젊음의 귀함을 뼈저리게 느끼니 답답한 것입니다. 필자는 젊은이들에게 자주 말합니다. "돈이 없어도, 애인이 없어도, 명예가 없어도 불평하지 마시오. 젊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최고로 행복한 줄 아시오." 그러나, 젊은이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 말의 뜻을 알게 될 때는 이미 늙은 후이니, 진작 알 수 있다면 대단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음은 "알리라"고 성령이 임하므로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까?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음을 안다는 말로써, 이것은 중요한 신인식론(神認識論)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으며, 그 소원 안에 내 소원이 있고 그 안에 내 생명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위를 쳐다보라.
위에는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 안에 우리의 생명이 감추어 있느니라"고 하셨는데 정말 신비로운 은혜입니다. 예수 부활이 나의 부활이요, 예수 승천이 나의 승천으로 지금 예수께서 보좌에 계시니 나도 지금 원칙적으로 그 곳에 가 있는 오묘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으므로, 지금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사는 것임으로 나의 행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로써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신앙적 인식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이요 현재성을 말하는 것으로 존재의 문제로써 신비로운 역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넓은 사랑 그리고 놀라운 능력이 그대로 생활 속에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나는 도망간다고 했지만, 이미 그에게 붙들려 있고, 한 번도 내 마음대로 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의 품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보면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 있게 됩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나타내리라"는 계시의 신비를 말씀하십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여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자만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믿어지고 믿어져야 알게 되는 것이니까요, 들었고, 본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압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무엇인지 모르다가 어느 순간에 부모를 사랑하고서야 그 한마디 한마디가 무엇을 말해 주는가를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이 없는 이유는 자기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42과 12:43을 비교해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사랑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형제를, 이웃을, 교회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도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잘못된 자기 사랑으로 상대방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도, 줄 수도 없단 말입니다. 이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면 알 수 없으므로 결국 모르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랑을 받아도 모르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랑에 묻혀 죽어도 내가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사랑을 전혀 모르니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자만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속을 때 속더라도 끝까지 믿습니다. 사랑이란 때로는 눈이 어두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귀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능력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창의력이 있습니다. 둘째는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고 계명을 지키면 저들에게 내가 나타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랑은 순종을 낳고 순종하게 되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순종은 계시받은 자의 기본자세입니다. 사랑하면 계명이 지켜집니다. 사랑은 곧 행동으로 수고로 나타나고, 때로는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이므로 나도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계시하시며 자기를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째는 사랑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사랑을 받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영국의 어느 시골에 작은 교회를 담당하고 계시는 젊은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시골인 데다가 가난한 교회여서, 목사님의 생활은 아주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어느날 런던에 사시는 지체 높은 장로님이 여행 중에 이 작은 교회를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배를 참석하여 젊은 목사님이 은혜가 많고 설교가 퍽 좋아 대단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마침 그 때 런던에 있는 장로님 교회는 목사님이 계시지 않아 목사님을 모시기 위한 의논들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장로님은 본 교회로 돌아오시어 자기가 본 젊은 목사님을 모시기를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그 목사님의 설교를 우선 들어보기로 결의하고 시골에서 목사님을 모시어 설교를 들었습니다. 온 교인들도 감동과 은혜로 충만하여 당장 모시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목사님도 대단히 좋았습니다. 이제 생활도 좀 나아지고 시골에 비해 수도인 런던의 생활은 여러 가지가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고생하는 아내에게 전보를 쳐서 빠른 시일 내에 이사 준비를 하라고 전하고 시골로 향했습니다. 무엇보다 아내에게 고생을 좀 면하게 하는 것이 기뻤습니다. 이사 짐을 꾸려서 출발하려 하는데 문 밖에서 교인들이 아무 말 없이 눈물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시지 말라고 붙들 수도 없고 그저 울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서로 말없이 바라보다가 약속이나 한 듯이 발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들어가 이사 짐을 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날 저녁, 목사님은 책상에 앉아 귀한 영감을 받아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525장을 작사하셨습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하나님 보좌 앞 한 기도 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안에 하나라.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하는 중 위로를 나누리.
또 이별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주안에 교통하면서 또 다시 만나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여 사랑으로 희생할 때 그에게 하늘 문이 열리는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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