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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계시적 의미(사도행전 2장 22~23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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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계시적 의미(사도행전 22223)

 

이스라엘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때로는 일방적으로, 때로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창조적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해주십니다. 이른바 이적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 이적이라는 것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총론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적을 생각할 때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적을 계시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이적입니다 마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 볼 때에는 이적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이 볼 때에는 깜짝 놀랄만한 일이지만 하나님 편으로 볼 때에는 놀랄 것도 아니고 별일도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라고 하는 것을 사용합니다. 이 컴퓨터라는 것도 알고보면 기적입니다. 생전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귀신같은 물건이 아니겠습니까? 그밖에도 우리들의 일상에는 깜짝놀랄만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만일에 백 년 전에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 요즈음 세상을 본다면 아마도 질겁을 해서 도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만큼 신기한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타성이 생겨서 신기한 줄을 모를 뿐입니다.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이적인 것을 두고 이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적이란 무엇인가? 간단한 우리말사전에서는 이것을 '기이한 행적' 또는 '인간의 머리로 생각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 '신의 힘으로 되는 불가사의한 일' 등으로 풀이해놓았습니다. 몇 가지 영어사전을 더 찾아보니, 웹스터 사전에서는 '물질계에 알려진 자연법칙을 넘거나 그 법칙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초월한 사건, 또는 초인간적 섭리에 따라 발생한 비범하고 파격적이며 비정상적인 사건'이라 설명하고 있으며, 윌리엄 테일러 사전에서는 '보통 이차적인 원인과 그 결과 때문에 발생하지만 그 원인들의 일반적인 작용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인간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라고 주장하는 자를 통하여 전해지는 메시지를 확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일들'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경험, 인간의 지식이 만나는 순간,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그 역사를 볼 때에 이적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적은 하나님의 세계와 우리 인간이 만나는 접점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목적적으로 베푸시는 사건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색다르거나 놀라운 일이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을 발견했을 때면 ', 굉장하구나' '놀랍구나' 하지만 그런 것을 두고 이적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데 하나님 편에서 어떤 목적이 있어서, 어떤 뜻이 있어서 우리에게로 다가오시고, 그리하여 우리 인간의 지식과 경험을 초월하거나 무시하고 우리 가운데에 나타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 사건은 우연의 소산이 아니고 분명히 목적이 있습니다. 결국 이적이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크게 여섯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첫째, 잠언적(격언적)으로 말씀을 주십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그렇습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19:24)"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9:41)"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4)"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23:12)"-한마디 한마디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격언적 표현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신구약 전체에 걸쳐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표현을 즐겨 써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의 이야기로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지 않았느냐, 나와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고생을 하지 않았느냐, 아브라함이 백 세에 아들을 얻지 않았느냐. 늙어서 죽은 몸이나 다름없던 사라가 그 늘그막에 아들을 낳지 않았느냐.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친 일이 있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을 들어 설명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째, 설교로써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이 사용하셨고, 옛 선지들도 자주 사용한 방법입니다. 설교란 어떤 주제를 놓고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입증하는 일입니다. 설교에는 성경 말씀을 많이 인용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인용하고 신약성경에서도 인용하면서 우리 실생활의 테두리 안에서 설명해나가는 것이 설교의 특징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적 증거와 우리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만남을 통하여 진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교입니다.

넷째, 씨뿌리는 자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등과 같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사용하신 방법으로, 저도 지난 2년 동안에 걸쳐 예수님의 비유를 집중적으로 강해 해드린 바 있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의 행위가 그대로 말씀입니다. 가시는 것, 오시는 것, 만나시는 것-예수님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이 모두 교훈이며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축제가 있어 방방곡곡으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시골사람들이 도시에 나왔으니 구경거리도 많고 어울릴 사람도 많습니다. 이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조용하게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시고 38년된 병자를 만나십니다. 가장 외로운 사람을 만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 이대로가 우리에게는 엄청난 교훈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를 던져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나하고 가까운 사람 옆에 앉았습니까, 낯설거나 외로워 보이는 사람 옆에 앉았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자리를 잡을 때에도 어떤 자리에 앉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되도록이면 낮선 사람, 처음 보는 듯한 사람과 나란히 앉아주는 것도 작지 않은 봉사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가령 교회에 나올 때마다 아는 얼굴이나 찾아서 나란히 앉아 쑥덕쑥덕 잡담이나 하는 것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부터 못됩니다. 친한 사람과 자주 만나는 것,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크리스찬인 우리는 되도록 낮선 사람을 일부러라도 자주 만나야 합니다. 일삼아 찾아서 만나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축제 분위기에 휩쓸려 넋을 팔고 있던 그때에,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외로운 사람을 찾아 홀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의 그 행위는 그대로가 위대한 말씀입니다. 굉장한 말씀입니다. 말씀이 없어도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간시간 기도하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새벽기도'-우리도 새벽기도를 나옵니다마는 이것은 누가 가르쳐서 되는 행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새벽기도 하라"라고 가르치신 적은 없습니다. 묵묵하게 몸소 실천하는 행위로 가르치셨습니다. 아무런 기척 없이 미명(未明)에 조용히 빠져나와 한적한 곳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말씀이 없으셨어도 당신의 그 행위 자체가 제자들에게 언어보다 더 강력한 말씀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땅히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새벽기도 나올 때에 조용히 빠져 나오십시오. "나 새벽기도 간다!"-무슨 장도(壯途)에라도 오르는 것처럼 이렇게 광고하고 나서지 말 것입니다. 남의 곤한 잠 다 깨워놓고 내 장단에 야단 피우고 수선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새벽기도 간다고 해서 잠든 제자들을 깨우신 적이 없습니다. 조용히 홀로 빠져 나오셨습니다. '너희도 이같이 처신하라'-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이 다 그러합니다. 제자들을 임명하실 때나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나 어려운 일 당할 때나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이나, 중요한 때에는 언제나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이 행위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리 없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일 결정할 때에는 철야기도 하라'-이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해봅시다. 좋으니까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 것인지, 아니면 밤을 새워가면서 진지하게 기도해본 연후에 결혼을 하기로 결정해야 할지. 이러한 문제도 대처할 방법을 예수님께로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행위, 행적이 그대로가 다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이적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부터 예수님의 이적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것,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 무화과나무를 책망하신 것 이런 일이 모두가 이적이요, 이적은 곧 말씀인 것입니다. 구체적인 말씀이요 사건으로 나타난 말씀입니다.

확실한 말씀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말씀이요, 만질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적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그 이적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 목적이었습니다. 병자를 고치십니다. 이러실 때에 보면 병자를 고치시는 것에도 의미가 있지만 어떤 때에는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 제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시는 것 같습니다. '잘 보아라. 이런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다'하고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행하신 모든 이적에서 우리는 그러한 교육적 의의를 읽게 됩니다. 거듭거듭 말하지만 이적은 곧 계시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인간에게 계시적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이것을 이적이라고 말합니다. 그 속에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적을 통하여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큰 이적을 대하면 그 앞에서 우리 사람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님을 실감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무시무시한 풍랑을 잠재우십니다. 이러한 이적 앞에서 제자들은 기가 죽습니다. "우리 인간은 실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구나!"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밤새도록 물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하여 낙심해 있는 아침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베드로에게 명하십니다. 잡힐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베드로는 그 말씀에 따릅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만큼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잡혀 올라왔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 앞에서 완전히 무릎을 꿇고 맙니다. 그물을 끌어올리다말고 예수님께 다가가 꿇어 엎드리고 아룁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5 : 8)." 그 이적 앞에, 그 큰 능력 앞에 ''라는 존재는 비할데 없이 초라한 것임을 절실히 깨달은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적은 사람을 이같이 겸손하게 만듭니다. 온유하게 만듭니다. 교만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완강한 사람을 양같이 온유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적은 곧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요, 사건으로 나타나는 주의 권능인 것입니다.

이적은 논리적으로나 지식적으로 판단할 여지가 없습니다. 인간의 작은 머리로 어찌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믿느냐 안 믿느냐입니다. 이적을 보고 과학적이냐 비과학적이냐 따질 것이 아닙니다. 일찍이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왈가왈부할 것이 아닙니다. 눈앞의 이적을 사실로 받아들일 따름입니다.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부활하신 것으로 믿든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믿든지 택일하면 그만입니다.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느니 어떻다느니 하고 작은 머리로 교만을 떨 일이 아닙니다.

이따금 공연한 걱정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시체를 화장시키자는 소리가 나옵니다. 이럴 때에 펄펄 뛰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도 안 된다. 화장시켜버리면 나중에 어떻게 부활한단 말인가?" 이것은 공연한 걱정입니다.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에는 아시는 대로 원형극장에서 사자한테 먹히고 만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그 훌륭하신 분들을 사자가 삼켜버렸습니다. 사자 뱃속에서 소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장차 이분들은 부활 못하고 말겠습니까? 육신이 사라졌다고 부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두가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쓸데없는 생각은 가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해보아야 아무짝에도 소용없습니다. 무엄하기 짝이 없는 짓입니다. 신학자 해밀턴은 하나님의 능력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분석하고 저울질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두고 "여섯 개의 문짝으로 여덟 개의 문틀을 막는 것과 같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문틀은 여덟 개인데 문짝은 여섯 개밖에 없습니다. 앞과 옆의 문틀을 잘 막아놓았는데 뒤쪽의 문틀 두 개는 문짝이 모자라 막을 수가 없습니다. 바람이 앞쪽에서 불어오면 그런 대로 견딜만합니다. 그러나 뒤쪽에서 바람이 불면 막아놓은 여섯 개의 문짝은 있으나마나 입니다. 앞의 두 문을 떼어다가 뒤를 막습니다. 옆에서 불면 옆을 막고, 다시 앞으로 돌아 불면 그쪽으로 문짝을 들고 뛰어갈 것입니다. 이렇게 이쪽 막았다 저쪽 막았다 하지만 아무리 왔다갔다 해보아야 여섯 개의 문짝으로 여덟 개의 문틀을 막는다는 것은 끝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니 판단이니 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쪽을 뜯어 맞추면 저쪽이 틀어집니다. 저쪽을 끼워 맞추면 이쪽이 벌어집니다. 아예 맞출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측정하려드는 것이니 잘못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적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아는 일입니다. 이적의 계시적 의미를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적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적을 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이것을 알면 됩니다.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적은 믿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믿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고 하는 것을 믿게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믿게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특별히 예수님의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나타난 이적이 중복되는 것을 빼고 보면 얼추 서른다섯 가지쯤 됩니다. 크게 나타난 것만 추려보았을 때 서른다섯 가지 정도 되는데, 그 중 일곱 가지가 자연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풍랑을 잠재우셨다든가, 물위로 걸어가셨다든가, 또는 무화과나무를 저주 하셨다든가 하는 이적들입니다. 나머지 80퍼센트 정도는 전부가 병고치신 이적입니다. 여기서는 앞으로 그런 이야기를 조금씩 해나갈 것입니다.

우선 신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적의 용어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주로 세 단어가 나타납니다. '깜짝놀란다'는 뜻의 '모페트,' '구별된다'는 뜻의 '펠레,' 그리고 '오트'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표적(表蹟)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모페트'는 영어로 '원더(wonder)'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십니다. 그 사건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생전처음 볼 뿐만 아니라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왔으니 깜짝 놀랄 일입니다. 홍해가 갈라졌으니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이런 사건 앞에서 우리 작은 인간은 별 수 없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적은 일회적인 것입니다. 자연과학적 사건이라면 반복됩니다. 같은 일이 또 있고 반복되면 자연과학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단 한 번밖에 없는 일이면 그 일을 두고 기적이라고 합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일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반복되는 사건이라야 자연과학적 이론으로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 찬송가 책을 손에서 놓아봅시다. 땅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놓을 때마다 떨어집니다. 여러분이 그리해도 그렇고 어느 누가 그리해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입으로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손에서 물건을 놓으면 떨어진다." 그런데, 한번은 손에서 놓았더니 이상하게도 그것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다시 한번 놓았더니 이번에는 올라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리해보아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다시는 올라가지 않습니다. 다만 한 번만 그랬습니다. 그래서 기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 사실을 믿느냐 안 믿느냐 입니다. 대답은 하나 뿐입니다. 이 사건을 눈으로 본 사람이 믿습니다. 설명할 길이 없으니 설명은 하지 못하지만 직접 목격한 사람만은 믿습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기적입니다. 크고 작고 간에 단 한 번 발생한 사건은 대개 기적으로 처리됩니다.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면 그 사건은 자연법칙의 테두리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깜짝 놀랄 일--'모페트'로 표현되는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 번 나타나는 것입니다.

'분리한다' '구별된다'라는 뜻의 '펠레'는 이적을 두고 보통의 사건을 이해하듯이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전혀 다른 것'이라는 의미에서 '펠레'라고 합니다. 물론 '놀랍다'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표적'이라는 뜻의 '오트'는 영어로 '사인(sign)'에 해당합니다. 이 말은 조금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표적은 하나님의 행위이며 계시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건이 사건 그대로 그치지 않고 그 속에 의미가 있고 말씀이 있고 뜻이 들어 있다고 해서 '오트'라고 부르게 됩니다.

신약성경에서 특히 마태, 마가, 누가의 세 공관복음에는 이적을 나타내는 말로 두 단어가 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테라스''이적 (異蹟)' '기사(奇事)'로 번역됩니다. 깜짝놀란다(wonder)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놀랍다, 초자연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영어 '다이내믹(dynamic)'의 어원이기도 한 '뒤나미스''능력'이라 번역됩니다. 이 단어가 말하는 것은 어떤 능력이 나타났는데 그 능력의 궁극적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건의 원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속에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사람의 손이 가거나 사람의 지혜가 발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그래서 뒤나미스라고 부릅니다. 공관복음에 주로 이 두 단어(테라스와 뒤나미스)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으로 건너가면 같은 사건을 달리 해석하고 있습니다.

'세메이온'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오트'와 함께 '표적' 혹은 '상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놓고도 우리는 그 사건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가령 어린아이들은 어머니가 매질을 하면 우선 아프다는 것밖에 생각할 줄 모릅니다. 심지어 조금 영악한 아이들은 '때릴 테면 마음대로. 때려보아라, 때려봐야 자기 아들 아프지, 내 아들 아프냐!'라고까지 생각한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좀더 못된 아이들은 '두고보자. 내가 조금만 더 커봐라. 가출하고 말겠다. 지금은 얻어먹으려고 하는 수 없이 같이 산다마는……'하고 이를 간답니다. 맞으면서 아프다는 것밖에 생각지 못해요. '왜 때려?'하고 불평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매를 고맙게 생각할 줄 알게 됩니다. 이 회초리에 사랑이 깃들어 있다, 이 매질에 훈계가 있다, 내가 사람되라고 때리시는 것이다. 지금 무엇인가를 나한테 가르쳐주시고 있다-이렇게 생각할 줄 알게 됩니다. 이 정도로라도 고맙게 생각할 줄 알게 되려면 아마도 나이 서른은 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란 참으로 늦게야 철이 나는 것 같습니다.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이 상해에서 임시정부 주석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하도 먹을 것이 없던 때라 어머니가 장바닥에 나가 시래기를 주워다가 깨끗이 씻어서 국을 끓였습니다. 저녁 밥상에 그것을 내놓았더니 아들인 김구 선생이 묻습니다. "이 배추 어디서 났습니까?" "내가 시장에 가서 좀 주워왔다" "아이구 어머니, 제가 명색이 국가 주석올시다.

체면도 좀 생각해 주셔야지요. 주석의 어머니가 장바닥에 나가 시래기를 주우시다니요?" 슬픔을 감추려고 우스갯소리 삼아 한 말씀 드렸는데 웬걸, 어머니의 안색이 싹 바뀝니다. "냉큼 일어나 종아리 걷으렷다!" 어머니의 손에는 수저 대신 어느새 회초리가 들리어 있고, 그 입에서 추상같은 꾸지람이 쏟아져 나옵니다. "네가 언제부터 그다지도 건방지게 되었느냐!" ! 회초리가 늙은 아들의 종아리에 휘감깁니다. 사정없이 때리고 계십니다. 김구 선생, 이 늙은이가 매를 맞으면서 훌쩍훌쩍 눈물을 흘립니다. 그 얼굴을 어머니가 쳐다보시더니 "다 큰 것이 울긴 왜 우나?" 하시고 안쓰러워하는 눈길을 보내십니다. 김구 선생, 입을 열어 울먹이며 대답합니다. "작년 때리실 때보다 어머니의 매에 힘이 덜합니다." 하루하루 더 늙어 가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니 안타까워서 훌쩍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만하면 철난 사람입니다. 이렇게 철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어머니도 참 너무하십니다. 이 나이에 매질이라니요? 이 나이, 이 체면에 어린아이같이 종아리를 걷으라시니, 너무하시지 않습니까?"-이렇게 나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모름지기 우리는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그 사건 속에 숨은 의미를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병이 들었다면 병든 이유, 그 깊은 뜻을 헤아려야 됩니다. 상징(象徵)의 의미가 통하지 않는 자는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선물이라는 것을 주고받을 때에도 그 의미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이건 얼마짜리구나.' 이렇게만 생각해서야 되겠습니까? 결혼할 때에도 보면 요사이는 너무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마는 혼수 문제로 퍽 복잡해집니다. 그런데 저는 얼마 전에 인천서 보기 드문 광경을 보았습니다. 신랑이 결혼 선물로 종이에다 싼 무엇을 주는데 알고 보니 흙이었어요. 흙이 될 때까지 사랑하겠노라-그런 뜻이었답니다. 지나치다 싶을는지 모르나 그 상징하는 뜻이 갸륵하지 않습니까? 신부도 희한한 선물을 하는데 무엇인고 하니 줄넘기하는 줄을 둘둘 만 것이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당신의 건강뿐입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십시오-이런 뜻을 담은 것이랍디다. 이 또한 상징하는 뜻이 갸륵하지 않습니까? 돈을 얼마나 들였느냐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가상합니다. 어디까지나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처녀가 결혼을 하는데, 시아버지가 굉장한 부자인데도 결혼반지 받기를 사양했다고 합니다. 신랑 되는 사람이 공부하는 중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이 스스로 벌어 가지고 구리반지라도 하나 해준다면 기꺼이 받아 끼겠지마는 시아버지 돈으로 마련한 반지는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시아버지가 퍽도 흐믓해 하시더랍니다. "우리 집에 복 덩이가 굴러 들어왔다"며 기뻐하더랍니다. 보기 드물게 쓸만한 처녀가 아닙니까? 도둑질한 돈이라도 좋으니 많이만 가져오라고 하는 심보와는 전혀 다릅니다. 남편이 스스로 땀흘려 번 돈으로 해주는 것이라야 내게 선물이 되지, 재벌 시아버지가 해주는 몇 캐럿짜리 다이아몬드는 나하고 상관이 없다-이것입니다.

여러분, 의미를 알아야 됩니다. 의미가 중요합니다. 말씀의 의미를 알아야 됩니다. 말씀의 뜻을 알아야 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 가운데 일곱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병 고치는 이적입니다. 혹이 생각하기를 '숫제 처음부터 병에 걸리지 않게 하시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적을 이적으로 받을 수 있는 계기까지 마련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적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말씀들을 수 있는 계기까지도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병 고치는 것만 이적이 아니요 병드는 것부터가 이적입니다. 날 때부터 눈먼 소경에 대하여 예수님 친히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9:3)." 배고프다가 빵을 얻으니 빵이 귀한 것입니다. 배부른 사람에게 빵 한 개는 별 무의미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우니까 사랑이 그립고, 사람 하나 찾아오는 것도 고맙고, 악수 한번 해주는 것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출세하고 부자 되고 잘살아보십시오. 누가 찾아오면 귀찮기나 하지 거기서 무슨 사랑을 느낍디까?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뜻밖에도 평소에 별로 가깝게 지내지 않았을 뿐더러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던 먼 친구 하나가 문병을 옵니다.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거기서 사랑을 느낍니다. 그러나, 내가 한창 사업에 바빠 돌아갈 때에는 사람 찾아오는 게 썩 반갑지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적을 이적으로 받을 수 있는 계기까지도 만들어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병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요 하나님의 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병 고치는 것만 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병드는 것부터가 이적입니다.

병들었다가 나았을 때만 감사할 것이 아닙니다. 병든 것 자체부터 감사할 수 있어야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병에 걸리면 마귀가 걸리게 한 줄 알고, 병이 나으면 하나님이 낫게 하신 줄 알지만 천만에요. 병 걸리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병 걸리게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한마디로 해서 하나님의 높은 지혜와 능력, 그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을 수 있는 계기까지도 하나님께서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9장의 눈먼 소경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 자체부터 하나님의 높은 경륜 속에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과 만나는 이 절정적이고 극적인 순간을 위해 그는 40년 동안을 괴롭지만 장님으로 살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낫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그 계기를 만들어서 마음 문을 열게 하고 마침내 그 이적 속에 담긴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 기적은 인도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합니다. 잘못된 길로 갈 때에는 그 길을 끊어버리십니다. "사단도 병들면 천사가 된다"라고 조지 폭스(George Fox)는 말했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병이 들면 꼼짝못합니다. 병든 사람이 도둑질을 하겠습니까, 살인을 하겠습니까? 아주 병들면 못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러고 보니 병이 좋은 일을 많이 합니다. 못된 길로 가려는 사람을 가로막지 않습니까? 담배끊어야 될 줄 알면서도 끝까지 못 끊는 사람, 덜커덕 병 걸리니까 냉큼 끊어버리더군요. 진작에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보십시오. 끊어야 되겠다고 하면서도 못 끊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끊게 하십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를 궤도수정 하십니다. 이리 가던 것을 저리 가게하고, 이런 일 하는 사람을 저런 일 하게 만드십니다. 심지어는 정을 이기지 못해서 끊지 못하던 것을 끊게 하시고, 고향을 떠나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게도 하십니다.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나가십니다.

이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온유한 마음과 믿음입니다.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큰 이적 앞에서 사람은 내 존재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끓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5:8)." 사건을 통하여 하시는 말씀의 뜻을 잘 알아듣기 위하여, 순종하기 위하여, 그리고 여호와를 찬양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적을 공부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구원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내게 향한 하나님의 개인적인 능력을 믿고, 죄사함을 믿고,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이적을 아는 사람은 믿고, 하나님께 오늘도 내일도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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