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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성령으로 난 사람(요한복음 3장 1절~11절)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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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난 사람(요한복음 3장 1절~11절)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어느 정신요양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의사가 한 환자의 방으로 들어섰습니다. 환자는 옷장을 뒤지고, 서랍을 뒤지고, 침대 밑까지 뒤지면서 무엇을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그렇게 찾고 있소?" 의사가 묻자 환자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선생님, 나는 잃어버린 나 자신을 찾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의사가 오히려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장애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자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요, 청각장애자는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지(四肢)중에 어느 한 부분이라도 고장난 곳이 있는 사람을 일컬어 신체장애자라고 합니다. 정신이 고장난 사람은 정신장애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정신장애자보다 더 심각한 장애자가 있습니다. 인격장애자(personality disorder)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지식도 있고, 명예도 있고, 지위도 있고, 기술도 있고, 돈도 있습니다. 가질 것은 다 가졌지만 내적 존재가 장애를 받았습니다. 그 장애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난치병치고 가장 어려운 난치병입니다. 스스로 병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격장애자의 가장 큰 특징은 교만입니다. 하나같이 내가 잘났다고 나섭니다. 내 생각만이 옳습니다.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교만이 인격장애자의 첫째가는 증상입니다. 치료를 요청하지 않기 때문에 구제할 방법이 없을 뿐더러 회개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가득 실은 버스를 상상해봅시다. 버스도 튼튼하고 길도 평탄합니다. 이렇듯 모든 것이 최상인데 운전사가 술취했다고 해봅시다. 우리가 그 버스를 타고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습니까? 다른 조건이 다 좋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운전사의 정신이 건강해야 합니다. 여기서 흔들리면 전체가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태양계 내의 모든 위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합니다.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태양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궤도를 돌고 있습니다. 달은 지구의 위성입니다. 역시 정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구 주위를 돕니다. 마음대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물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목이나 발목을 묶어놓지 않아 자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인즉 본능에 묶여 끌려다닙니다.
본능의 지배를 받습니다. '본능의 지배'라니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갓 태어나 눈도 제대로 못뜨는 강아지는 새끼를 낳고 편안히 누워 있는 어미개한테로 꿈틀거리며 기어갑니다. 그리고는 정확히 어미개의 젖꼭지를 찾아 뭅니다. 참으로 신통합니다. 사람은 갓 태어났을 때에 자생(自生)할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만, 동물은 안 그렇습니다. 생존 본능, 생식 본능, 보호 본능에 의해 살아갑니다. 철새가 기후에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는 본능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엄청난 끈이 있습니다. 그 지배력에 이끌리어 평생을 살아갑니다.
인간은 동물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에게는 없는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성적 본능입니다.
이성에 따라 행동하고, 비판하고, 추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안 된다, 이 음식은 먹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내것이 아니다 --- 이러한 판단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판단, 선과 악의 구별을 할 줄 압니다. 이성적 판단력을 잃어버린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패륜아(悖倫兒)로 낙인찍힙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이성 위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성령이 그의 인격을 다스리십니다. 성령의 말씀, 성령의 지시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무엇이 나를 주도하는가, 무엇이 나를 붙들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동물적 본능입니까, 이성적 본능입니까, 아니면 성령의 역사입니까? 어디에 붙들려 있습니까? 무엇이 나의 인격을 가장 강하게 붙들고 있는가, 이에 따라 그사람의 사람됨이 나타납니다. 어떤 이는 돈, 명예, 우상, 거짓, 헛된 사상에, 또 어떤 이는 죄책감, 피해망상에 잔뜩 붙들려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런가하면 은혜와 감사, 사랑과 찬송에 붙들려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정상적인 인간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서 보는 바, 영과 혼과 몸의 세 요소로 구성됩니다. 몸은 건전한 정신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만일 정신이 몸을 지배하지 못하고, 몸이 정신에 매여 있지 않다면 장애자입니다. 손발의 움직임이 정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들은 서로 독립되어 있는 것 같지만 머리와 뇌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머리에서 몸 전체를 마스터 컨트롤(master control) 합니다. 또한 정신은 건강한 영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인 까닭에 정신과 영이 바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그 영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지배하에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몸은 정신의 지배하에, 정신은 영의 지배하에, 영은 말씀과 성령의 지배하에 놓일 때에 바른 관계가 성립합니다. 이 질서가 파괴될 때에 disorder, 이른바 장애자가 되는 것입니다. 궤도에서 이탈하여 손발이 명령에 불복합니다. 마음이 궤도에서 벗어나 허망하여집니다. 성령이 그의 영을 지배하지 않기에 이탈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격장애를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차라리 신체장애는 부분적인 장애입니다. 눈에 장애가 있으면 눈 하나가 불편하고, 손에 장애가 있으면 손 하나가 불편할 뿐입니다. 그러나 인격장애는 근본적이고 전체적인 것입니다. 뿌리부터 흔들리는 장애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격장애자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가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아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서양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냉정합니다. 미국은 그 나라 전체 인구의 3분의 2가 인격장애자라고 자인하고 있습니다.
제 아내를 구타하는 사람이 40퍼센트가 되는 것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인격장애자들의 소행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통계상 인구의 10분의 1이 인격장애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통계치가 진실인지 대충 셈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시간, 여러분 스스로 한번 진단해보시기 바랍니다. 대체로 인격장애자의 증상은 이러합니다. 첫째, 편협적(偏狹的)인격장애가 있습니다. 생각이 좁아집니다. 사람을 의심하고, 의심할 필요가 없는 일을 자꾸 의심합니다.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논쟁하고 싸우려듭니다. 성을 잘 냅니다. 극단적으로 이기적입니다. 국가, 사회,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제 이익만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성공했다는 말을 들을 때에나 친척, 이웃, 친구의 일이 잘 풀려나감을 볼 때, '잘되어서 기쁘다'고 느껴집니까? 아니면 배가 아픕니까? 슬그머니 배가 아파오거든 내 인격에 장애가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쉽게 말하여 장애자는 병신입니다. '제 주제에 뭐나 된다고, 흥' --- 기뻐하지 못하고 이렇게 속이 뒤틀리면 병든 것입니다. 어디부터인가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시기, 질투를 병 아닌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요즘 세태를 보면 참 이해가 안갑니다. 아내가 남편을 질투하고, 남편이 아내를 질투합니다. 질투와 투기로 꽉 차 있습니다. 남을 칭찬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기뻐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격장애의 첫째 증상입니다.
둘째, 정신분열성(精神分裂性) 인격장애가 있습니다. 허무감에 빠집니다. 감각이 둔화되어 멍청해집니다. 고립감과 소외감을 느낍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이 있어도 혼자라고 느낍니다. 사막에 저 혼자 던져진 것마냥 외롭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근본적으로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고독이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연극성(演劇性) 인격장애가 있습니다.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것에 빠집니다. 과장, 교만으로 자기 우상에 빠집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틀렸고 나만이 옳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내가 왕년에 어쨌느니, 어렸을 때에 굉장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떠벌립니다. 유치원 다닐 때에 우등생이었던 것을 자랑합니다. 때로는 예쁘고 공부 잘하는 것도 문제가 됩디다. 좀 예쁘게 생겼다고 예쁘다 예쁘다 칭찬 받으면서 자라면 후에 인격장애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대개 팔자가 사납습니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 말은 그래서 생긴 말입니다. 공부 잘해서 일등하기를 너무 바라지 마십시다. 자꾸 잘한다고 해주면 정말 잘하는 줄 압니다. 가만히 보면 일류대학을 나왔다는 사람들. 일등을 하며 성장한 사람들에게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날뜁니다." 자기는 무척 잘난 것처럼 한마디 합니다마는, 이것이 장애자의 증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병든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혹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등을 못해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다 해보았습니다. 성적이 좋으면 어떻고 나쁘면 어떻습니까? 나만 잘났다는 생각이 스스로를 병신으로 만듭니다. 한평생 그 모양으로 살게 합니다. 도대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입니다. 자기 환상과 자기 우상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내가 교리이자 기준입니다. 이런 맹랑한 노릇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장애입니다.
넷째, 경제적(經濟的) 인격장애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피해망상증(被害妄想症)입니다. 성공이나 실패는 따지고 보면 질적인 것이지 물량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항상 패배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권투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텔레비전에서 중계하는 권투 프로그램은 즐겨봅니다. 권투 자체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해설자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입니다. 며칠전에도 권투 중계방송을 보았습니다. 두 선수가 당당히 마주서서 때려야 하는데 한쪽이 겁먹은 강아지처럼 비실비실 도망다니니 경기가 되지를 않습니다. "○○○ 선수는 얼마 전의 경기에서 KO패를 당한 일이 있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엉망으로 참패하였지요. 그 악몽 때문에 경기가 진행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나간 패배의 기억을 빨리 떨쳐버려야 이길 수가 있을 텐데요." 해설하는 사람이 보다 못해 이런 이야기까지 합니다. 옳게 보았습니다. 실패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또다시 처참히 패배할까봐 겁을 먹고 도망다니니 게임이 됩니까? 피해의식이 이런 것입니다. 여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생각해봅시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내 아들아, 어서 오너라"하고 환영합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과거의 패배의식에 매여서 "아버지, 죄송합니다. 재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하며 고개를 못 듭니다.
여기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지난날이야 어떠했든 오늘 아버지가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면 아들인 것입니다. 당당하게 새출발을 하여야 합니다. 탕자의 악몽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폐증(自閉症) 환자가 됩니다.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고, 사람 만나는 것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피해의식으로 인한 정신적 반작용이 이런 무서운 증상을 낳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히스테리적인 인격장애가 있습니다. 평생동안 단 한가지도 긍정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과민반응을 일으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 폭력을 위한 폭력, 시위를 위한 시위 부정적인 세계관에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일, 나라일, 사회일, 가정일, 매사를 비관적으로 봅니다. 왜 부정적인 시각으로 어두운 면만을 보아서 불행을 자초합니까? 그것은 이미 인격장애가 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인격장애의 증상들은 알콜중독, 마약중독, 이혼, 도박, 투기로 발전합니다. 더욱 진전하여 결손가정을 만들고 자살, 폭력을 부릅니다. 내가 나를 죽이지 못할 때에는 남은 시간에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1989년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고교생의 50.5퍼센트가 담배를 피워본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 한 해 동안에 자살한 학생은 약 120명이 됩니다. 1986년의 통계로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57퍼센트가 음주 인구였습니다. 그후 20대 음주 인구는 매년 10퍼센트씩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흡연자는 비흡연자에 비해 폐암 발생률이 18배나 높다고 합니다. 또한 중고교생의 흡연은 성인의 흡연과 달라서 25배나 폐암 발생률이 높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에 줄담배를 피우면 나중에 결정적으로 암에 걸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흡연자가 증가해 가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인격장애가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전형적인 바리새인이요 학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10절)"하신 것처럼 그는 지성의 대표입니다. 유대인의 관원이며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시체가 되었을 때 비싼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왔을 만큼 부자입니다. 당시로는 꽤 높은 지위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의 고민을 의논하고자 한 일입니다. 그는 삶에 대하여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미래, 생명, 영생, 인격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할 것인지 갈급(渴急)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오직 이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심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생명에 대한 말씀이 36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생명, 영생, 샬롬에 대해서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의 조건을 내세우십니다 --- '오직 성령으로 다시 나야 한다.' 바리새적인 경건, 또는 나의 지식, 율법, 지위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성령으로 다시 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심입니다.
스위스의 임상학자이며 의사인 폴 투니어(Paul Tounier)는 평생토록 정신병 전문의로서 많은 환자를 치료하였고, 책도 저술하였습니다. 그의 저술에서 주장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사회의 다양한 조직, 경제 조직이나 사회 단체같은 것들은 모두 비인격적 상태이다. 그래서 인격을 변화시키는 데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직 영적이고 내적인 놀라운 사건에서만 인격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여러분, 공부를 많이 시킨다고 인격이 달라지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위가 높다고 인격이 높은 것은 아닙니다.
재산이 생겼다고 사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잘살게 되었다고 인간이 바뀌는 법도 없습니다. 그럴수록 점점 더 큰 문제에 부딪힙니다.
오랜 기간을 배고파 고생하던 사람이 잘살아보자고 이를 악물어 공부하고,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법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성취하여도 인격파탄이 위에서부터 오면 달리 구제책이 없습니다.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부터 인격장애가 옵니다. 이 장애는 오직 성령으로만 치료가 가능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스승이 되어서 이만한 것도 모르느냐고 니고데모를 책망하십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6절)" ---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창조적인 역사가 아니고는 절대로 인격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중생(重生)을 생각합시다. 중생하지 못한 인격, 중생하지 못한 교인, 중생하지 못한 일꾼은 이제 중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중생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신비롭고 신기원적인, 의식 이전의 역사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요 3:8)" --- 바람이 분다는 말은 성령이 분다는 뜻입니다. 헬라말로는 '프류마 프네이'입니다. 성령이 들어오실 때. 네 안에 언제 변화가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신비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살던 부부가 있었습니다. 늘 긴장 속에서 서로 팽팽하게 대하며 살았답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부부에게 조그만 의견충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여보, 미안하오, 내 잘못이오"하며 아내에게 사과를 합니다. 이 한마디에 아내는 사흘 동안 울었답니다. 너무 고마워서 울었답니다. 평생을 같이 살면서도 '미안하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달라지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언젠가 소위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담들과 좌담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물어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중생이 무엇입니까?" 그리고도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예수 믿고 나서 한 가지가 달라졌어요. 다른 사람은 다 틀리고 나만 옳은 줄 알았는데, 이제는 웬일인지 다른 사람은 옳고 훌륭하고, 내가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또한 그에게는 오로지 두 가지 마음밖에 없다고 합니다. 먼저는 누구를 만나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아내를 보아도, 아이들을 보아도 미안할 따름입니다. 또한,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사랑하여주니 고맙기 그지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고맙고, 저것도 고맙고, 모든 것이 고맙기만 합니다. 저는 그 사람을 큰 소리로 칭찬해주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오. 성경이 몇 권인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예수 믿는 것이오!"
여러분 이것이 중생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인격장애자의 증상과 정반대의 모습을 비교해보십시다. 성령으로 거듭났을 때에 나도 모르게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내 정과 욕심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신 부름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신다.' 역사를 변화시킨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이 임하여 완전히 새사람이 된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몇 사람에 의하여 오늘의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변화를 바라십니다. 나 한 사람의 변화가 나의 가정을 달라지게 하고 인간관계도 달라지게 합니다.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됩니다. 오직 중생, 오직 영생, 오직 구원, 오직 은혜 --- 여기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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