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구하라, 주시리라(야고보서 1 : 5-8)

by 【고동엽】 2022. 7. 9.

 

목차로 돌아가기

구하라, 주시리라(야고보서 1 : 5-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는 사도 야고보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말씀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 교회의 제일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서 제 1 대 감독으로 봉사하고, 그리고 마침내 순교를 하지만, 그의 목회 교구와 선교지는 그 예루살렘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흩어져 있는 모든 나라 모든 곳에 가 있는 유대사람들, 적어도 그 유대사람 전부가 하나님의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선민의 사명, 곧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흩어져 있는 유대사람들이 지고 있는 선교적 책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사람들이 어디에서 살고 있건 그 현지에서 그리스도인된 삶을 바로 살면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귀한 역사가 일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지금 흩어져 있는 유대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목회자입니다. 동시에 선교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목회적인 입장에서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문제가 무엇이냐부터 생각했습니다.

그가 파악한 문제의 첫번째가 '시험'이었습니다. 시험을 잘 이겨내야 되겠는데,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의 참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잘못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적으로 말씀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지난 시간에는 이 '시험'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기도'입니다. 믿는 사람은 기도를 합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기도의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면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곧 기도생활입니다. 기도 없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보면 아주 큰 오해가 있습니다. 신앙을 윤리적으로 해석하려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별일인가,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선한 마음으로 이웃에 사랑을 베풀고 봉사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지-이렇게만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예수 믿은 후에 드러나는 결과일 뿐입니다. 근본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기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기도가 우선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곧 기도생활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기도의 자세가 바로되어 있는 사람이 예수 잘 믿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자세가 성서적일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이방적(異邦的)이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적이라는 말은 이방사람들이 자기네 우상에게 하는 것에서 이름만 바꾸어 부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한 기도를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기도' 에 대하여 말씀하는 의도도 바로 이것입니다.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특별히 '기도' 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기도의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시험''기도'를 연결 시켜보겠습니다.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라고 합니다마는 그 기쁘게 여기는 방법이 따로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은 기도입니다. 기도로부터 응답 받아야 비로소 시험을 만나도 기쁘게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쁘게 여기라 했다고 무조건 기쁘게 여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기쁘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은 기도의 응답에서 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시험'의 문제를 거론하고 바로 '기도'의 문제로 들어간 것은 그 때문입니다. 또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고 말씀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방법도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참을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인내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인내의 힘이 기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바른 자세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기도의 대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기도를 하려면 기도의 대상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늘 외는 주기도문을 보십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기도의 대상부터 부릅니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에는 '하나님' 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부를 때에는 아버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니 여호와니 전능하신 자니, 여러 가지 호칭이 있습니다마는 가장 가깝게 느껴지고 가장 정겨운 호칭은 단연코 '아버지' 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기도의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 거기로부터 자연히 기도의 자세가 나오고 기도의 내용, 곧 기도의 제목도 나올 것입니다. 간혹 기도한답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왜 소리를 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상이 누군데 감히 주먹질이요 발악입니까? 사람에게도 안 통하는 것을 감히 하나님 앞에서라니요.

부모님 앞에 가서 뭘 달라고 할 때에 바락바락 소리지르며 대듭니까?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안될 일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경건을 잃어버린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주신 교훈 가운데 빠뜨리신 것이 하나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6 : 7)"라는 말씀에 "소리를 크게 내야 하는 것이 아니니라"라는 항목을 괄호에 넣어서 라도 추가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설령 이 말씀이 없어도 눈치로 알아차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고행을 해야 되는 줄로 압니다. 피땀을 흘리고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여야 들어주실 줄로 믿고 있습니다. 그것도 잘못된 태도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금식기도를 해야 들어주실 줄로 믿는 것은 어린아이의 투정과 같은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화가 나거나 불만이 있으면 대뜸 밥 안먹겠다고 합니다. 걸핏하면 굶겠다고 대듭니다마는 안먹으면 저 배고프지 남이 배고픕니까?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까? 기도도 그렇습니다.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는 데서 그런 현상이 생깁니다. 하나님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안다면 감히 그런 일들이 통하기나 합니까? 불손한 자세가 통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기도의 대상을 바로 이해하면 거기에 따라서 기도의 내용과 기도의 자세가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목청을 높여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 이것은 하나님 앞에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보다 이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과연 어떠한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까? 세리가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고래고래 소리질렀겠습니까? 조용히 고개 숙여 기도했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기도의 자세가 경건해야 합니다. 말을 길게 한다고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저녁에 혹 집에서 기도할 때에도 누가보고 안보고가 문제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앉아서 기도하지 마십시다. 잠깐일지라도 옷을 바로 입고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뻔뻔하게 드러누워서 '하나님, 나 잡니다'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전화를 받아도 어른이 한 것이면 일어나 앉아서 바른 자세로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안 보인다고 누워서 받아서는 안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허리라도 부러졌으면 모르거니와 어떻게 그런 자세로 기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세만으로도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다 말해야 되는 줄로 알고 모조리 주워섬기는 열람식 기도만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이 누군인가를 야고보는 자상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꾸짖지 아니하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다소 잘못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너그럽게 봐주십니다. 제아무리 철저히 해도 하나님 앞에서 실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잘못되는 것이 있습니다. 실수를 아예 각오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꾸짖지 않으십니다. 따타부타 이론적으로 따지지 마십시다. 하나님께는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끝까지 풀이가 잘 안되는 것 가운데 '축복'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축복의 축()자는 '빈다' 는 뜻입니다. 우리가 "복을 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만 "축복해주세요"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한테 빌어달라는 것입니까?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 축복해주시옵소서"는 말이 안됩니다. 언젠가 이 문제로 시비가 일어났을 때, 저는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시비 벌일 것 없네, 하나님은 너그러우셔서 다 알아들으시고 문제삼지 않으시네." 따지고 들자면 우리가 하는 말 가운데 잘못된 말이 참 많습니다. 신학적으로 하나하나 캐보면 절반 이상의 용어가 잘못되었을 것입니다. 하나하나 따지고 들다가는 지쳐서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그런 것쯤은 문제삼지 않으십니다. '축복' 이라 하면 어떻고 '' 이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가톨릭에서는 '강복'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뭐라고 하든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고 알아들으십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의 생각대로 아무리 엄격하게 갖추어 바르게 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 마음에 들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봐주시는 도리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할 수 있습니까? 최선의 최선을 다한다 해도 하나님께 미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책망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꼬치꼬치 따지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너그러우신 하나님, 고마우신 하나님, 그 앞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흐뭇한 일입니까? 이러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 마치 하나님과 마주 서서 싸우는 듯한 마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시편 103편에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1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부족한 우리를 꾸짖지 않으십니다. 말 좀 잘못하면 어떻습니까?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요새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없습니다. 그냥 '' 입니다. '' 면 어떻고 '' 이면 어떻습니까? 몰라서 그러는 것인데 봐주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나무라시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허물과 죄까지도 꾸짖지 않으십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십니다.

또한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를 달라면 열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79절로 11절에서도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주어서는 안되겠기에 못 주시는 것입니다.

못 받는 우리보다 주지 못하시는 하나님이 더 괴로운 입장입니다. 없는 것도 아니요 얼마든지 가지고 계신 하나님, 그런데 왜 못 주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는 마음과 구하는 자세가 바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돈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달라는 대로 내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돈도 없지만 있어도 함부로 주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한계를 정해놓고 그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됩니다. 돈만 버리면 그나마 다행이요 자칫 자식까지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수준에 도달하여 훌륭한 인격이 된 다음에는 있는대로 얼마든지 줄 것입니다. 지금은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6-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각에 넘치도록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후히 주시는 하나님,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 주시려고 간절히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구하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구하는 자세만 갖추어지면 즉각적으로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하나님을 대상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기도의 대상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기도의 제목입니다. 기도의 제목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들으실 기도이지만 그 기도의 수준이 제목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주세요, 출세하게 해주세요"-이것저것 달라고만 하면 아직 수준이 낮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경우를 돌이켜 생각해보십시다. 기도의 절반 이상이 감사입니까, 간구입니까? 거반이 달라는 것이요 감사의 말이 한마디도 없으면 잘못된 기도입니다. 나를 위하는 것뿐이요, 남을 위하는 기도는 한마디도 없습니까? 수준 낮은 기도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기도가 참기도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내게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대로 이루기 위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기도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할 때에 수준 높은 그리스도인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지극히 히브리적인 말씀입니다. 가장 높은 기도는 지혜를 구하는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지혜'라고 쓰고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지극히 귀한 '삶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에게는 믿음이요, 베드로에게는 소망이요, 요한에게는 사랑이요, 야고보에게는 지혜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지혜-참으로 아름다운 덕입니다. 바로 이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주세요, 믿음을 주세요, 밝은 소망을 주세요.' 오늘 야고보는 여기서 기도합니다. '지혜를 주세요.' 지혜도 그 뿌리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약적으로 말해서 지혜이지 신약적으로 말하면 성령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내 생의 의미를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방향을 알게 됩니다. 지혜는 하늘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임하는 것입니다. 뒤에서 공부하게 되겠습니다만, 야고보서 3장 후반절에 보면 사람이 주는 지혜니 마귀가 주는 지혜니 하여 지혜의 원천을 구분하여 설명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혜가 어떻게 얻어지는 것입니까? 지혜를 얻는 방법을 좀 배워보십시다. 우선, 지혜가 없음을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돈이 없어서, 가난해서 못사는 것입니까? 지혜가 없어서 못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천연자원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부족합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혈기를 부리며 싸워서 여러 복잡한 문제를 야기시키고 마지막에는 둘 다 망하고 맙니다. 지혜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주장해도 합리적으로 해야 합니다. 좋지 않은 말이기는 합니다만, 못돼도 '너 죽고 나 살자' 이어야지 '너 죽고 나 죽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다 끝입니다.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십시다.

옛날에 용한 점쟁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운명을 잘 알아맞히기로 이름이 나 있었지만 거짓말이 태반이지 맞는 말이었겠습니까? 그 사실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마침내 그 점쟁이는 왕 앞에 불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나쁜 놈아, 점을 친다고 돌아다니면서 멋대로 혹세무민(惑世誣民) 하느냐? 그래 네 죽을 날은 아느냐?" 왕이 심히 책망하며 점쟁이에게 물었습니다. 참으로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 죽을 날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꾀를 냅니다. "제 죽을 날은 모르겠으나 제가 죽으면 그 사흘 후에 임금님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하니 입장이 애매합니다. 죽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혹 점쟁이 말이 맞아서 자신이 죽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어 끝내 죽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지혜입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참 잘 돌아갔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돈많은 부자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녀라고는 아들 하나인데 그 아들은 예루살렘에 유학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병이 들어 오늘내일 죽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불러 유언할 시간도 없고 유서가 아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재산은 많은데 참으로 큰일났습니다. 모두 아들에게 준다고 유서를 써놓았댔자 종들이 작당하여 찢어버리면 그만일 것입니다. 아들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알리지도 않을 뿐더러 유서를 전해주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칫하면 재산을 다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래 노인은 지혜를 냅니다. 많은 종 가운데 건장한 종 하나를 불러 "너에게 내 모든 재산을 다 주겠노라"하고 간단한 편지 한 통을 써서 아들에게 전해달라고 하고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산을 받은 종은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그 많은 재산이 이제는 모두 자기 것입니다. 그는 주인이 남긴 유서를 그 아들에게 가져다줍니다. 아버지의 유서를 받아본 아들은 기가 막힙니다. 자기에게 남겨진 유산이라고는 종 한 사람뿐입니다. 많은 종 가운데서 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만을 남겨주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그 유서를 가지고 랍비에게 가서 묻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종 한 사람만을 남겨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랍비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이 어리석은 자여, 네 아버지의 재산을 다 물려받은 그 종을 네 종으로 삼으면 될 것이 아니냐." 종의 것은 모두 주인의 것입니다. 아버지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지혜를 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는 깊이 생각하는 마음이요 멀리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비로소 알게 되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줄 아는 지식입니다. 지혜가 없음을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혜만 있으면 다른 것은 없어도 좋은 것입니다.

둘째로, 지혜의 중요성을 알고 지혜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지혜만은 꼭 있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을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열왕기상 3장을 보면 솔로몬이 왕이 되어,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5)." 그때 솔로몬은 지혜를 구합니다. 이 지혜 구함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11)" 하나님은 그것이 마음에 맞은지라 그에게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는 전쟁을 모르고 지혜 하나로 천하를 다스리면서 40여년 동안 왕 노릇을 합니다. 지혜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솔로몬에게는 있었습니다.

세째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돈을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안들어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를 달라는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습니다. 지혜를 구하는 기도가 가장 효율적인 응답을 받아낼 수 있는 기도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오늘도 내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신령한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늘의 지혜를 주시옵소서"-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이 기도만은 절대로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지혜가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정욕이나 세속적인 생각, 조급한 생각일랑 다 물리치고 오직 신령한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기도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 제목입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지혜를 구하면 지혜를 주시리라-이것이 야고보의 결론입니다.

한편 지혜를 구하는 기도는 적극적인 기도입니다. 긍정적인 기도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을 테니까 하나님께서 다 해주세요"라고 하나님께 떠맡기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기만 하면 내가 다 할 것이라는 마음의 기도입니다. 내게 충성도 있고 열심도 있고 믿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면 내가 가고, 내가 행하고 내가 사랑하겠다는 적극적인 기도입니다.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본문에 보면 믿음으로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의 능력을 믿고 그의 놀라운 지혜를 믿고 그의 사랑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은혜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 중 가장 높은 지혜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시는 것,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가끔 보면 능력은 구하면서도 지혜는 구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보다 지혜 구하기를 더 원하십니다. 능력보다 지혜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십니다. 주시되 후히 주시는 분이요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믿고 구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또한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의심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크리노메노스'입니다. 재미있는 말입니다. '디아''철저히'라는 뜻이요, '크리노''비판하다'라는 뜻입니다. 헤아리고 재어본다는 말입니다. 요리조리 헤아리고 재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심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실까?' '하나님께서도 못하실거야''이제 일은 끝났어'-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받기만 하면 오늘도 얼마든지 길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헤아리는 마음처럼 나쁜 마음이 없습니다. 의심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남을 의심하는 것도 괴로운데 의심받는 일은 더욱 괴롭습니다. 아버지에게도 "내게 얼마를 주십시오. 줄 줄로 믿습니다"라고 하면 좋겠는데 "줄 거예요, 안줄 거예요?"하고 덤빕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20년 후에 이자까지 갚을 테니까 꾸어주세요"한답니다. 자식치고는 못된 자식입니다.

의심하는 마음은 좋지 않습니다. 더구나 인격을 의심하는 것은 구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진지한 마음으로 구할 것입니다. 본문에 "두 마음을 품어"-곧 갈등이 있음을 가리키는 말씀이 있습니다. 두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얻기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반드시 주실 줄로 믿어야 하고 하나님께 길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실까 안 주실까, 될까 안될까 의심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안되면 어떻게 하겠다고 후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두 마음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결혼할 때에 어떻게 생각하고 했습니까? 배우자와 일생을 함께 한다는 생각으로 했습니까, 아니면 한번 해보고 살만하면 살고 시원치 않으면 치워버리겠다는 생각으로 했습니까?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어서는 안됩니다. 여기에는 비약이 필요합니다. 일단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한 마음이요, 그리고 나서 길을 찾는 것입니다. 안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이 따라가고 있는 동안에는 되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특별히 무슨 일을 시작할 때에는 적어도 평생 하겠다는 마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이일을 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적인 헌신이 없습니다. 그저 한번 해보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기도하라, 기도하되 지혜를 구하라, 믿음으로 구하라. 전적인 믿음과 한 마음으로 기도하라, 그리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리라. 기도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의 제목은 지혜요, 기도의 자세는 믿음입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어 앞으로는 지혜로 세상을 보고, 지혜로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닫고, 지혜로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구하라, 주시리라(야고보서 1 : 5-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는 사도 야고보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말씀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 교회의 제일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서 제 1 대 감독으로 봉사하고, 그리고 마침내 순교를 하지만, 그의 목회 교구와 선교지는 그 예루살렘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흩어져 있는 모든 나라 모든 곳에 가 있는 유대사람들, 적어도 그 유대사람 전부가 하나님의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선민의 사명, 곧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흩어져 있는 유대사람들이 지고 있는 선교적 책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사람들이 어디에서 살고 있건 그 현지에서 그리스도인된 삶을 바로 살면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귀한 역사가 일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지금 흩어져 있는 유대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목회자입니다. 동시에 선교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목회적인 입장에서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문제가 무엇이냐부터 생각했습니다.

그가 파악한 문제의 첫번째가 '시험'이었습니다. 시험을 잘 이겨내야 되겠는데,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의 참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잘못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적으로 말씀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지난 시간에는 이 '시험'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기도'입니다. 믿는 사람은 기도를 합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기도의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면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곧 기도생활입니다. 기도 없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보면 아주 큰 오해가 있습니다. 신앙을 윤리적으로 해석하려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별일인가,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선한 마음으로 이웃에 사랑을 베풀고 봉사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지-이렇게만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예수 믿은 후에 드러나는 결과일 뿐입니다. 근본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기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기도가 우선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곧 기도생활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기도의 자세가 바로되어 있는 사람이 예수 잘 믿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자세가 성서적일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이방적(異邦的)이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적이라는 말은 이방사람들이 자기네 우상에게 하는 것에서 이름만 바꾸어 부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한 기도를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기도' 에 대하여 말씀하는 의도도 바로 이것입니다.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특별히 '기도' 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기도의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시험''기도'를 연결 시켜보겠습니다.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라고 합니다마는 그 기쁘게 여기는 방법이 따로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은 기도입니다. 기도로부터 응답 받아야 비로소 시험을 만나도 기쁘게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쁘게 여기라 했다고 무조건 기쁘게 여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기쁘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은 기도의 응답에서 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시험'의 문제를 거론하고 바로 '기도'의 문제로 들어간 것은 그 때문입니다. 또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고 말씀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방법도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참을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인내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인내의 힘이 기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바른 자세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기도의 대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기도를 하려면 기도의 대상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늘 외는 주기도문을 보십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기도의 대상부터 부릅니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에는 '하나님' 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부를 때에는 아버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니 여호와니 전능하신 자니, 여러 가지 호칭이 있습니다마는 가장 가깝게 느껴지고 가장 정겨운 호칭은 단연코 '아버지' 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기도의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 거기로부터 자연히 기도의 자세가 나오고 기도의 내용, 곧 기도의 제목도 나올 것입니다. 간혹 기도한답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왜 소리를 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상이 누군데 감히 주먹질이요 발악입니까? 사람에게도 안 통하는 것을 감히 하나님 앞에서라니요.

부모님 앞에 가서 뭘 달라고 할 때에 바락바락 소리지르며 대듭니까?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안될 일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경건을 잃어버린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주신 교훈 가운데 빠뜨리신 것이 하나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6 : 7)"라는 말씀에 "소리를 크게 내야 하는 것이 아니니라"라는 항목을 괄호에 넣어서 라도 추가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설령 이 말씀이 없어도 눈치로 알아차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고행을 해야 되는 줄로 압니다. 피땀을 흘리고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여야 들어주실 줄로 믿고 있습니다. 그것도 잘못된 태도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금식기도를 해야 들어주실 줄로 믿는 것은 어린아이의 투정과 같은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화가 나거나 불만이 있으면 대뜸 밥 안먹겠다고 합니다. 걸핏하면 굶겠다고 대듭니다마는 안먹으면 저 배고프지 남이 배고픕니까?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까? 기도도 그렇습니다.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는 데서 그런 현상이 생깁니다. 하나님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안다면 감히 그런 일들이 통하기나 합니까? 불손한 자세가 통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기도의 대상을 바로 이해하면 거기에 따라서 기도의 내용과 기도의 자세가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목청을 높여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 이것은 하나님 앞에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보다 이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과연 어떠한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까? 세리가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고래고래 소리질렀겠습니까? 조용히 고개 숙여 기도했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기도의 자세가 경건해야 합니다. 말을 길게 한다고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저녁에 혹 집에서 기도할 때에도 누가보고 안보고가 문제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앉아서 기도하지 마십시다. 잠깐일지라도 옷을 바로 입고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뻔뻔하게 드러누워서 '하나님, 나 잡니다'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전화를 받아도 어른이 한 것이면 일어나 앉아서 바른 자세로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안 보인다고 누워서 받아서는 안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허리라도 부러졌으면 모르거니와 어떻게 그런 자세로 기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세만으로도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다 말해야 되는 줄로 알고 모조리 주워섬기는 열람식 기도만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이 누군인가를 야고보는 자상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꾸짖지 아니하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다소 잘못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너그럽게 봐주십니다. 제아무리 철저히 해도 하나님 앞에서 실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잘못되는 것이 있습니다. 실수를 아예 각오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꾸짖지 않으십니다. 따타부타 이론적으로 따지지 마십시다. 하나님께는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끝까지 풀이가 잘 안되는 것 가운데 '축복'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축복의 축()자는 '빈다' 는 뜻입니다. 우리가 "복을 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만 "축복해주세요"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한테 빌어달라는 것입니까?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 축복해주시옵소서"는 말이 안됩니다. 언젠가 이 문제로 시비가 일어났을 때, 저는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시비 벌일 것 없네, 하나님은 너그러우셔서 다 알아들으시고 문제삼지 않으시네." 따지고 들자면 우리가 하는 말 가운데 잘못된 말이 참 많습니다. 신학적으로 하나하나 캐보면 절반 이상의 용어가 잘못되었을 것입니다. 하나하나 따지고 들다가는 지쳐서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그런 것쯤은 문제삼지 않으십니다. '축복' 이라 하면 어떻고 '' 이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가톨릭에서는 '강복'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뭐라고 하든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고 알아들으십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의 생각대로 아무리 엄격하게 갖추어 바르게 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 마음에 들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봐주시는 도리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할 수 있습니까? 최선의 최선을 다한다 해도 하나님께 미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책망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꼬치꼬치 따지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너그러우신 하나님, 고마우신 하나님, 그 앞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흐뭇한 일입니까? 이러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 마치 하나님과 마주 서서 싸우는 듯한 마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시편 103편에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1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부족한 우리를 꾸짖지 않으십니다. 말 좀 잘못하면 어떻습니까?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요새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없습니다. 그냥 '' 입니다. '' 면 어떻고 '' 이면 어떻습니까? 몰라서 그러는 것인데 봐주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나무라시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허물과 죄까지도 꾸짖지 않으십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십니다.

또한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를 달라면 열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79절로 11절에서도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주어서는 안되겠기에 못 주시는 것입니다.

못 받는 우리보다 주지 못하시는 하나님이 더 괴로운 입장입니다. 없는 것도 아니요 얼마든지 가지고 계신 하나님, 그런데 왜 못 주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는 마음과 구하는 자세가 바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돈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달라는 대로 내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돈도 없지만 있어도 함부로 주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한계를 정해놓고 그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됩니다. 돈만 버리면 그나마 다행이요 자칫 자식까지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수준에 도달하여 훌륭한 인격이 된 다음에는 있는대로 얼마든지 줄 것입니다. 지금은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6-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각에 넘치도록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후히 주시는 하나님,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 주시려고 간절히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구하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구하는 자세만 갖추어지면 즉각적으로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하나님을 대상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기도의 대상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기도의 제목입니다. 기도의 제목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들으실 기도이지만 그 기도의 수준이 제목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주세요, 출세하게 해주세요"-이것저것 달라고만 하면 아직 수준이 낮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경우를 돌이켜 생각해보십시다. 기도의 절반 이상이 감사입니까, 간구입니까? 거반이 달라는 것이요 감사의 말이 한마디도 없으면 잘못된 기도입니다. 나를 위하는 것뿐이요, 남을 위하는 기도는 한마디도 없습니까? 수준 낮은 기도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기도가 참기도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내게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대로 이루기 위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기도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할 때에 수준 높은 그리스도인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지극히 히브리적인 말씀입니다. 가장 높은 기도는 지혜를 구하는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지혜'라고 쓰고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지극히 귀한 '삶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에게는 믿음이요, 베드로에게는 소망이요, 요한에게는 사랑이요, 야고보에게는 지혜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지혜-참으로 아름다운 덕입니다. 바로 이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주세요, 믿음을 주세요, 밝은 소망을 주세요.' 오늘 야고보는 여기서 기도합니다. '지혜를 주세요.' 지혜도 그 뿌리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약적으로 말해서 지혜이지 신약적으로 말하면 성령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내 생의 의미를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방향을 알게 됩니다. 지혜는 하늘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임하는 것입니다. 뒤에서 공부하게 되겠습니다만, 야고보서 3장 후반절에 보면 사람이 주는 지혜니 마귀가 주는 지혜니 하여 지혜의 원천을 구분하여 설명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혜가 어떻게 얻어지는 것입니까? 지혜를 얻는 방법을 좀 배워보십시다. 우선, 지혜가 없음을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돈이 없어서, 가난해서 못사는 것입니까? 지혜가 없어서 못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천연자원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부족합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혈기를 부리며 싸워서 여러 복잡한 문제를 야기시키고 마지막에는 둘 다 망하고 맙니다. 지혜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주장해도 합리적으로 해야 합니다. 좋지 않은 말이기는 합니다만, 못돼도 '너 죽고 나 살자' 이어야지 '너 죽고 나 죽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다 끝입니다.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십시다.

옛날에 용한 점쟁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운명을 잘 알아맞히기로 이름이 나 있었지만 거짓말이 태반이지 맞는 말이었겠습니까? 그 사실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마침내 그 점쟁이는 왕 앞에 불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나쁜 놈아, 점을 친다고 돌아다니면서 멋대로 혹세무민(惑世誣民) 하느냐? 그래 네 죽을 날은 아느냐?" 왕이 심히 책망하며 점쟁이에게 물었습니다. 참으로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 죽을 날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꾀를 냅니다. "제 죽을 날은 모르겠으나 제가 죽으면 그 사흘 후에 임금님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하니 입장이 애매합니다. 죽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혹 점쟁이 말이 맞아서 자신이 죽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어 끝내 죽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지혜입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참 잘 돌아갔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돈많은 부자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녀라고는 아들 하나인데 그 아들은 예루살렘에 유학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병이 들어 오늘내일 죽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불러 유언할 시간도 없고 유서가 아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재산은 많은데 참으로 큰일났습니다. 모두 아들에게 준다고 유서를 써놓았댔자 종들이 작당하여 찢어버리면 그만일 것입니다. 아들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알리지도 않을 뿐더러 유서를 전해주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칫하면 재산을 다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래 노인은 지혜를 냅니다. 많은 종 가운데 건장한 종 하나를 불러 "너에게 내 모든 재산을 다 주겠노라"하고 간단한 편지 한 통을 써서 아들에게 전해달라고 하고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산을 받은 종은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그 많은 재산이 이제는 모두 자기 것입니다. 그는 주인이 남긴 유서를 그 아들에게 가져다줍니다. 아버지의 유서를 받아본 아들은 기가 막힙니다. 자기에게 남겨진 유산이라고는 종 한 사람뿐입니다. 많은 종 가운데서 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만을 남겨주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그 유서를 가지고 랍비에게 가서 묻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종 한 사람만을 남겨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랍비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이 어리석은 자여, 네 아버지의 재산을 다 물려받은 그 종을 네 종으로 삼으면 될 것이 아니냐." 종의 것은 모두 주인의 것입니다. 아버지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지혜를 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는 깊이 생각하는 마음이요 멀리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비로소 알게 되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줄 아는 지식입니다. 지혜가 없음을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혜만 있으면 다른 것은 없어도 좋은 것입니다.

둘째로, 지혜의 중요성을 알고 지혜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지혜만은 꼭 있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을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열왕기상 3장을 보면 솔로몬이 왕이 되어,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5)." 그때 솔로몬은 지혜를 구합니다. 이 지혜 구함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11)" 하나님은 그것이 마음에 맞은지라 그에게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는 전쟁을 모르고 지혜 하나로 천하를 다스리면서 40여년 동안 왕 노릇을 합니다. 지혜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솔로몬에게는 있었습니다.

세째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돈을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안들어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를 달라는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습니다. 지혜를 구하는 기도가 가장 효율적인 응답을 받아낼 수 있는 기도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오늘도 내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신령한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늘의 지혜를 주시옵소서"-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이 기도만은 절대로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지혜가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정욕이나 세속적인 생각, 조급한 생각일랑 다 물리치고 오직 신령한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기도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 제목입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지혜를 구하면 지혜를 주시리라-이것이 야고보의 결론입니다.

한편 지혜를 구하는 기도는 적극적인 기도입니다. 긍정적인 기도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을 테니까 하나님께서 다 해주세요"라고 하나님께 떠맡기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기만 하면 내가 다 할 것이라는 마음의 기도입니다. 내게 충성도 있고 열심도 있고 믿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면 내가 가고, 내가 행하고 내가 사랑하겠다는 적극적인 기도입니다.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본문에 보면 믿음으로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의 능력을 믿고 그의 놀라운 지혜를 믿고 그의 사랑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은혜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 중 가장 높은 지혜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시는 것,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가끔 보면 능력은 구하면서도 지혜는 구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보다 지혜 구하기를 더 원하십니다. 능력보다 지혜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십니다. 주시되 후히 주시는 분이요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믿고 구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또한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의심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크리노메노스'입니다. 재미있는 말입니다. '디아''철저히'라는 뜻이요, '크리노''비판하다'라는 뜻입니다. 헤아리고 재어본다는 말입니다. 요리조리 헤아리고 재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심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실까?' '하나님께서도 못하실거야''이제 일은 끝났어'-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받기만 하면 오늘도 얼마든지 길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헤아리는 마음처럼 나쁜 마음이 없습니다. 의심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남을 의심하는 것도 괴로운데 의심받는 일은 더욱 괴롭습니다. 아버지에게도 "내게 얼마를 주십시오. 줄 줄로 믿습니다"라고 하면 좋겠는데 "줄 거예요, 안줄 거예요?"하고 덤빕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20년 후에 이자까지 갚을 테니까 꾸어주세요"한답니다. 자식치고는 못된 자식입니다.

의심하는 마음은 좋지 않습니다. 더구나 인격을 의심하는 것은 구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진지한 마음으로 구할 것입니다. 본문에 "두 마음을 품어"-곧 갈등이 있음을 가리키는 말씀이 있습니다. 두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얻기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반드시 주실 줄로 믿어야 하고 하나님께 길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실까 안 주실까, 될까 안될까 의심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안되면 어떻게 하겠다고 후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두 마음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결혼할 때에 어떻게 생각하고 했습니까? 배우자와 일생을 함께 한다는 생각으로 했습니까, 아니면 한번 해보고 살만하면 살고 시원치 않으면 치워버리겠다는 생각으로 했습니까?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어서는 안됩니다. 여기에는 비약이 필요합니다. 일단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한 마음이요, 그리고 나서 길을 찾는 것입니다. 안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이 따라가고 있는 동안에는 되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특별히 무슨 일을 시작할 때에는 적어도 평생 하겠다는 마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이일을 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적인 헌신이 없습니다. 그저 한번 해보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기도하라, 기도하되 지혜를 구하라, 믿음으로 구하라. 전적인 믿음과 한 마음으로 기도하라, 그리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리라. 기도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의 제목은 지혜요, 기도의 자세는 믿음입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어 앞으로는 지혜로 세상을 보고, 지혜로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닫고, 지혜로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