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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새사람의 본질(에베소서 2장 11절~22절)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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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새사람의 본질(에베소서 2장 11절~22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割禮黨)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지난달 저는 동구권을 여행하던 중에 공산국가였던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려운 공산치하에서 13년 동안이나 개혁교회 감독을 지낸 분을 만나보았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이 시간에 굳이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마는 저는 그분과 지난 과거의 역사와 앞으로 되어질 일을 놓고 여러 시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가운데 이런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감독님께서는 왜 사회주의가 붕괴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이렇게 공산주의가 무너졌을까요?" "바로 인류학적 문제 때문입니다." 그분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명료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되물었습니다. "인류학적 문제라니요?" 그분은 인류학적 문제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사람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40년 동안 사람들이 이상하게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궁금증만 더해져서 저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분은 단적으로 세 가지를 지적합니다.
'no-responsibility, no-sincerity, no-honesty' ----- 책임감이 없고 성실성이 없고 진실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지적에는 실로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로만 들을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똑같은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는 한마디로 혁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혁명의 기본의도는 자기혁명이 아닙니다. '내가 가난한 것은 부한 사람 때문이다' '부한 사람과 자본주의를 제거하라' '인텔리겐차를 몰아내라' 이것이 공산주의 혁명입니다. 우리가 혁명이라는 말을 쉽게 쓰고 있습니다마는 혁명은 하나같이 스스로 책임지려는 행위가 아닙니다.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한 것은 부자 때문이다, 그런고로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혁명 숙청, 혁명 숙청을 되풀이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10월 혁명으로 7천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후 소련에서는 백만 명도 넘게 숙청해가면서 그 체제를 유지해갔다고 합니다. 엄청난 피의 역사입니다. 이 모든 문제가 내게 책임이 없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40년 동안이나 혁명과 숙청을 거듭해왔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상황이 계속될 것이냐는 말입니다. 아무튼 그러는 동안에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무책임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무릇 모든 일의 책임은 항상 내가 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까지도 내 책임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도덕성이요 종교성입니다. 그런데 만사가 내 책임이 아닙니다. 상대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될 일입니까?
또한 게으릅니다. 성실성이 없습니다. 내 책임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유재산이 없어서입니다. 소유라는 기본적인 욕망이 그들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될 수도 없습니다. 돈을 벌 필요도, 축적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연히 게을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가정을 방문해보니 문 앞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습니다. 잡초 한 포기를 뽑지 않습니다. 왜 뽑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자기 집이 아니기에 뽑을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오기를 무려 40년이었습니다. 결국 내 것이 없는 사회가 사람을 이토록 불성실하게 만들고 만 것입니다.
진실도 없습니다. 공산 치하에서 살아본 분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공산치하에서 좀 살았습니다마는 그곳에서는 거짓말을 안하고는 살 도리가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거짓말에 능숙해야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거짓말이 체질화해버렸습니다. 진실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무도 믿지를 못합니다. 한 사람이 명령을 내리면 그 뒤에 감시자가 있고, 그 감시자 뒤에 또 다른 감시자가 있습니다. 서로 끝없이 견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못 믿습니다. 부모도 자식도, 심지어 부부간에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사회가 설 수 있었겠습니까?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에 기초했기에 결국에는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에야 드디어 공산국가의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습니다.
이는 교회의 승리요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매일이 축제 분위기'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동․서독이 통일했다고 합니다마는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통일이 아닙니다. 동독이 전적으로 망한 것입니다. 동독이 완전히 백기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자멸한 것입니다. 누가 손댄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망할 수밖에 없는 이 요소가 우리에겐 없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세계 역사에서 문제아로 두 사람을 꼽습니다. 하나는 마르크스(Marx. K.H.)요, 하나는 프로이트(Freud, S.)입니다. 마르크스는 유물사관에다 정치나 경제 등 모든 사고 체제를 대입시켰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생산도구로, 수단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결국은 사람이 물질이 된 것이지요. 인간부재입니다. 인간이 인간 된 존재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자유국가에서의 문제아로 프로이트가 있습니다. 그가 끼친 영향은 향락 위주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놀고, 비비꼬고 흔들고 --- 돈은 벌어서 뭐하느냐, 그저 즐기고 보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性)의 타락과 향락주의 때문에 썩어문드러져 망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절로 망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두 세계가 다 이렇듯 몰락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모름지기 문제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소유의 문제도 아니요 질서, 제도, 기술, 자본의 문제도 아닙니다. 없던 사람이 뭣 좀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사람되는 것 보았습니까? 공부를 못하던 사람이 잘하게 된다고 해서 사람되는 것 보았습니까? 제가 30년 동안 목회 하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그 공부한 것과 인간 됨됨이는 별개더란 말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처음부터 무조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돈이 있고 없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위가 높고 낮고도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대로 인간일 뿐입니다. 저는 자랄 때에 할아버지가 우스개삼아 하시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옛날에는 정초를 맞게 되면 목욕을 깨끗하게 하고 새 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그래서 섣달이 되면 새 옷을 짓느라고 여인네들이 얼마나 수고를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해서 한 여인네가 목욕을 깨끗이 한 남편에게 새로 지은 명주 바지저고리를 입혔습니다. 아침에 나갈 때에 보니 참으로 의젓한 신랑입니다. '저렇게 의젓한 양반이었구나'하면서 남편에 대한 자부심을 가집니다. 자신도 참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저녁에 들어올 때에 보니 만취가 되어서 새 옷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결론 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명주옷 입지나 말지'였다고 합니다.
옷 바꾸어 입었다고 사람이 달라집니까? 집을 바꾸었다고 하여 사람이 달라집니까? 다 별개입니다.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의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한 새사람을 지어(15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새사람이란 '카이로스 안드로퍼스'입니다. '카이로스'라고 하는 말은 물리적인 혹은 물량적인 새로움이 아닙니다. 시간적인 새로움도 아닙니다. 이는 질적인 차원의 본질적 새로움을 의미합니다. 어제와 오늘, 이러한 시간적인 차이에서 오는 새로움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새로움이란 본질적이요 인간적인 차원의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교회에서 쓰는 용어로 말하자면 중생의 문제입니다.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기적이 아니고는 새로움이란 이 땅에 없습니다. 동구권이 자유화하면서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교회로부터 강제로 빼앗았던 학교를 다시 교회에 돌려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립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국공립학교에까지 성경을 가르치도록 명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르칠 교사도 없고 교재도 없어서 문제라고 합니다. 또한 성직자들은 4시간씩 자면서 일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모자라는데 할 일이 많아서 잠잘 시간조차 없습니다. 사람을 바꾸어 놓아야 하는데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서 "그때에," 13절에서 "이제는"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때란 옛날을 말함이요 이제라 함은 새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때와 이제 --- 이 둘을 질적인 차원에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때를 오늘에 상징적으로 말씀합니다. 이방인이었다.
은혜에서 소외된 자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이방사람들에 대해서 참 교만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당시 이방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그야말로 사람이 아닙니다. 동물적이요 물질적입니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방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탈무드」에는 심지어 이런 말까지 나옵니다. '뱀을 죽이는 일은 잘한 일이다. 이방사람을 죽이는 일은 더 잘한 일이다' --- 이렇듯 못돼 먹었습니다. 이방사람이라면 산모를 돕는 것조차도 금했습니다. 이방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잘못된 일이라 여겨서입니다. 이방사람과 결혼하면 멀쩡하게 살아 있는 그 사람의 장례식을 지냈습니다. 이방사람과 결혼함으로써 그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여러분, 이방사람 즉 하나님께로서 떠난 인간의 모습을 옛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합니다. 또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12절)"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성경이 없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지 아니한 상태를 말합니다. 당연히 십계명도 모릅니다. 들은 것은 엉뚱한 이야기가 고작입니다. 그런 사람이 과연 어떠한 사람으로 살아가겠습니까?
저는 오래 전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있었던 한 북한 선수에 관한 이야기를 가끔 생각해봅니다. 그 올림픽에서 남한 선수들은 금메달을 하나도 못 땄는데 북한 선수 하나가 사격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대단한 일이지요. 기자들이 몰려가 축하를 하면서 어떻게 그리 총을 잘 쏘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수가 대답합니다. "수령님의 교시대로 원수의 심장을 겨누는 마음 자세로 총을 쏘았다." 이 말을 들은 많은 선수들이 그와는 경기를 안 하겠다고, 그런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는 것은 건전한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다고 항의를 했답니다. 할 수 없이 공개사과를 하고야 말았습니다. 참 마음 아픈 이야기입니다. 저 북한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들이 다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말씀이 없습니다. 보고들은 것은 '수령님 교시'뿐입니다.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원수의 심장을 겨누는 마음으로 쏘라' --- 말이나 됩니까? 이렇게 살기를 40년, 어떤 인간들이 되었겠습니까?
가끔 미국에 사는 우리 교포들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방문합니다. 방문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입니까? 몇십 년만에 친지들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그렇게 만났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북의 가족들은 대뜸 "이 반동분자 왜 왔니?"라고 말하더랍니다. '내가 이런 소리나 듣자고 왔나' --- 말문이 막히더랍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반동분자'라고 지칭하도록 배워왔습니다. 다른 말은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말씀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말씀 안에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한마디의 말씀도 들어본 일이 없었으니 그 인간상이 과연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도 그렇습니다. 말씀이 없는 사람, 무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마음속에 소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집 한 채 얻는 것이 소망이요 자동차 한대 사는 것이 소망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마지막에 가서는 절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말씀이 있고, 이제는 구원을 얻어서 소망이 있어졌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의 요지는 한마디로 옛사람은 불화의 관계요 새사람은 화평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화평이 새사람의 본질이요 분열과 불화가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만날 때, 저 사람이 있어야 내가 있다, 저 사람이 기뻐야 내가 기쁘다 --- 이런 생각으로 대합니까, 아니면 누구를 대하든지 적대감으로 대합니까? 수상하면 다시 보라, 이러면 늑대란 말입니다. 병든 사회의 병든 인간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반가워하지 못하고 이유 없이 원수와 같이, 적과 같이 대한다면 그 사회는 멸망의 문턱에 선 사회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모든 사람을 화목하게 대합니다. 사랑으로 화평으로 대합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옛사람은 자기 자신을 학대합니다. '나는 구제불능이다'라고 자신을 저주합니다. 매일 자살합니다. 정신적으로 죽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자신만 죽으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남까지 죽여서 문제입니다. 바로 그러한 인간으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보면 새사람으로, 화평의 사람이 됩니다. 화평의 눈으로 보고 화평의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새사람, 곧 화평이라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이 화평을 인간 스스로 얻을 수 있느냐입니다. 나이 많은 분들은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자기 의지에 대해서 얼마만큼 자신이 있습니까? 내 마음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습니까? 과연 후회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제일 믿지 못할 것이 자기 마음입니다. 변덕스럽고 약합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빨리 끝내십시다. 더는 자기 자신을 믿지 마십시다. 화평은 오직 그리스도께로서만 가능합니다.
14절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고 말씀합니다. 또 15절에서 "화평하게 하시고" 다시 17절에서 "평안을 전하셨으니"라고 합니다. 화평의 근본은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가능합니다. 본문은 이 말씀을 좀더 깊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화평을 가능케 하느냐 --- 십자가로 담을 허셨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를 말씀함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인 그 귀중하고 구체적인 사랑에 감복함이 없이는 새사람으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 애리조나주(州)의 피닉스에 사는 한 청년이 실수로 그만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복역 중에 그는 이를 갈았습니다. '나를 체포한 형사놈들, 나가면 죽이고 말겠다.' 이윽고 감옥을 나왔습니다. 집으로 가보니 아내는 이미 도망을 갔고 어린 자식 둘만이 남아 울고 있습니다. 그는 그 상황에서 생각을 합니다. "나는 이제 사람을 죽이고 다시 감옥으로 가겠지만 이 아이들만은 믿음 안에서 깨끗하게 자라도록 하겠다." 아이 둘을 데리고 그는 교회로 갔습니다. 마침 교회에서는 톰슨 목사가 와서 부홍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참석한 그는 놀랍게도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이 말에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회개하고 여러 사람 앞에서 이렇게 간증했다고 합니다. "나는 오늘밤 사람을 죽이려고 권총을 품고 나온 사람입니다.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듣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제는 새롭게 살렵니다.
권총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의 간증에 모든 회중이 크게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사람처럼 얼마동안이나 권총을 가지고 다닐 작정입니까?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죽이렵니까? 이젠 옛사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환경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사랑 받지 못해서, 내가 가난해서, 내가 병들어서 라고 변명을 합니다. 세상이 달라져야 하고 환경이 달라져야 한다면서 또 한번 책임을 전가합니다마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환경이 몇 번씩 곤두박질해도 사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바로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형성되기 전에는 그 누구도 달라지는 법이 없습니다. 간혹 여러분 가운데 '내 아들이 입시에 낙방해서 저렇게 되었지 학교만 들어가면 사람이 될 텐데'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생각처럼 되어지지 않습니다. 이것만은 성경적 원리를 따릅니다. 경험으로 얻은 진리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환경 변화로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문제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자기희생과 그 담을 허신, 율법을 완성하신, 나 대신 십자가를 지신 그 엄청난 사랑, 이 수직적 사랑에 감복하는 그 순간부터 비로소 내가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날 때에야 이웃사람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새로워집니다.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게 됩니다. 이것은 영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를 다스릴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영성이 새로워집니다. 이로써 인격과 생활과 세계관에 새로운 변화가 옵니다. 새사람, 오직 십자가 안에서만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한 사람을 새롭게 하는 살아 있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에 인간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을 때에 죄와 사망의 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성령을 잃어버렸을 때에 사람은 누구나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로 화목케 하신 큰 역사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기적이 있기 바랍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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