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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는 원리(빌립보서 2장 1절~8절)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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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는 원리(빌립보서 2장 1절~8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옛날 어느 마을에 우애 좋기로 소문난 형제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둘이 길을 가다가 금덩이를 발견하였습니다. 먼저 발견한 사람은 형이었고, 얼른 손으로 집은 사람은 동생이었습니다. 형은 난데없는 횡재에 눈이 둥그래진 동생을 보고 '나도 좀 만져보자'고 합니다. 한참동안 서로 번갈아 들고 가는데 참 이상합니다. 금덩이가 동생의 손에 있을 때에는 형의 마음이 편치 않고, 형의 손에 있을 때에는 동생의 마음이 괴롭습니다. '나도 좀 보자'며 몇 번이고 번갈아 들고 가다보니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나룻배를 타고 강 한가운데에 이르자 갑자기 형이 금덩이를 물 속에 던져버립니다. 동생은 깜짝 놀라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형님! 그것은 내 것인데 왜 물 속에 던집니까?" 형은 조용히 말해줍니다. "우리 둘은 언제나 화목하고 마음이 하나여서 좋았는데, 금덩이 때문에 서로 마음이 불편해진 것 같구나. 이까짓 금덩이로 우리 사이에 불화가 생길 것이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옛날에 비하여 너무나 잘살고 있습니다. 배곯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죽 한 그릇을 쑤어놓고서, 일터로 나가는 남편에게 한술 더 뜨라고 아내가 권합니다.
그러면 남편은 오히려 집안일과 아이들에게 하루종일 시달릴 당신이나 한술 더 뜨라고 양보합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 서로 위해주고 하나되었던 마음, 그 따뜻한 사랑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삭막한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이런 말씀을 하는 분들을 간간이 봅니다만, 그리워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서글프고 답답한 심경입니다. 어찌하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어느 사이에 소중한 것을 잃었습니까? 하나됨, 화목을 잃었습니다. 진실도 좋고, 열성도 좋습니다. 기술도 좋고, 번영도 좋고, 잘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화목하지 못하면 이 모든 것이 쓸데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디 하나였습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에 하나같이 벌거숭이로 태어났습니다. 죽을 때에도 그럴 것입니다. 혹 비석을 크게 세우거나 무덤을 화려하게 장식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습니다. 시작도 하나요 끝도 하나입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세상살이에 뭐 그리 대단하다고 허세를 부립니까? 무슨 차등이 있다고 남을 괴롭히고 자기도 괴롭힙니까? 알고보면 90퍼센트가 다 같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런데도 많이 다르다,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구분하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됨의 본래성, 화목함의 조화에서 오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하나됨을 지키고 받들어야 합니다. 협력하여야 합니다.
생명은 하나됨의 신비 속에서 태어납니다. 하나됨의 분위기 속에서 아름답게 성장하고 하나됨의 근본 구조 속에서 힘을 발동합니다. 하나되지 못하면 저도 없고 나도 없습니다. 조화가 깨어지면 생명력이 사라집니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피아노를 예로 들어봅시다. 이것을 건반, 쇠줄, 망치, 철사 줄 등으로 부분 부분 다 떼어내면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아이들의 장난감도 되지 못합니다. 남을 죽이고서 내가 살겠다, 다른 사람이 망해야 내가 부자가 된다---이런 고약한 생각이 어디 있습니까? 참으로 답답합니다. 자살행위입니다.
근심, 고통이란 말은 헬라어로 '분열'이라는 말이 됩니다. 두마음 - 마음이 둘로 갈라지면 힘도 분산됩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바뀝니다. 한 마음이 되어야 지혜와 창의력과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는 하나되어야 함을 알고 있고 그 절대적인 필요성도 알고 있습니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직장도, 국가도 하나되어야 함을 압니다. 총화도 알고 단결도 압니다. '제발 하나되자!' --- 열심히 외치고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와 원인에 대하여 겸손히 생각해봅시다. 대개는 그 원인이 밖에 있는 것, 객관적인 것이라고만 치부하려듭니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면 안에 있습니다. 화목하지 못한 이유가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부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 원인을 나 자신에게 돌려서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과 온유를 배웁시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됨을 강조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2절)" --- 네 가지로 풀어 말합니다. 사랑도, 뜻도, 마음도 오로지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하나되지 못하는 이유를 자세하고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될 수 있는 길을 보여줍니다. 우선 자기교만 때문에 하나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겸손하지 못함과 자기자랑은 분열을 초래합니다. 교만은 불 신앙으로 통합니다. 교만할 때에 배가 하나님이 되고, 내가 우상이 됩니다. 내가 심판자가 되고, 내가 절대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심판하십니다. 교만할 때에 마음이 분열되고, 고민하게 되고, 가정이 깨지는 것입니다. 심판이 바로 이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를 겪은 후 사람들은 유랑을 하다가 넓게 펼쳐진 시날 광야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그곳에 바벨탑을 세우려 하였습니다.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교만한 마음으로 '단결하자 하나되자'고 외쳤기에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교만을 보시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어 다 분열시키십니다. 분산시켜서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십니다. 저들은 하나되고자 하였으나 끝내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습니다. 여러분, 분열은 교만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되려고 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전부 갈라지고 맙니다. 오직 겸손으로 하나됨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우월감이 문제가 됩니다. 나는 특별하다 라는 특권의식 때문에 하나되지 못합니다. 가만히 보면 특별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나는 좀 특별하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교육학계에 이런 보고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가 얻어맞고 들어왔을 때, "너는 그러면 안 된다.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너만은 안 된다. 너는 특별하다"는 식으로 훈계하면, 그 아이는 커서 특별히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문제아가 될 소지가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인의 아들이나 종의 아들이나 아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싸워서 터지는 데에 양반 상놈 구별이 있습니까?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같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모인 자리에 가보면 쉽게 남녀 대결의 장(場)이 되어버리는 것을 봅니다. 남자들은 밤낮 여자들한테 꼼짝못하고 살면서도 자기네들이 제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또 그렇습니다. "남자보다 여자가 낫지요. 어머님이 그러시더군요." 이렇게 여자를 칭찬하는 남자가 없습니다. "역시 남자는 남자이지요." 이렇게 말하는 여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래서 편안하겠습니까?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자기우월감---스스로는 내가 가장 못된 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내가 제일인 양 나섭니다. 자기 우월을 늘 상 내세웁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3절)," 나와 같을 뿐만 아니라 나보다 한 단계 더 높여서 남을 더 낫게 여겨야 하나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부관계라는 것이 참으로 묘합니다. 남편이 밖에 나가 일하는 동안 아내와 아들이 다투게 되었습니다. 아들 녀석이 홧김에 밥상을 들어 엎어 부수고 난리를 피웁니다. "용케 니 애비 닮았구나!" 아내의 입에서 가시 박힌 말이 튀어나옵니다. 평소에는 순종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마음속에는 불만이 들어 있었습니다. 잘한 일에는 서로 자기 닮았다고 하고, 잘못한 일에는 서로 상대방을 닮았다고 합니다. 이래서 되겠습니까? 농담 속에 진실이 있고, 흘러가는 말속에 뼈가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유행합디다.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잘난 것도 없고 한치 나을 것도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하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못난 짓이요, 착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가졌다고 하면 얼마나 가졌으며, 안다고 하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권좌거추풍낙엽(權座居秋風落葉)- 권좌에 있음이 가을바람에 낙엽 떨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그토록 대단합니까? 젊었다고 하지만 그 젊음이 얼마나 오래 유지되겠습니까? 그 명예가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을까요.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 특별한 것처럼 행세하려드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족보 타령하는 사람처럼 한심한 사람 없습디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데 한참이나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자기특권을 주장함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다툼과 경쟁과 허세와 거짓입니다. 잘못된 경쟁심, 다툼과 질투, 끝내는 거짓까지 생산하게 됩니다.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재보아야 도토리이지 밤톨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우월감을 내세울 때에 자기도 모르게 허세와 경쟁과 거짓에 빠집니다. 자기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언젠가 부흥회를 인도하러 제주도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조그만 여관에서 여장(旅裝)을 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청소부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많으신 분이었는데 일주일을 지내다보니 퍽 친해졌습니다. 아주머니는 자신이 알콜중독자이자, 창녀였다는 과거사를 서슴없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대기였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저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모두 사실입니까?" 아주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세계에는 거짓말이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나는 알콜중독자였고 창녀였습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는 아주머니의 답변은 가슴이 뜨끔해질 만큼 충격적이었습니다. "내 삶이 이 바닥까지 내려왔는데, 거짓말을 하겠어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 안 되는 명예나 체면, 변변치 못한 자기우월감으로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고 허세를 부리고는 돌아서서 울어야 합니까? 이것이 지성인의 맹점입니다.
부부관계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아이들이 무엇을 잘하면 구체적으로 "네 아버지의 이런 점을 닮아서 잘하였구나" 또는 "네 어머니의 이런 점을 닮아서 그렇게 잘하였구나"하고 이야기를 하십시오. 말하는 것부터 고쳐보십시오. 그러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 팽팽하게 허세를 부리는 한은 부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숙자(同宿者)일 뿐 부부는 아닙니다. 한 사람은 폭군이요, 한 사람은 그 그늘에서 노예의 고통을 받고 삽니다. 그럭저럭 몇십 년을 같이 살아왔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과연 하나된 일이 있는가? 서로를 존경하였는가? 오직 겸손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때에 하나됨은 이루어집니다. 나 외의 다른 세계를 깊이 이해할 줄 아는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항상 너그러이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자기집중에, 자기생각에 사로잡혀 있어도 하나되지 못합니다. 자기의 경험과 세계관에 꽉 잡혀 있거나, 자기의 욕심과 자랑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배고픔과 슬픔을 알 수 없습니다. 자기의 절망, 고통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쁜 마음을 알아차릴 여지가 없습니다. 성경말씀대로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4절)"야 하나될 수 있습니다.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남편 때문에 속을 썩는 어느 부인과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편에서 먼저 두고보자 하지 말고, 저녁에 늦게 들어오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렇게 위로의 말을 해보라고요. "집안 식구들 벌어 먹이느라 이렇게 밤늦도록 수고하셨군요. 얼마나 힘드세요?" "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는 빨리 나왔는데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한잔하느라 늦었다." 아마도 남편은 이렇게 변명할 것입니다. 그렇게 나오거든 더욱 동정을 하여 "집에 곧바로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배회를 하다가 들어오다니, 얼마나 고달프세요. 제가 당신을 제대로 위로하지 못한 탓이에요." 이쯤 되면 남편은 할말이 없어집니다. 자기도 낯이 있지 잘못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회피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 보기도 민망하지요.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제가 시키는 대로 했더니 버릇이 완전히 고쳐지더라고 합디다. 사실 과오를 반복해야 하는 당사자의 마음인들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누구는 집에 바로 들어가고 싶지 않나요? 사정이 그럴만하니까 그랬겠지 생각합시다.
어느 외과의사는 수술을 한 날이면 집에 바로 못 들어간다고 합니다. 피를 보았기 때문에 살기(殺氣)가 남아 있는 것 같아서라고 합니다. 자기 돈을 써가며 친구를 만나고, 저녁을 먹고, 당구장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기분이 완전히 전환되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것을 모르는 아내는 늦게 들어온다고 야단이랍니다. 배회하는 사람인들 오죽하겠습니까? 안 되는 일인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기막힌 사정을 이해 좀 하십시다. 저쪽 입장을 돌아보십시다.
저는 어렸을 때에 농촌에서 자랐습니다. 산으로 바다로 마음껏 뛰놀며 자랐는데, 요즘 아이들이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참으로 불쌍합니다. 집안은 사면(四面)이 모두 콘크리트 벽이요, 밖은 자동차 천지입니다. 부모님들은 밤낮 공부 못한다고 야단입니다.
누구는 하기 싫어서 못하나요? 우등생이 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입니까? 할만하지 못하니까 못하는 것이지요. 학교에 가도 구박이요, 집에 와도 나가 죽으라고 합니다. 살고 싶지 않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마저 실망한 아이는 마음붙일 곳을 잃어 방황합니다. 상황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치닫고 있는데, 공부가 되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 상대방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절)"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가끔 생각나는 영화가 있습니다.「대부(大父)」라는 영화인데. 마피아 깡패의 두목들이 화해를 하는 의식이 나옵니다. 당석(當席)에서 각기 손가락을 잘라 피를 냅니다. 그 피를 컵에 받아 섞은 다음에 돌아가면서 마십니다. 하나되는 의식 치고 이만한 의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다, 다시는 싸우지 말자, 서로 사랑하자, 화목하자고 피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웬걸 사소한 일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더니 두 사람만 남고 다 죽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화목을 외친다고, 맹세를 한다고 하나가 됩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돌아가 진리와 의와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할 때에만 하나될 수 있습니다. 백번천번 동맹을 맺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맹세도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 오직 그의 나라와 의를 중심으로 할 때에만 비로소 하나됨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가운데서 하나가 되십시다. 하나되는 그 때에 기쁨과 영광과 창조의 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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