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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왕 그리스도(마태복음 21 : 1~11)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신 것은 33년이었습니다. 30년 동안은 요셉의 아들로 계시면서 목수의 일을 하였고, 3년 동안은 공생애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며 불쌍한 사람들을 돌아보셨습니다.
그 3년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간은 마지막 1주일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1주일 동안에 기독교의 핵심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들도 이 마지막 1주일에다 초점을 두고 복음서를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나 혹은 병을 고치며 능력을 행하신 모든 사실이 다 중요하지만 역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즉 마지막 1주일 동안의 사건 속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중심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이 십자가와 부활에 중심을 두고 복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1주일간의 고난 주간 중의 첫 번 행사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길에 펴고 종려나무 잎을 들고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종려나무는 가지가 없이 뿌리에서 바로 잎이 나 있고 그 잎은 아주 큽니다. 이 큰 종려나무 잎을 들고 호산나를 불렀는데, 그 뜻은 우리를 지금 구원하소서 하는 뜻이며 종려나무 잎은 승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에서 예루살렘까지 나귀를 타고 가시는데 그 거리는 약 2마일 가량 된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 나귀를 잘 볼 수 없지만 몇 십년 전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장날이 되면 나귀등에다 물건을 싣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어린 생각에 예수님께서 저런 걸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나 하고 초라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중동에서는 이 나귀가 많이 있어서 관광객들에게는 돈을 받고 한 번씩 태워 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중동에 있는 나귀는 우리 나라 나귀보다 더 작아서 키가 큰 사람이 타면 발이 땅에 닿을 정도라고 하는데, 그래도 힘이 있어서 사람을 태우고도 거뜬히 걸어 다닌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귀 중에서 그 새끼를 탔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이 행렬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현상입니다. 훈장을 단 것도 아니며, 면류관을 쓴 것도 아니요, 행렬의 앞뒤에서 나팔을 부는 것도 아닙니다. 입으셨던 옷 그대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앞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소리를 지르며 따르는 그런 행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상으로나 이스라엘의 전통으로 볼 때 아주 엄청난 행사입니다. 스가랴 9:9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야가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을 예언해 주었습니다. 이 스가랴 선지자는 구약 예언자 시대의 거의 마지막 시대의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예언이 끊어진 지 몇 백년이 지났으므로 온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야가 올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때입니다.
이스라엘의 이 메시야 대망 사상으로 볼 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것은 바로 메시야가 오늘 이 자리에 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예언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상의 문제나 종교 문화적 배경으로 볼 때 이것은 굉장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보통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 메시야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별히 생각해야 될 것은 그때가 유월절이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총독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유월절에는 무려 25만 마리나 되는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바쳤다고 했는데, 한 사람이 각각 한 마리씩 바친 것이 아니라 한 가정이나 두 가정이 합쳐서 속죄의 제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추산을 하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이는 인구는 약 250만 명 가량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조그만 도성에 열 두살 이상의 남자아이들과 따르는 부인들을 합쳐서 온 이스라엘이 다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는 먼 나라에 가 있던 사람들도 돌아오며, 이방인 중에서 이스라엘 종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리도 말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다 모이는 엄청난 집회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 있던 로마의 총독부도 정치적 소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예루살렘에 임시 총독부를 설치하는 것입니다.
이런 큰 행사의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는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의미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 복음 6:15에 보면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5천 명을 먹이셨을 때 이 굉장한 사건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놀랐으며 결국 그들에게 하나의 여론이 생기게 되었고, 그 여론이 합쳐져서 예수님을 억지로 자기들의 왕을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정치적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으므로 그들을 피하여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 인기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병자들을 고칠 때마다 특별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이적 기사를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고 비밀을 지키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세속적인 인기나, 명예나 또한 그렇게 선전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역사 하시던 예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 모인 예루살렘 성으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앞에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질투와 음모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계셨으며, 빌라도의 정치적 위선도 익히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행렬의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로마 총독부에 정치적 위험 인물로 고발하여 체포할 구실을 제공하는 일이 된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시면서 예루살렘 입성의 행렬을 감행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여러 번 말씀하신 대로 인자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막 8:31과 10:33 등 그 외 여러 곳에서 인자가 고난을 받아야 하실 것을 예고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십자가의 뜻을 예루살렘 입성의 이 거창한 행사와 연결하여 생각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억지로 지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실패의 결과로 지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도망하다가 로마 군병에게 붙들려서 지신 십자가도 아니며, 골방에 숨어 있다가 체포당하여 지신 십자가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이런 수치의 십자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같은 모양의 사형을 하는 십자가의 사건이지만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이 놀라운 역사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비추어 볼 때 그 의미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도전하는 왕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성경 말씀에 응하기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그는 용감하게 이 길을 자처하여 걸어가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는 용기를 냅니다마는 의를 위한 희생과 진실한 수고를 위해서는 비굴합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박 밑에 있을 때 3․1운동의 독립 선언서를 작성함에 있어서 33인의 국가 대표가 서명을 하는데, 누구의 이름을 먼저 쓸 것이냐 하는 것으로 굉장한 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자기의 이름을 먼저 기록하려고 했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고 회의가 무척 길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한 사람의 대표가 말하기를 누구든지 먼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면 먼저 기록하라고 했더니 모든 사람이 조용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영광을 받는 것에는 누구든지 앞장서기를 원하지만, 희생과 죽음에 있어서는 뒤로 물러서는 것이 비굴한 인간입니다. 이제 우리는 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십자가를 향해 담대히 나아가신 예수님의 그 용기와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겸손한 왕,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겸손합니다. 섬기는 자로서 겸손하여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자세로서 낮고 낮은 위치를 차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겸손과 권력은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겸손과 권력의 대조가 우리에게 오묘한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고 잠언과 시편에서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고, 교만할 때 그의 왕위를 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겸손과 권력은 함께 성립되는 것입니다. 겸손이 없는 곳에 권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빌립보 2:7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의 동등됨을 취하려 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겸손의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 겸손으로 말미암은 권력, 겸손 안에 있는 이 권력이 진정한 권력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메시야로 영접하여 그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일정 시대 말년에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31장의 만왕의 왕을 찬양하는 찬송을 부르지 못하게 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찬송가에는 흰 종이를 붙여서 보이지 않게 했으며, 후에 출판이 되어 나오는 찬송가에는 아예 이곳은 백지로 만들어 내었습니다. 천황 폐하가 있는데 또 다른 왕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이 멸망당한 후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찬송을 목이 터져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왕으로 섬깁니다. 이 세상에 왕은 하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충성을 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정치 하에서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그들의 사상과 대치되는 것으로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순교를 한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이 겸손한 왕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협박을 하지 않습니다. 징계하지도 않으며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습니다. 오직 겸손하심으로써 평화의 왕, 사랑의 왕, 용서의 왕이 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왕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가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있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겸손의 뜻을 모르는 빌라도는 예수가 왕 되심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물음 속에는 왕이면 왜 이 모양이냐고 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 ("Be hold this man!")알 수 없는 이 사람을 보라고 말하는 것을 성경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제사장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겸손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왕 되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참람하다고 하여 그를 고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겸손을 알므로 그의 왕되심을 알고, 그리스도께서 만민을 다스리시는 이 사실을 믿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며 또한 그의 최종 승리를 믿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죽어도 주를 위한 것이요 살아도 주를 위한 것이라는 고백과 함께 그에게 충성을 다짐함으로써 그의 영광에도 함께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만세를 불렀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다 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왕되게 하셔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이 행렬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이것이 누구뇨 하고 물을 때 그들은 성경이 일러 주신 대로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만왕의 왕 메시야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라고 하는 너무나도 맥없이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그들이 한 선지자를 위하여 그렇게 소리지르며 호산나를 외쳤던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군림하시는 그 길에 무엇을 펴고 있습니까? 나의 겉옷입니까? 명예입니까? 나의 재물 혹은 운명입니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겸손하게 입성하시는 그리스도의 그 길에 펴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호산나 찬송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데 있어서 위급할 때 베드로와 같이 주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며, 만왕의 왕이라고 호산나 찬송을 부르던 자들이 갈릴리의 한 선지자라고 한 것과 같이 비겁한 대답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환난이나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그를 만왕의 왕 그리스도라고 대답함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이며, 끝까지 그에게 충성하며, 어느 한 순간이라도 우리에게서 호산나 찬송이 끊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는 언제까지나 겸손하심으로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그의 겸손을 본받는 생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저희들을 위하여 이 땅위에 오셔서 모든 고난과 수치를 무릅쓰고 오직 겸손하심으로 승리하셔서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세계를 보게 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기도하옵기는 겸손의 본을 보여 주신 그리스도와 함께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최종 승리를 확신하며 끝까지 충성을 다짐하여 주님의 원하시는 뜻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도록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시며, 주님의 영광에도 함께 참여하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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