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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자유에로의 길(갈라디아서 5장 13절~18절)

by 【고동엽】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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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자유에로의 길(갈라디아서 5장 13절~18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所欲)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비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미국 오클라호마대학의 한 연구팀이 열다섯 살난 침팬지 '바슈'에게 140가지의 사인 랭귀지(sign language : 指話法)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나서 스스로 생각하여 표현할 수 있도록 유도해 보았습니다. 물론 이렇게 가르침을 받는 동안에 바슈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잘먹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갖은 방법으로 바슈의 환심을 사가며 140가지의 단어를 가르치고, 이 단어들을 제 생각에 따라 연결하여 말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침팬지가 처음으로 나타낸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Let me go."였습니다. '나를 놓아달라' --- 자유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잘 먹이고 아무리 좋은 여건을 준다 해도, 갇힌 것은 갇힌 것입니다.

저렇듯 동물의 세계에서도 가장 귀한 것은 자유입니다. 외국을 여행하다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마는 작은 애완견들이 고급승용차에 태워져서 전용 미장원을 들락거립니다. 사람도 못먹는 최고급 음식을 먹고 지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식사 대접을 해도 들판을 마음대로 뛰놀 수 있는 우리네 시골의 개처럼 팔자가 좋은 개는 못됩니다. 마음대로 뛰노는 것,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것 --- 그 자유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합니까?

인간의 본질은 자유에 근거합니다. 자유함에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행복은 그가 누리는 자유의 한계에 국한됩니다. 인간의 능력 또한 그가 알고 뜻하는 자유의 내용에 제한됩니다. 인간은 그가 자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자유에 대한 자신의 철학만큼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법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자유를 기회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유함으로 기회를 얻는다 --- 그렇습니다. 자유는 기회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이 기회는 내면 세계에서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영적인 소욕(所浴) - 선과 의를 지향하는 거룩한 본능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 자유의 기회를 그 뜻을 발전시켜나갑니다. 또 하나는 육체의 소욕 --- 육체의 욕구에 이끌리어 땅으로 기울면서 죄의 매력에 이끌립니다. 유혹에 빠지고 방탕하게 되고 게으르게 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자유는 기회이지만 이렇듯 극과 극의 두 기회로 나누어집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란 자기가 누리는 자유만큼의 가치를 강요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유를 어떻게 향유하느냐. 어떤 방향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자신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가 변질되면 가장 수치스러운 존재가 된다' - 희랍의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입니다. 인간은 분명 동물보다 많은 자유를 가졌습니다. 또, 같은 인간 중에서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나 지식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남보다 더 많은 자유를 가진 바로 그 존재가 변질되면 남보다 더 추하고 더 형편없이 전락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높은 가치의 자유를 향유합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는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쟁취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새는 걸핏하면 투쟁이다 뭐다 합니다마는 분명히 아셔야합니다. 투쟁을 통해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없습니다. 투쟁은 자유케하는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더러는 투쟁으로써 정치적 자유는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투쟁하여 자유를 얻는 그 순간에 이미 도덕적 타락에 빠집니다. 폭력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인간성이 파괴되고 맙니다. 그리하여 끝내 자유하지 못하고 비참해지는 경우를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수없이 목격해왔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자유는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해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한을 푼다'라고 말합니다마는 한을 어떻게 풀자는 것입니까? 그것 또한 자유할 수 있는 길이 되지 못합니다.

자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 -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자고 싶은 대로 자고, 가지고 싶은 대로 가지고, 가고 싶은 대로 가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는 동물적인 자유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 것은 동물적인 자유입니다. 둘째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는 자유 - 인간적인 자유입니다. 늦잠 자는 것은 동물적인 자유이며 일찍 일어나는 것은 인간적인 자유입니다. 공부하기 싫어서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은 동물적인 자유이고 내일을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인간적인 자유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자유를 세 가지 차원에서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유는 제한적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유를 다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한을 받습니다. 옛 로마인들이 향락을 일삼을 때에는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고 나서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 토한 다음에 다시 먹곤 하였다고 합니다. 마음껏 먹고 싶지만 위장이 한정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먹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고 싶은 곳을 다 갈 수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살수도 없습니다. 자유는 제한적인 것이요, 또 제한을 받아야만 합니다. 물고기가 자유롭다고 하여 물 밖으로 나가서 살 수 있습니까? 물 밖으로 나가면 죽습니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가정이라는 제한된 울타리가 있습니다. 가정 밖으로 뛰쳐나가면 그것도 죽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이 제한, 이 자유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은 방종(放縱)입니다. 이는 형태를 달리한 노예생활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정치적 한계, 경제적 한계, 교육적 한계, 지식적 한계가 있습니다. 어찌할수없는 한계입니다. 또 도덕적 한계가 있습니다. 내 자유가 남의 자유를 구속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여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내 감정을 다 드러냄으로써 상대방의 기분을 어지럽혀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남의 감정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도덕적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오직 제한된 자유를 향유할 수 있습니다. 본래 자유에는 그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이는 스스로 버리는 자유입니다. 내게 주어진 권리, 내게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자유입니다 사랑을 위하여, 충성을 위하여, 의를 위하여, 스스로 자유를 포기합니다. 얼마 전 저는 강연 때문에 주일날 오후에 제주행 비행기를 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비행기를 탄 승객은 저만 말고 모두가 방금 예식장을 빠져 나온 신혼부부들이었습니다.

그런 형편이고보니 저는 어디쯤에 앉아야 될지, 시선을 어디로 두어야할지 몰라 퍽이나 거북했습니다. 모두들 행복해보여서 절로 미소가 나왔습니다. 쌍쌍이 끼리끼리 서로가 좋아서 못견딜 지경입니다. 그런가 했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놀랍게도 벌써 다투는 커플이 있습니다. 식을 올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러나 싶어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왜 곁눈질이냐?' '왜 다른 여자를 쳐다보느냐?'하고 티격태격입니다. 저사람들 벌써 어려운 고비에 들어섰구나 ---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이란 이렇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여 부부가 되었으면 그 순간부터 다른 여자 다른 남자는 보아서도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다른 남자를 꿈꾸고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꿈 이야기를 해보십시오. 아무리 금실좋은 부부라 해도 무사하기 힘듭니다.

사랑의 요구, 사랑의 속박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도 꿈을 꾸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곤욕이 또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 곤욕을 마다 않고 저마다 결혼 못해서 야단들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결코 부자유가 아닙니다. 스스로 자유를 반납해버렸기에 그렇습니다. 스스로 매이기를 바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속박 안에서 자유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말할 있습니다. 충성도 그렇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려고 군에 입대합니다. 입대하는 날부터 군기(軍紀)에 매입니다. 내 나라를 위하여 내 자유를 반납하고 펄펄뛰는 청년기의 귀중한 3년을 고스란히 바칩니다. 이것은 충성입니다. 그런 속박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하여 의를 위하여, 양심을 위하여,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우리의 자유를 스스로 속박합니다. 이것이 높은 차원의 자유입니다.

그런가하면 한 단계 더 높은 자유가 있습니다. 소망을 향한 자유, 소망 안의 자유 -미래지향적인 약속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불이 이렇게 환히 켜져 있습니다마는 잠시 후면 불이 꺼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앞이 보이지 않아 부자유해집니다. 아무리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나 밤에 자동차를 몰고 가도 앞이 멀리 보이지 않아 부자유해집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 내 모든 능력과 지혜가 거기에 머물고 맙니다. 이 점이 오늘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영(靈)이 저 먼 미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절망과 허무,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지성도 능력도 정치적 권세도 부(富)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대학병원에서 죽음의 시간을 카운트다운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에게 돈이 많으면 뭘하고 명예가 높으면 뭘 합니까? 그에게 자유가 있습니까? 적어도 죽음 뒤에 맞이할 내세의 문제를 해결한 다음이 아니면, 죽음의 장막을 넘어서는 미래지향적인 소망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자유하지 못합니다. 부자유하며, 근본적으로 사망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자유는 곧 미래입니다. 미래에 대한 보장과 약속이 없이는 자유가 없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저 미래적 생명을 바라보면서 소망의 사람이 될 때에 비로소 자유인이 됩니다. 또한 소망과 미래를 그 확실한 약속에 위탁할 수 있을 때에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운명을 소망에 위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즐겨 인용하는 구약의 말씀 중에 '자유의 노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여러 차례 이를 근거로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합니다. 그 내용은 출애굽기 21장 1절로부터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참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삼천 년 전에는 노예 제도가 있었습니다. 사람을 팔고 사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노예제도를 버려라, 노예를 해방시켜라 하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 문화권 속에서 온유하게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를 살 때에 그의 일생, 그의 생명을 다 사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의 생명을 사는 것이 아니고 그의 노동력을 사는 것이다' - 인격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6년 동안만 노예로 부리고 안식년이 되는 제7년에는 다 놓아주어라' --- 6년이 지나면 자유의 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7년이 되어 이제는 자유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나가 살 자신이 없거나 그대로 그 집에 살고자 할 때에는 주인에게 약속을 해야 합니다. 자유의 노예로 살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은 그를 문설주로 데려가 송곳으로 그의 귓바퀴를 뚫습니다. 귓바퀴를 뚫어 표시를 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자유의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그 집의 영원한 노예입니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어느 때든지 그의 의사에 따라 그 집에서 나갈 수 있습니다. 나갈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스스로 노예가 된 것입니다. 바로 자유의 노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통해 기독교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시한번 생각해보십시다. 6년 동안 노예생활을 한 것은 외부적 강요로해서입니다마는 자유의 노예가 된 다음부터는 내면적 결정으로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형식 적으로는 노예이지만 이제 그 내용과 인격에서는 완전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자유는 그 자유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유는 그 고귀한 값을 아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소중한 보화입니다. 8․15해방 후 우리는 자유를 똑바로 공부해야 했습니다. 자유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의 기억입니다 마는 해방되고 한 달 동안은 축제일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일도 하지 않고 먹고 마시면서 지냈습니다. 또 아무 것이나 때려부수고 불지르곤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마음 아픈 일은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때려부순 것입니다. 즐겁게 가지고 실험하던 기구들이 죄다 박살나고 말았습니다. 파괴가 자유입니까? 폭력이 자유입니까? - 자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후 45년 동안이나 자유를 배웠지만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한다고 하여 자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 참뜻을 알아야 합니다. 또 그것을 위하여 엄청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와 사망과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고자 십자가의 값을 지불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분은 엄청난 피 값을 지불하고 자유케 했습니다. 이 지불한 것으로부터 자유가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알 때에 비로소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저항과 항쟁에서는 분명히 자유에 강합니다.

그러나 건설하는 데에는 자유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무엇으로부터(from something) 풀려나는 자유가 있고 무엇에 예속되는(to something) 자유가 있습니다. 애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자유가 아닙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야 자유입니다. 마찬가지로 불의와 악한 세력과 독재와 싸우는 데는 명수인데, 건설하고 보호하고 창조하는 데는 자유인이 되지 못하더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약점이 거기에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이 없이는 방종에 빠집니다.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풀려나는 자유가 아니라, 세우고 협력하고 사랑하고 화해하는 자유 - 적극적인 자유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가장 강한 속박 안에서 가장 위대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13절)" - 사랑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하십니다.

증오할 때에는 이미 자유인이 아닙니다. 사랑할 때에만 자유인이 됩니다. 사랑할 자를 사랑하지 않고는 자유할 수 없습니다. 내 자유를 반납하고 십자가의 값으로 팔렸기에 내가 더는 내 몸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유의 종이 되어 비로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사랑의 법을 따릅시다.

그리고 그의 의무, 그의 봉사, 그의 자랑, 그의 기쁨, 그의 섬김을 본받아 참 자유를 맛보아야 하겠습니다.

구약 신학자로 유명한 브루거만은 인간을 '후 아이 엠(Who I am)으로 정의할 것이 아니라 후즈 아이 엠(Whose l am)으로 정의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으로 정의할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 누구를 위하여 사느냐 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삽니까? 이 문제에 내 생의 의미가 있고 내 자유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가장 위대한 자유인이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가장 충성된 노예이다. 세상에서 사랑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의 노예, 성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본문 16절에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또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영은 성령이며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 성령을 쫓아가는 사람만이 자유인이 될 수 있느니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8․15 광복의 그날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저에게는 아직도 생각합니다. 해가 몹시 따가운 날이었는데 목사님께서 저희집으로 급히 달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장로님이었던 저의 할아버지를 만나 해방의 소식을 전하고 함께 감격스러워하셨습니다. 손을 맞잡고 한 시간이나 울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서는 오늘 부른 찬송 '주 예수 이름 높이어'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일제가 부르지 못하게 하던 찬송입니다. 일본 천황이 왕인데 그 위에 무슨 왕이 또 있느냐 ---- '만유의 주, 만왕의 왕'은 말도 안된다 하여 금지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소중한 자유입니다. 이름도 성도 빼앗겼습니다. 제 일본식 성이 시기야마였습니다. 이렇듯 이름도 성도 빼앗기고 정신마저 빼앗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은혜를 주셔서 자유를 되찾게 하셨습니다. 광복을 주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광복의 의미를 되새겨보십시다.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5장 1절의 말씀입니다. 또 13절에서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 다시는 노예가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참 자유란 물질적인 보상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것도 물리적인 것도 아닙니다. 사랑과 믿음과 소망, 그리고 화평과 기쁨 속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승리의 능력이 있고 창조의 위력이 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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