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자원하는 심령을 주소서(시편 51편 9절~19절)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많은 학자들은 공산주의가 실패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결론지어 설명합니다. 첫째, 공산주의가 사람들을 무책임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라고 하는 사회제도 속에서 사람들은 아무 일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 그런 무책임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둘째, 재산 사유의 금지로 사람들이 게을러졌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공산주의국가의 국민들이 자본주의국가의 국민들에 비하여 게으릅니다. 그리고 불성실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공산주의가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결국, 공산주의는 노동의 동기부여에 실패함으로 붕괴되고 만 것입니다. 일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습니다. 진실이 없습니다. 바르게 일해보고자 하는 의욕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사회가 무너진 것입니다.
'동기부여'---이것은 예나 오늘이나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사회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물질은 풍족합니다마는 만족감이 없습니다. 불만투성이입니다. 공산주의사회에 비하여 확실히 잘삽니다마는 행복감이 없습니다. 불만과 불평이 더 많습니다. 자유를 가졌습니다마는 그 자유로 말미암은 소중한 행복감이 없습니다. 지식도 풍부합니다마는 아는 것에 대한 기쁨이 없습니다. 열의도 있습니다마는 목적이 없습니다. 단지 잘살아보겠다는 마음만이 있을 뿐, 잘살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목표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허무주의에 빠져듭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점점 더
깊은 실의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흔히 문화실조(文化失調)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문화실조에 젖어들고 있습니다. 문화실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생리적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능적이며 원색적인 것으로 일차적 동기에 속합니다. 인간에게는 먹고자 하는, 입고자 하는, 그리고 평안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일차적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열심히 일하고 뛰는 것입니다. 그러나 늘 이런 일차적 생리적 동기에만 매여 있다면 인간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 일차적 동기를 충족했다고 해서 인간적 불만이 모두 해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 읽은 에세이 가운데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서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뭇 동물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하다고 자만합니다. 그러나 만약 동물들이 말을 한다면 뭐라고 할까요?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비웃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맹수 중의 맹수로 꼽히는 사자도 일단 배를 채우고나면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코앞에서 토끼가 놀아도 해치지 않습니다. 배부른 사자는 결코 짐승을 해치는 일이 없습니다. 동물의 세계가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자가 배고파서 소리를 지를 때에만 위험합니다. 그 때만 넘기면 다시 평화가 찾아듭니다. 그러나 사람은 배가 불러도 여전히 소리를 지릅니다. 가져도 가져도 끝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듯 더 가지고자 하는, 끝이 없는 욕심, 이것이 일차적 동기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에게는 심리적 동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차적 동기에 속하는 것으로 자아실현의 욕구를 추구하면서 보람과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일차적 동기인 생리적 욕구는 충족의 대상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배고프면 먹으면 되고, 추우면 옷을 입으면 됩니다. 그러나 이차적 동기인 심리적 욕구는 어떻게 해야만 그 욕망이 채워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충족의 대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기쁨도 만족도 없는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가지지 못할 때의 불만, 가진 다음의 불안과 끝없는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12절)"---'자원(自願)하는 심령'은 히브리어로 '루아흐 너디바'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발적이고 자원적인, 자유로운 영혼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a willing spirit'라고 합니다. 이 '영혼의 자유'에서 문제가 비롯됩니다. 물질적 자유는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부자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신적으로는 자유하나 도덕적으로는 부자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결코 자유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물질적 육체적으로는 부자유한 것 같으나 정신적 도덕적 양심적으로는 자유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적인 자유와 영혼의 자유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지적인 자유, 물론 중요하지마는 이보다는 영혼의 자유가 더욱 중요함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생을 한번 진단해보십시오. 죽지 못해서 살고 있는지, 피치 못해서 하는 일인지, 먹기 위해서 살고 있는지를 진단해보십시오. 일이 있다고 인격자라 할 수 있는지, 봉사한다고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볼 것입니다.
삼십여 년전, 제가 신학대학에 다닐 때에 박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설교를 듣는 대상은 모두 신학생들이었습니다. 앞으로 목사가 될 사람들을 앞에 놓고 자신이 경험한 바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부인은 팔 년 동안이나 병석에 있었습니다. 부인병으로 세 번이나 수술을 받으면서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도 고치지를 못하고 이제는 사형선고를 받고 그저 임종할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의사도 손을 뗐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있을 수는 없어서 효과가 별로 없는 줄을 알면서도 약을 달여서 계속 정성껏 간호를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저녁에도 약을 달여서 사발에 담아 들어가는데 불현듯 전에 없던 못된 생각이 들더랍니다. '제발 그만하고 이젠 가지. 이 고생을 언제까지 시키려나? 피차 못할 노릇인데……'라고 생각하면서 아내에게 약을 대접했는데, 그 약을 잡수시고 바로 그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내가 죽고 나니 못된 생각을 품었던 것이 마음에 걸리더랍니다. 이대로라도 좋으니 부디 살아만 달라는 한 가지 바램으로 정성껏 병구완을 해오다가 어찌타 그만 마지막 고비에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는지 후회가 되고 마음에 가책이 되어 심히 괴롭더랍니다. 말씀을 잇지 못하고 십여 분 동안이나 우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여러분, 물질이 오고가는 것만으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사랑인 것입니다. 봉사하는 것만으로 선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마음속에 정성이 담겨 있고, 자원하는 영혼이 함께 해야만 선한 일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현대의 결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넘치게 가진 물질을 부족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나는 사랑하고 봉사했노라'하고 세상사람들 앞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속깊이 귀를 기울이고 물어보십시오. 정말로 우러나와서 봉사를 하고 물질을 주었는지 물어볼 것입니다.
종은 울려서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봉사도 그렇습니다. 뜨거워진 가슴으로, 감격한 마음으로 내가 가진 것을 줄 때에 비로소 봉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과 동기에 정결함과 깨끗함이 없고 자원성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생리적 욕구 충족으로 정신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정신적 문화적 욕구가 충족됨으로써 영혼이 깨끗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영혼의 문제는 여전히 영혼의 문제로 존재합니다. 결국 영혼의 자유함이 없이는 정신적 자유함도 없고, 심리적 자유함도 없고, 육체의 문제 역시 소화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인 시편 51편에 다윗이 하나님께 드리는 세 가지 기도가 있습니다. 첫째,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기도입니다.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둘째, 갱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절)"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셋째, 헌신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이렇듯 세 가지의 귀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표현하면 salvation, sanctification, service로, 첫자가 모두 에스(S)자입니다. 다윗은 이 세 가지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물질에 매이지 않으며 육체의 노예가 될 수 없음을 그는 분명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환경과 여건, 이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물질이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난하다가 부해졌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병들었다가 다시 건강해졌다고 해서 그 영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하다가 형편이 좀 나아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은 물질과는 별무관계입니다. 보십시오.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정신적으로는 지극히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소중한 건강을 잃어버리고도 그 마음속에 남달리 깊은 행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물질적인 여건, 세상적인 것은 영혼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환경이 바뀐다고 정신이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취미가 달라졌다고 해서 그 인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말씀에 환경을 변화시켜달라는 기도는 없습니다. 물질적이며 세상적인 환경과 여건이 달라진다고 해서 영혼이 변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문제는 별도의 문제이기에 다윗은 원수와 고통을 멸해주십사 하는, 즉 환경의 변화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목마를 때에 바닷물을 마신다고 갈증이 해소되지는 않습니다. 목이 마를 때에는, 물을 필요로 할 때에는 반드시 물을 마셔야만 합니다.
영혼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기에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그 해결을 보려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립니다.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10절)"---이것은 repair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수리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recreation입니다. 재창조의 문제입니다. 히브리어에 '아사'와 '바라'가 있습니다. '아사'는 만든다는 말이고, '바라'는 창조한다는 말입니다.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라는 기도에서의 '창조'는 '아사'가 아닌 '바라'입니다. '창조,' 이것은 매우 소중한 용어입니다.
있던 바를 고쳐달라는 것이 아니고, 전에 없던 새로운 창조적 역사로 내 심령을 재창조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과거를 비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새로움으로 채우는 것이고, 은혜와 사랑의 충만함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정한 마음을 창조해달라고 기도 드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유 영혼'입니다. 다윗이 생각한대로 자유 영혼이란 오직 주님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만, 아버지의 집에만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영혼이 자유할 수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또한 다윗은 자유 영혼을 얻기 위해서는 속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영혼은 자유할 수 없습니다. 어디로 도망가도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립니다.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1, 2절)"---참회하면서 통회하면서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죄로부터의 자유'---이것이 모든 문제의 우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네게서 거두지 마소서(11절)"---다윗은 하나님의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내게 향하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셔야만 자유할 수 있겠다고 간구합니다. 또한 자원하는 심령을 주셔야만 밝은 이성과 밝은 지성과 밝은 의지를 가질 수 있겠다고 간구합니다. 그래야만 건강도 밝은 생활도 높은 생산성도 있을 수 있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가장 위대한 생산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노예는 노동을 합니다마는 그 속에 기쁨이 없습니다.
땀은 흘리고 있으나 즐거움이 없습니다. 생산은 하고 있으나 보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노예입니다. 무슨 수고를 했든지 기쁨이 없고 보람이 없다면 여러분은 필시 무엇엔가 붙들린 노예입니다.
제도에 붙들린 것도 아니고 가난에 붙들린 것도 아니지만, 여러분의 심령은 분명히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기계적인 복종과 불만투성이의 굴종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자원하는 심령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이것을 하나님께로서 오는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자원하는 심령은 내 마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내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철학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12절)"---'자원하는 심령'은 하나님께로서 오는 선물입니다. 이것은 속죄함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가담한 기쁨과 그 바른 목적의식을 회복해야 되겠다는 기도입니다.
인도의 오지에 가서 이십 년 동안 선교사로 수고한 분이 계십니다. 이십 년 동안의 그 수고를 마치고 본국에 돌아와서 환영을 받습니다. 그 환영석상에서 그분은 그간에 고생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떤 사람이 그분에게 "당신은 그 귀한 청춘을 인도의 오지에 모두 바치셨군요. 그 아까운 청춘을 모두 허비하고 말았군요"라고 말합니다. 그 때 이 선교사는 담담하면서도 명확하게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이십 년의 내 청춘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존재의 의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교리문답 제1조는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여기에 인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숨지는 날까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바친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 선교사, 사람들은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생으로 살아온 그를 높이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훌륭함을 치하하려 했습니다. 그 때에 리빙스턴은 이를 사양하면서 말했습니다. "저는 결코 헌신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 생활은 헌신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특권을 누리며 살아온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 특권이라는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봉사할 수 있는 것이 특권입니다. 오늘날 내가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도 특권입니다. 남편을 위하여 수고하는 일도 특권입니다.
이들은 모두 헌신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강을 주시고 지혜를 주셨기에 이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17세기의 일입니다. 런던 대화재가 있은 뒤, 저 유명한 세인트 폴 대성당을 재건하고자 그 설계를 맡았던 크리스토퍼 렌(Sir Christopher Wren)이 하루는 채석장을 찾아 돌을 다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토닥토닥 돌을 쪼고 있는 한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짜증난다는 듯이 몹시도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보면 모르오? 돌을 다듬고 있지 않소." 또 한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합니다.
"보면 모릅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벌어 먹고사느라고 이 고생을 합니다." 다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저요?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죄를 짓고 감옥에 있을 때, 거기서 돌 다듬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전과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옥에서 나와 자유로운 몸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하여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이렇듯 대답은 천양지차입니다.
형제가 있습니다. 동생에 비하여 형은 가난한 편입니다. 그런데 부한 동생은 불평이 많고 가난한 형은 늘 행복해 보입니다. 하루는 동생이 묻습니다. "형님, 행복의 비결이 뭐요?" 형은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아, 그거야 좋아하는 일만 하는 거지. 하고 싶은 일만 하면 행복하단다." 동생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그 좋아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형이 다정한 눈길로 동생을 바라보면서 대답합니다. "좋아하는 일이 따로 있나.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거지."
여러분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 일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가치를 창조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경륜 속에서 하고 있는 일 자체를 특권으로 알고 감사하게 받을 때,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 행복한 일을 찾아서 온 세계를 다 헤매고 다닌다 해도 결코 보람있는 일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보람있는 일이란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바로 현실의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원하는 심령을 주시면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지금, 다윗은 주님을 찬송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에 기쁨이 없다면 노예입니다. 봉사에 행복과 감사함이 없다면 위선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소유도 있고,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짜증스러운 것입니까? 불신앙 때문입니다. 기쁨도 없고 자원하는 심령도 없습니다. 노예적이고 허무적인 불가피성만이 있습니다. 이 많은 세월을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닙니다. 영혼이 자유하고 자원하는 심령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의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갈 때에, 비로소 능력과 지혜와 권능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공의 진단은 행복에 있습니다. 건강의 진단은 자유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은 얼마나 자유합니까? 능력 평가는 자발성에 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벅찬 감격과 자원하는 심령이 있을 때에만 나의 생은 놀라운 능력의 삶이 될 것입니다.
자원하는 심령을 주소서(시편 51편 9절~19절)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많은 학자들은 공산주의가 실패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결론지어 설명합니다. 첫째, 공산주의가 사람들을 무책임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라고 하는 사회제도 속에서 사람들은 아무 일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 그런 무책임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둘째, 재산 사유의 금지로 사람들이 게을러졌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공산주의국가의 국민들이 자본주의국가의 국민들에 비하여 게으릅니다. 그리고 불성실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공산주의가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결국, 공산주의는 노동의 동기부여에 실패함으로 붕괴되고 만 것입니다. 일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습니다. 진실이 없습니다. 바르게 일해보고자 하는 의욕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사회가 무너진 것입니다.
'동기부여'---이것은 예나 오늘이나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사회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물질은 풍족합니다마는 만족감이 없습니다. 불만투성이입니다. 공산주의사회에 비하여 확실히 잘삽니다마는 행복감이 없습니다. 불만과 불평이 더 많습니다. 자유를 가졌습니다마는 그 자유로 말미암은 소중한 행복감이 없습니다. 지식도 풍부합니다마는 아는 것에 대한 기쁨이 없습니다. 열의도 있습니다마는 목적이 없습니다. 단지 잘살아보겠다는 마음만이 있을 뿐, 잘살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목표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허무주의에 빠져듭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점점 더
깊은 실의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흔히 문화실조(文化失調)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문화실조에 젖어들고 있습니다. 문화실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생리적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능적이며 원색적인 것으로 일차적 동기에 속합니다. 인간에게는 먹고자 하는, 입고자 하는, 그리고 평안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일차적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열심히 일하고 뛰는 것입니다. 그러나 늘 이런 일차적 생리적 동기에만 매여 있다면 인간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 일차적 동기를 충족했다고 해서 인간적 불만이 모두 해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 읽은 에세이 가운데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서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뭇 동물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하다고 자만합니다. 그러나 만약 동물들이 말을 한다면 뭐라고 할까요? 모르긴 몰라도 굉장히 비웃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맹수 중의 맹수로 꼽히는 사자도 일단 배를 채우고나면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코앞에서 토끼가 놀아도 해치지 않습니다. 배부른 사자는 결코 짐승을 해치는 일이 없습니다. 동물의 세계가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자가 배고파서 소리를 지를 때에만 위험합니다. 그 때만 넘기면 다시 평화가 찾아듭니다. 그러나 사람은 배가 불러도 여전히 소리를 지릅니다. 가져도 가져도 끝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듯 더 가지고자 하는, 끝이 없는 욕심, 이것이 일차적 동기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에게는 심리적 동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차적 동기에 속하는 것으로 자아실현의 욕구를 추구하면서 보람과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일차적 동기인 생리적 욕구는 충족의 대상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배고프면 먹으면 되고, 추우면 옷을 입으면 됩니다. 그러나 이차적 동기인 심리적 욕구는 어떻게 해야만 그 욕망이 채워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충족의 대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기쁨도 만족도 없는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가지지 못할 때의 불만, 가진 다음의 불안과 끝없는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12절)"---'자원(自願)하는 심령'은 히브리어로 '루아흐 너디바'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발적이고 자원적인, 자유로운 영혼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a willing spirit'라고 합니다. 이 '영혼의 자유'에서 문제가 비롯됩니다. 물질적 자유는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부자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신적으로는 자유하나 도덕적으로는 부자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결코 자유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물질적 육체적으로는 부자유한 것 같으나 정신적 도덕적 양심적으로는 자유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적인 자유와 영혼의 자유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지적인 자유, 물론 중요하지마는 이보다는 영혼의 자유가 더욱 중요함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생을 한번 진단해보십시오. 죽지 못해서 살고 있는지, 피치 못해서 하는 일인지, 먹기 위해서 살고 있는지를 진단해보십시오. 일이 있다고 인격자라 할 수 있는지, 봉사한다고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볼 것입니다.
삼십여 년전, 제가 신학대학에 다닐 때에 박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설교를 듣는 대상은 모두 신학생들이었습니다. 앞으로 목사가 될 사람들을 앞에 놓고 자신이 경험한 바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부인은 팔 년 동안이나 병석에 있었습니다. 부인병으로 세 번이나 수술을 받으면서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도 고치지를 못하고 이제는 사형선고를 받고 그저 임종할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의사도 손을 뗐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있을 수는 없어서 효과가 별로 없는 줄을 알면서도 약을 달여서 계속 정성껏 간호를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저녁에도 약을 달여서 사발에 담아 들어가는데 불현듯 전에 없던 못된 생각이 들더랍니다. '제발 그만하고 이젠 가지. 이 고생을 언제까지 시키려나? 피차 못할 노릇인데……'라고 생각하면서 아내에게 약을 대접했는데, 그 약을 잡수시고 바로 그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내가 죽고 나니 못된 생각을 품었던 것이 마음에 걸리더랍니다. 이대로라도 좋으니 부디 살아만 달라는 한 가지 바램으로 정성껏 병구완을 해오다가 어찌타 그만 마지막 고비에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는지 후회가 되고 마음에 가책이 되어 심히 괴롭더랍니다. 말씀을 잇지 못하고 십여 분 동안이나 우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여러분, 물질이 오고가는 것만으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사랑인 것입니다. 봉사하는 것만으로 선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마음속에 정성이 담겨 있고, 자원하는 영혼이 함께 해야만 선한 일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현대의 결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넘치게 가진 물질을 부족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나는 사랑하고 봉사했노라'하고 세상사람들 앞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속깊이 귀를 기울이고 물어보십시오. 정말로 우러나와서 봉사를 하고 물질을 주었는지 물어볼 것입니다.
종은 울려서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봉사도 그렇습니다. 뜨거워진 가슴으로, 감격한 마음으로 내가 가진 것을 줄 때에 비로소 봉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과 동기에 정결함과 깨끗함이 없고 자원성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생리적 욕구 충족으로 정신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정신적 문화적 욕구가 충족됨으로써 영혼이 깨끗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영혼의 문제는 여전히 영혼의 문제로 존재합니다. 결국 영혼의 자유함이 없이는 정신적 자유함도 없고, 심리적 자유함도 없고, 육체의 문제 역시 소화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인 시편 51편에 다윗이 하나님께 드리는 세 가지 기도가 있습니다. 첫째,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기도입니다.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둘째, 갱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절)"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셋째, 헌신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이렇듯 세 가지의 귀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표현하면 salvation, sanctification, service로, 첫자가 모두 에스(S)자입니다. 다윗은 이 세 가지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물질에 매이지 않으며 육체의 노예가 될 수 없음을 그는 분명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환경과 여건, 이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물질이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난하다가 부해졌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병들었다가 다시 건강해졌다고 해서 그 영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하다가 형편이 좀 나아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은 물질과는 별무관계입니다. 보십시오.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정신적으로는 지극히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소중한 건강을 잃어버리고도 그 마음속에 남달리 깊은 행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물질적인 여건, 세상적인 것은 영혼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환경이 바뀐다고 정신이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취미가 달라졌다고 해서 그 인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말씀에 환경을 변화시켜달라는 기도는 없습니다. 물질적이며 세상적인 환경과 여건이 달라진다고 해서 영혼이 변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문제는 별도의 문제이기에 다윗은 원수와 고통을 멸해주십사 하는, 즉 환경의 변화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목마를 때에 바닷물을 마신다고 갈증이 해소되지는 않습니다. 목이 마를 때에는, 물을 필요로 할 때에는 반드시 물을 마셔야만 합니다.
영혼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기에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그 해결을 보려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립니다.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10절)"---이것은 repair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수리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recreation입니다. 재창조의 문제입니다. 히브리어에 '아사'와 '바라'가 있습니다. '아사'는 만든다는 말이고, '바라'는 창조한다는 말입니다.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라는 기도에서의 '창조'는 '아사'가 아닌 '바라'입니다. '창조,' 이것은 매우 소중한 용어입니다.
있던 바를 고쳐달라는 것이 아니고, 전에 없던 새로운 창조적 역사로 내 심령을 재창조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과거를 비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새로움으로 채우는 것이고, 은혜와 사랑의 충만함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정한 마음을 창조해달라고 기도 드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유 영혼'입니다. 다윗이 생각한대로 자유 영혼이란 오직 주님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만, 아버지의 집에만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영혼이 자유할 수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또한 다윗은 자유 영혼을 얻기 위해서는 속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영혼은 자유할 수 없습니다. 어디로 도망가도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립니다.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1, 2절)"---참회하면서 통회하면서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죄로부터의 자유'---이것이 모든 문제의 우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네게서 거두지 마소서(11절)"---다윗은 하나님의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내게 향하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셔야만 자유할 수 있겠다고 간구합니다. 또한 자원하는 심령을 주셔야만 밝은 이성과 밝은 지성과 밝은 의지를 가질 수 있겠다고 간구합니다. 그래야만 건강도 밝은 생활도 높은 생산성도 있을 수 있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가장 위대한 생산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노예는 노동을 합니다마는 그 속에 기쁨이 없습니다.
땀은 흘리고 있으나 즐거움이 없습니다. 생산은 하고 있으나 보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노예입니다. 무슨 수고를 했든지 기쁨이 없고 보람이 없다면 여러분은 필시 무엇엔가 붙들린 노예입니다.
제도에 붙들린 것도 아니고 가난에 붙들린 것도 아니지만, 여러분의 심령은 분명히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기계적인 복종과 불만투성이의 굴종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자원하는 심령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이것을 하나님께로서 오는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자원하는 심령은 내 마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내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철학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12절)"---'자원하는 심령'은 하나님께로서 오는 선물입니다. 이것은 속죄함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가담한 기쁨과 그 바른 목적의식을 회복해야 되겠다는 기도입니다.
인도의 오지에 가서 이십 년 동안 선교사로 수고한 분이 계십니다. 이십 년 동안의 그 수고를 마치고 본국에 돌아와서 환영을 받습니다. 그 환영석상에서 그분은 그간에 고생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떤 사람이 그분에게 "당신은 그 귀한 청춘을 인도의 오지에 모두 바치셨군요. 그 아까운 청춘을 모두 허비하고 말았군요"라고 말합니다. 그 때 이 선교사는 담담하면서도 명확하게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이십 년의 내 청춘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존재의 의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교리문답 제1조는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여기에 인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숨지는 날까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바친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 선교사, 사람들은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생으로 살아온 그를 높이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훌륭함을 치하하려 했습니다. 그 때에 리빙스턴은 이를 사양하면서 말했습니다. "저는 결코 헌신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 생활은 헌신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특권을 누리며 살아온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 특권이라는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봉사할 수 있는 것이 특권입니다. 오늘날 내가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도 특권입니다. 남편을 위하여 수고하는 일도 특권입니다.
이들은 모두 헌신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강을 주시고 지혜를 주셨기에 이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17세기의 일입니다. 런던 대화재가 있은 뒤, 저 유명한 세인트 폴 대성당을 재건하고자 그 설계를 맡았던 크리스토퍼 렌(Sir Christopher Wren)이 하루는 채석장을 찾아 돌을 다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토닥토닥 돌을 쪼고 있는 한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짜증난다는 듯이 몹시도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보면 모르오? 돌을 다듬고 있지 않소." 또 한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합니다.
"보면 모릅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벌어 먹고사느라고 이 고생을 합니다." 다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저요?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죄를 짓고 감옥에 있을 때, 거기서 돌 다듬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전과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옥에서 나와 자유로운 몸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하여 돌을 다듬고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이렇듯 대답은 천양지차입니다.
형제가 있습니다. 동생에 비하여 형은 가난한 편입니다. 그런데 부한 동생은 불평이 많고 가난한 형은 늘 행복해 보입니다. 하루는 동생이 묻습니다. "형님, 행복의 비결이 뭐요?" 형은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아, 그거야 좋아하는 일만 하는 거지. 하고 싶은 일만 하면 행복하단다." 동생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그 좋아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형이 다정한 눈길로 동생을 바라보면서 대답합니다. "좋아하는 일이 따로 있나.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거지."
여러분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 일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가치를 창조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경륜 속에서 하고 있는 일 자체를 특권으로 알고 감사하게 받을 때,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 행복한 일을 찾아서 온 세계를 다 헤매고 다닌다 해도 결코 보람있는 일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보람있는 일이란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바로 현실의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원하는 심령을 주시면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지금, 다윗은 주님을 찬송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에 기쁨이 없다면 노예입니다. 봉사에 행복과 감사함이 없다면 위선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소유도 있고,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짜증스러운 것입니까? 불신앙 때문입니다. 기쁨도 없고 자원하는 심령도 없습니다. 노예적이고 허무적인 불가피성만이 있습니다. 이 많은 세월을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닙니다. 영혼이 자유하고 자원하는 심령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의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갈 때에, 비로소 능력과 지혜와 권능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공의 진단은 행복에 있습니다. 건강의 진단은 자유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은 얼마나 자유합니까? 능력 평가는 자발성에 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벅찬 감격과 자원하는 심령이 있을 때에만 나의 생은 놀라운 능력의 삶이 될 것입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의 사람 모세(히브리서 11장 24절~32절) (0) | 2023.11.02 |
---|---|
이 여자를 보느냐(누가복음 7장 40절~50절) (0) | 2023.11.01 |
육체의 남은 때(베드로전서 4 : 1-6) (0) | 2023.10.29 |
정직한 마음의 회복(시편 51편 1절~10절) (0) | 2023.10.29 |
종말론적 생활의식(베드로전서 4장 7절~11절) (0) | 2023.10.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