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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부족한 것(누가복음 18장 18절~23절)1468-843

by 【고동엽】 2023. 3. 31.

한 가지 부족한 것(누가복음 18장 18절~23절)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사람이란 몸이 아파도 그 아픔의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슬프고 허전하고 괴로워도 무엇 때문에 그런지 설명을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원인이 언제나 보다 깊은 곳에 있고 보다 근본적이고 본래적인 것에 있기 때문에 똑바로 헤아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사람이 앓고 있는 병의 종류가 3만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어찌 3만 가지뿐이겠습니까? 모르기는 몰라도 아마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알고 있는 병은 그 중에서 겨우 5천 가지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놀라운 일입니다. 나머지는 속수무책입니다. 원인을 모르니 처방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원인을 안다고 해서 저마다 효과적인 처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한 관원(官員)이 나옵니다. 헬라어로 '아르콘'이라고 하는 이 호칭은 반드시 무슨 정치적인 인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호칭은 좀더 폭넓은 의미로 쓰입니다. 말하자면 뭇 사람이 우러러보는 지도자급 인사(人士)라고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관원은 이처럼 존경받는 인물인 동시에 아마도 부자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한테 고민이 있습니다. 그 고민은 흔히 있는 일반적인 고민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배고픈 고통도 아니요 집 없는 한탄도 아닙니다. 직업이 없다거나 몸이 아픈 것도 아닙니다. 늘그막에 이르러 허전하고 고독한 것도 아닙니다. 이 관원은 젊고 건강합니다. 돈도 아쉽지 않을 만큼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고민이겠습니까? 혹 죄를 지어 그 가책으로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는 것일까요? 아니, 그것도 아닙니다. 문제도 모르고 해답도 모르지만 아무튼 고민은 고민입니다.
성경적으로 미루어볼 때에 이 젊은 관원에게는 아주 훌륭한 점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이 관원은 선한 부자입니다. 세상을 보면 사람에 따라서는 부자임으로 해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남에게 못할 짓을 해서 재산을 모았다든지 불로소득(不勞所得)으로 배를 불린 경우라면 당연히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마는, 이렇다할 죄가 없이도 부자는 흔히 저만 알고 남을 돌볼 줄 모르는 몰염치한 사람으로 간주되기 쉽습니다. 나쁜 짓 한 일이 없이 성실하게 재산을 모았다 하더라도 단지 부자라는 사실 하나로 해서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도덕적으로 문제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관원은 드물게도 비난받는 부자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둘째, 이 관원은 매우 진지한 영적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한 사람은 대체로 물질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많이 가진 사람이 더 인색하고 많이 가진 사람의 인심이 더 고약하다고 합니다. 물질이 전부인 줄 알고 물질을 가지면 세상것 다 가진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물질을 가졌기 때문에 인격도 가진 줄 알고, 심지어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인 양 행세하려고 듭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신령한 면에 대해서, 영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등한시할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관원은 매우 부자이면서도 신령한 진리를 열렬히 갈망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높은 차원의 신령한 세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정열을 가졌습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참 훌륭한 청년이라고 할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관원의 더욱 훌륭한 점은 세 번째에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총명과 영적 분별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그 청년이 문제를 의논할 만한 상대로는 제사장도 있고 서기관도 있고 바리새인도 있었습니다. 또 랍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로 가지 않고 저 초라한 갈릴리 청년 예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만큼 영적인 식별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 묻는 것이 영생의 문제이고 보면 이 청년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 기대를 걸고 있으니 사랑스럽기까지 합니다.
이 관원의 훌륭한 점은 또 있습니다. 그는 지금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내놓고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이 또한 훌륭한 점입니다. 니고데모와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존경받는 랍비였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그래서 예수님께 영생의 교리를 물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들의 눈을 꺼려 야음을 타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죄인과 세리를 가까이한다는 예수님 만나는 것을 남들이 보면 자신을 우습게 볼까봐 염려해서 떳떳이 찾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니고데모에 비한다면 오늘의 본문의 이 관원은 용기와 겸손과 온유를 지녔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당당히 예수님께 여쭙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만하면 훌륭한 지성인이 아닙니까?
영생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청년의 목마름은 생수로만 풀 수 있습니다. 저는 차를 운전하고 다닙니다. 때로는 목포로 경주로 대전으로 대구로 장거리 운전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스라든가 끓인 커피 같은 마실 것들을 차에 싣고 가다가 마시기도 하고, 때로는 차안에서 점심을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목이 마를 때에는 주스니 커피니 하는 것들은 아무리 마셔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바닷물은 마실수록 갈증이 더해질 뿐입니다.
오직 생수만이 갈증을 풀어 줍니다. 물이 필요할 때에 다른 것으로 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청년의 고민인 영생의 문제도 영생만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 이를테면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요 명예나 지위로도 대신 채울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영생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미래에 관심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들을 보면, 자녀들을 키우느라 수고하다가 때가 되어 결혼을 시켜 떠나보내고는 허전해 못 견뎌합니다. "이럴 수가 있나"하고 탄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때가 올 줄을 알고 살아왔습니다. 미래는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현재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싫어도 미래로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젊으면 늙어야 하고 늙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나의 미래,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10년 후, 20년 후에는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신을 차려서 생각해보면 결국은 종말론적인 미래에 생각이 미칩니다.
마지막-그 끝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끝이 올 것인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결국 죽음에 대한 관심입니다.
어떤 학생이 그 대학 교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 사람이 죽는 준비를 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교수가 "그거야 몇 분이면 되지"하고 대답합니다. "천당가는 준비를 하는데는 얼마나 걸립니까?" "그것도 몇 분이면 되네, 예수님 곁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는 잠깐 예수 믿고도 구원받지 않았나?" 그러자 젊은이는 "그렇다면 괜찮겠군요"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저는 향락이나 즐기다가 마지막에 가서 예수 믿으렵니다." 그러고는 자리를 뜨는 것입니다. 교수는 학생을 붙들어 앉혔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한마디 묻겠네. 자네는 자네가 언제 죽을지 알고있나?" "모르지요, 그야" "바로 그것이 문제일세."
과연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알지 못합니다.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적어도 '가을은 수의를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우리는 낙엽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요사이는 이른바 장수식품(長壽食品)이다 자연식품이다 하는 것이 별의별 이름으로 무수히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가위 오래 살고 싶어도 발악을 하는 세상쯤 되었습니다. 건강이 우상화된 것입니다. '토룡'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해서 무엇인가 했더니 바로 지렁이가 아니겠습니까? 지렁이가 지렁이지 웬 '토룡'입니까? 정력에 좋다고 이런 것도 먹는다고 합니다. 뱀은 하도 먹어대서 그런지 모자란다고 외국에서 수입까지 한다고 합니다.
정력제라면 하도 기를 쓰니까 남의 나라에서는 우리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도 야단스러운 민족은 처음 보았다'고 꼬집습니다.
산모의 탯줄까지 먹어치우는 등 별짓을 다하고 있으니 그런 소리를 들을 수밖에요. 세계에서 좋다는 보약은 모조리 다 먹는 바람에 보약 중독에 걸려 간암으로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하니 말문이 막힙니다. 정신들 차리고 살만큼 살다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발악을 한다고 오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병은 75퍼센트가 정신성이라고 합니다. 신경성이라고도 하지요. 아무리 잘 먹고 좋은 것 다해봐야 고작 25퍼센트 이하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75퍼센트가 정신상의 문제인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요 영적인 문제요 영생의 문제입니다. 오래 살고 싶으면 예수 잘 믿을 일입니다. 75퍼센트의 건강이 심령상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신앙 생활 바로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먹는 것이야 무엇이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국의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염라대왕 앞에 세 사람이 불려갔습니다. 염라대왕이 생명록을 보니까 이 세 사람은 아직 죽을 사람들이 아닌데 저승사자가 잘못 데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염라대왕은 세 사람에게 사과를 하고 "자네들은 되돌아가서 몇 년 더 살다 와야겠네. 우리가 실수해서 잘못 데려온 값으로 자네들에게 소원 한 가지씩을 들어주겠네. 각자 소원을 말해보게."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너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돈 많이 가져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염라대왕은 그에게 돈을 듬뿍 주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돈이란 권세와 함께 오는 법이니 권세를 주십시오" 해서 권세를 받았고, 세 번째 사람은 "저는 돈도 권세도 필요 없습니다. 경치 좋은 곳에 아름다운 집이 있어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오래오래 살고 싶습니다. "했는데, 이 소원에 대해서는 염라대왕이 "에끼놈!"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런 데가 있다면 내가 가겠다."
여러분, 쓸데없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란 어차피 늙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죽게 마련입니다. 이런 전제하에 여러분의 영생을 찾아보십시다. 영생의 문제는 내적 생명의 문제요 영성(靈性)의 문제입니다. 육체도 물질도 아니요 세상적인 것이 아닌 진리의 문제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생명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참평화의 문제입니다. 누가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누가 많이 가졌다느니 적게 가졌다느니 하고 다툴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문제가 해결될 때에 오늘의 모든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영생의 문제는 몇 가지로 풉니다.
첫째는 깨달음으로 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불교적인 것입니다. 많이 깨달아야 한다,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윤리적인 행위로 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으로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짓지 말고 경건하게 살면 된다는 생각이지요.
셋째는 신비적인 체험으로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선행과 공로를 세우면 된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다섯째는 고행과 극기로 풀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고행, 극기의 생활을 하면 된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여섯째는 율법을 지키면 된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것이 바로 이런 생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즉 행함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 외에 또 무엇인가 더할 것이 없겠습니까?" 하고 은근히 자기의 선행을 자랑하는 암시를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러분, 영생의 문제는 행함의 문제라기보다는 존재의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to do'의 문제가 아니라 'to be'의 문제입니다. 'becoming'의 문제가 아니고 'being'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상대적인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과 나와의 절대적인 관계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아무 것도 개재될 수가 없습니다. 본문의 젊은 관원은 말합니다. "내가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일단 이 청년을 칭찬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무엇인가 착각을 하고 있는 데서 그런 소리를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의 마음 깊은 곳을 아시고 아주 뜻깊은 대답을 하십니다.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오히려'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티'는 '아직도'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족하다'에서 '한 가지'는 영어로 'another'가 아니라 'the one'입니다. 하나 - 바로 유일한 것이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이 청년은 돈푼이나 있고 관원이기 때문에 저 같은 착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의 뜻깊은 대답을 하십니다. '네 재산을 다 팔아라.' 다시 말해 '네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안되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가지가 다 행동적인 것입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행동적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가져서는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워하고 안쓰럽게 여기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희생이지 감상이 아닙니다. 사랑은 곧 행동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하신 내용의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오늘의 이 청년은 스스로 마치 율법을 다 지킨 것처럼, 사랑을 한 것처럼, 선한 것처럼, 의로운 것처럼 착각 내지 환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진리와 영생을 운위해야 되겠습니다. 이 청년이 영생의 문제를 추구하면서도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금방 드러납니다. 다 팔아서 주라고 하니 못 팔겠다고 하면서 슬픈 낯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영생을 무엇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값싼 물건이나 액세서리쯤으로 여겼는가 봅니다.
영생은 모든 것을 팔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얼빠진 여왕이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의 생명을 1분만 연장해 주면 백만 불을 주겠다고 말했답니다. "내 재산 다 줄 테니 병만 고쳐주세요." 병원에서는 이런 소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마음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은 그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이 썩어질 세상을 잠시 사는 것도 이렇게 중요한데 하물며 영생의 문제이겠습니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엄청난 값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생이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팔라고요? 팔겠습니다." 청년은 이렇게 나왔어야 합니다. 영생을 소중히 여겨 고민해왔으면서 그 해결을 보지 못한 것은 그 고민이 거짓된 고민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 문제, 영생 문제를 진정으로 심각하게 고민한 사람에게는 여타의 모든 문제는 고민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주라' 하심은 이웃과의 관계를 개선하라, 네 물건은 네 것이 아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물질은 영생 문제와 상관이 없음을 네 스스로 실증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를 좇으라" - 네 생애 전부를 기울여서 나를 좇으라, 신앙을 입증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야 비로소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영생이 보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행동이 없는 신앙으로써는 멀리서 그리워할 뿐이요 영생은 누리지 못합니다. 영생의 세계가 보이지도 않습니다. 행하여야 알게 됩니다. 그 관원이 정말로 행하는 사람이었다면 율법이 얼마나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진실하기를 힘써 본 사람은 남의 진실을 비판하지 못합니다. 진실하기가 얼마나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진실하기를 힘써본 사람은 남의 진실을 비판하지 못합니다.
진실하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선하게 살아 표본 사람은 선에 대해서 감히 이러쿵저러쿵하지 못합니다. 선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율법을 지키려고 애써본 사람은 그 길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율법은 죽이는 법이라며 그리스도의 은총을 구했을 것입니다.
본문의 이 관원은 율법을 지킨 사람이 아닙니다. 지켜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 율법을 지켰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행동 없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추상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고야 영생을 바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방법이 빗나간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이런 길을 계속 가면 점점 더한 허망에 빠집니다. 멈추고 길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영생 위주의 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전부를 다 팔아서 주는 심정으로써만 영생을 이해할 수 있고 영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행동적이요 적극적이요 창조적인 신앙의 소유자가 될 때에 비로소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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