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하나님 기뻐하시는 예배(로마서 12장 1절~2절)

by 【고동엽】 2023. 3. 24.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하나님 기뻐하시는 예배(로마서 12장 1절~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현대를 가리켜서 의미를 잃어버린 세대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절대빈곤에서 간신히 벗어난 형편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서 애를 쓸 때에는 그 생각뿐이었기에 오히려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나니까 더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더 복잡한 문제가 생깁니다. 마음이 흔들립니다. 절망으로 치닫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보람을 찾으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보람된 것이 없습니다.
흔히 자녀를 잘 양육하는 것보다 보람된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부모님들은 갖은 정성을 다하여 자녀들을 성인으로 키워놓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해서 업적을 남겨보겠다며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그 또한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에 와서 우리는 많은 기업인들이 스스로 쓸데없는 일을 했다고 낙심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학문하는 일, 교육하는 일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 없다고 하여 최선을 다하던 교육자들, 그 교수님, 선생님들도 교육자가 쓸만한 직업이 못된다고 낙심합니다. 그래서 실패한 사람보다 이른바 성공했다는 사람 중에 자살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근자에는 많은 교수님들이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이는 삶의 보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적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애초에 삶의 목적을 잘못 설정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목적은 절대로 구체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돈도 자녀도 지위도 명예도 절대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고백 가운데서 첫째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인생의 제일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기뻐하는 것이니라 - 이렇게 목적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이 뜻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추상적인 이야기로 들리겠습니다마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기뻐하는 것 아니고는 절대로 내 생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교역자인 까닭에 가끔 임종을 지켜볼 때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뉴욕에서 임종하는 분을 찾아가 위로의 말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임종하는 분을 만날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이 있고 세례도 받았지만 임종할 때에 보면 당사자들은 매우 초조해합니다. 불안해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지 못한 까닭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하고, 주님 앞에서야 합니다. 주님과 만날 준비가 완전하지 못할 때에 불안하고 초조해집니다. 세상에 나와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다 해보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다 부질없는 것입니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시각입니다. '주님을 어떻게 대할까' - 절박한 종말의 시각에 고민하는 것을 봅니다.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시각에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이 시각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마다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마침내 세상을 떠날 때에 완전한 만남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로마서 12장 1,2절입니다. 먼저 로마서의 구조를 살펴봅시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무엇을 믿느냐 하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또 12장부터 16장까지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루는 첫 부분으로서 총론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예배를 생활의 가장 중심부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예배를 원리적으로 생각합니다. 예배가 최우선이 되어야 하고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날에 행하는 예배를 중심으로 하여 일주일 동안의 모든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여행을 하다가도 주일날은 꼭 돌아와 예배를 드립니다. 부득이 돌아올 수 없으면 어디에서든지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예배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배는 드리되 그것이 생활의 첫째는 아니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골프 치러 가자 하면 그리로 가고 낚시하러 가자 하면 또 그리로 쫓아갑니다. 비라도 오는 날이라야 갈 데가 없어 교회에 나옵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보니 비가 오는 날이면 교인들이 적게 나옵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오늘 시험받는 사람 있겠다' '교회 못나오는 사람 있겠다'고 걱정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교회에서는 정반대입니다. 비가 오면 '오늘은 무척 많이 모이겠다'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갈 데가 없으니까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날씨가 좋으면 밖으로 빠져나가고 날씨가 궂으면 교회에 나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그의 생애 중에 퍼스트 프라이어리티(first priority)가 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사를 제하고 예배는 꼭 지켜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에 의해서만 살 수 있습니다. 가령 여러분 중의 누군가가 시험을 받아 넉 주일만 교회에 안나와 예배 없이 살았다고 합시다. 어느 순간에 벌써 하나님이 계시다 안계시다 하며 부부싸움이 터집니다. 사건들이 줄을 이어 발생합니다. 그리고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배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예배가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하는 신랑 신부의 주례사를 하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여 말합니다. "잘살아보려고, 사랑하려고 너무 애쓸 것 없습니다.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둘이 함께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주일날마다 꼭 나와서 함께 예배하라 - 이것만 지키면 사랑의 힘을 얻고 사랑의 지혜를 얻어서 잘살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가 중심입니다. 중심이어야 합니다. 이것만 바로 이루어지면, 그리하여 내 영혼이 소생하게 되고 성숙하게 되면, 그에 따라 모든 문제가 절로 풀립니다. 예배가 '최우선'임을 명심 또 명심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영적 예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헬라어로는 '로기켄 라트레이안'이라고 합니다. '로기켄'은 '합리적(reason-able)' 또는 '영적(spiritual)'이라는 뜻입니다. 외면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서부터 영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영적 예배'인 것이며, 예수 믿는 사람으로 당연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우선해야 하기 때문에 '합리적 예배'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배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교육도 합니다마는 예배 없는 봉사, 예배 없는 교육은 무의미합니다. 예배 없는 봉사는 위선을 초래합니다. 모든 것의 핵심은 예배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정(帝政) 러시아가 망할 당시에 있었던 웃지 못할 이야기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성직자들이 입는 옷의 단을 무슨 색깔로 할 것이냐 - 빨간색으로 해야 한다느니 황금색으로 해야 한다느니 하는 문제로 열흘 동안이나 주야로 격론을 벌였는데 종내 해결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볼셰비키는 여섯 사람이 모여서 당을 조직하고 마침내 '러시아혁명'을 일으킵니다.
이로써 러시아제국은 망하고 교회도 다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옷단이 붉으면 어떻고 황금색이면 어떻습니까? 쓸데없는 것 때문에 예배가 혼돈해집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영적인 것이지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합리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보면 예배를 '아바드'라고 합니다. 섬기고 봉사한다는 뜻입니다. 또 '사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굴복하며 숭배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보아도 '포네스쿠네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맞춘다' '절한다'는 말인데, 발에 입맞추며 절한다는 뜻입니다. 아주 엎드리어 경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라트레이안'도 '섬긴다' '봉사한다(service)'는 뜻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이 말들을 종합해보면 예배가 과연 무엇인가를 족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그 발에 입을 맞추며 경배하고 그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귀담아 듣고, 그리고 그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주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그대로 나아가 순종합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을 다짐합니다. 다시 한번 새롭게 헌신하며 감사하며 봉사합니다.
구약에서 예배란 곧 제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양을 바치는 희생입니다. 신약에서는 구속하신 은혜를 찬양하는 축제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면 어떻게 섬기겠습니까? 말씀을 들으며 섬기고, 찬양하며 섬기고, 기뻐하며 섬기고, 말씀을 순종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 이것이 예배입니다. 신학자 몰트만은 예배를 '메시야적 잔치'라고 정의합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찬양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만 하늘나라에 가서는 오직 찬양으로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고, 그 찬양으로 모든 어두운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어떤 분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부부간에 재미있게 살아야 하겠는데, 부인이 잔소리가 많아 바가지를 긁기 일쑤입니다. 어느 주일날 교회에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부인이 또 잔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자꾸 시비를 걸어옵니다. 견디다못한 남편은, 대꾸를 했다가는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답니다.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더니 3절 부를 때에 부인도 따라 부르더랍니다. 2절까지가 문제입니다. 잔소리를 들어가면서 끝까지 찬송을 부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찬양으로 모든 절망, 모든 어두움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예배입니다. 예배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첫절은 '그러므로'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예배를 드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로 연결된 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의 뜻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핍니다.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시간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으로 새롭게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새롭다'라는 의미의 단어가 헬라어에는 둘이 있습니다. '네오스'-시차적인 새로움이요, '카이노스'-질적인 새로움입니다. 질적인 새로움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 얽힌 일화입니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이 예상 밖으로 길어져 희생자가 많아지자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동족끼리 싸우느라 하루에도 수백 명씩 젊은 청년들이 죽어갑니다. 마음이 괴로운 그는 집무실에서 하나님 앞에 두세 시간씩 기도를 했습니다. 엎드려 간절히 기도합니다. 대통령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본 장관들도 문밖에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문을 열고 나올 때에 장관들이 송구한 마음으로 그에게 아룁니다. "각하, 우리도 문밖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대통령은 깜짝 놀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달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나는 지금 내가 하나님 편에 섰는가가 걱정일세.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그것이 걱정이란 말일세.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중일세" --- 참으로 귀한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예배하기 전에 가졌던 마음, 즉 소원이 많습니다. 건강도 물질도 명예도 지위도. 그러나 그것은 예배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소원성취 하겠다는 마음은 예배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비록 세상에 나와 일생을 통해서 고집을 부려오던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나의 의견과 마음과 뜻을 모두 포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기뻐하시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할 것입니다.
'예배는 곧 제사'라고 본문에서는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입장에서 보면 예배는 제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 바치는 제사행위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미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을 만나실 때에는 제사를 통하여 만나십니다. 죄인 또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제사를 통하여 나아갑니다. 제사란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의미합니다. 자기 희생에 대한 구체적인 계시입니다. 그만큼의 희생을 지불하면서 비로소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제사에는 몇 가지의 기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제물이 온전해야 합니다. 흠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부분을 드려서도 안됩니다. 전체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생애의 일부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생을 모두 드려야 합니다. 전체를 드리는 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가장 건강한 제물이어야 하고 가장 최상의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물의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둘째, 제사는 물량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양(量)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질(質)이 문제됩니다. 부유한 사람은 소를 드리고, 좀 못한 사람은 양을 드리고, 좀 못한 사람은 양의 새끼를 드리고, 그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드립니다. 자기의 수준에 맞게 드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정성입니다. 티없는 정성입니다. 제물은 무엇보다 정성된 것이어야 됩니다. 정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의복에서부터 마음가짐까지 다 정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세가 분명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 헌금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미리 새 돈을 준비하여 정성껏 드리는 것과 헌금 시작할 때에 가서야 앞뒤 주머니를 뒤져 구깃구깃한 것을 꺼내 던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정성을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가 그 중심에서부터 반영되어야 합니다.
제사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의미는 산 제물을 죽여서 드리는 데에 있습니다. 이미 죽은 제물을 드리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라도 이미 죽은 것은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병든 것도 안됩니다.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 죽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그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바쳐진 제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생명을 드리는 것 - 이것이 제사의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깊이 생각해봅시다. 제물은 깨끗이 태워서 드립니다. 나 자신을, 내 생명을 흔적 없이 다 태워버리고 맙니다. 그런 연후에 새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제사의 기본적이요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구약으로부터 모델을 유추하여보면 몇 가지 본을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친 행위입니다. 아마도 최상의 예배일 것입니다. 자기 생명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는 아들, 백 살에 얻은 이 아들을 바치고자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정성만을 받으시고 양으로 대신하게 하십니다. 그 의미가 그렇게 심오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친 이 제물이야말로 높고 고상한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참회의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회개의 제사가 으뜸가는 제사입니다. 성전에 나아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울부짖었던 세리와 같이, 마음으로부터의 참회개를 바칠 때에 제물로 받으십니다.
셋째는 마리아의 희생입니다. 옥합의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을 때에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내 장례를 준비하였느니라' 하고 칭찬하십니다. 비록 작은 정성입니다마는 큰 의미로 받아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희생이 또한 예배가 됩니다. 살아 있는 제물을 죽여서 바치는 것입니다. 죽은 제물로, 바쳐진 자로 살아갑니다. 내 정, 내 욕심, 네 명예, 내 더러운 것들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고, 나는 이제 죽은 자로 살아갑니다. 의미상으로는 완전히 죽은 자입니다. 살아 있고, 죽였고, 그리고 드려진, 그러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헌신이라고 합니다.
몸을 제물로 바치라 - '몸'은 구체적인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 전부를 가리킵니다. 물질적이요 세상적인 모든 생활을 가리킵니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할 것 없이 그 운명 전체를 다 모아서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늘 감사하며 늘 찬송하며 능 새롭게 헌신하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나의 죽음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나의 생명을 재확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 죽어지는 시간이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은혜 안에서 생명을 다시 찾는 시간입니다. 생명의 약속을 재확인받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생활을 통하여 예배하는 자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백령도에 갔다가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해병대 사령부 앞에서 조그마한 목욕탕을 경영합니다. 본래 백령도 부대에서 복무하던 사람인데 제대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평생을 삽니다. 그 고독한 섬 백령도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대위 출신의 그 집사님에게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습니다. 그분 생각에 부대도 자주 이동하고 사령관, 군목(軍牧)도 자주 바뀌어 군인교회를 제대로 운영할 사람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스스로 군인교회를 위하여 만년 집사로 봉사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답니다. 그리고는 군인들에게 목욕탕을 제공하면서 내외가 함께 평생을 참으로 귀하게 살아온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마음을 먹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대답은 간단합니다. "목사님, 대단할 것 없는 일입니다. 저는 월남전에서 총알을 맞고 죽었던 사람입니다. 시체를 치우는데 꿈틀거려서 갖다 살린 것이 이렇게 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 차례의 수술을 받고 되찾게 된 생명인데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저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에 이렇게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름지기 '나는 이미 죽었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옛날의 내가 아닙니다. 옛날의 목적도 옛날의 욕망도 이제는 없습니다. 이것이 몸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유명한 일화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영국에서 각종 병으로 시달리는 아프리카를 위하여 의료선교기금을 모금할 때에 있은 일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모금을 하려고 헌금대를 돌렸습니다. 우리는 헌금대가 주머니로 되어 있지마는 서양은 세숫대야처럼 둥글넓적한 은접시입니다. 큰 은접시가 돌아갈 때마다 사람들은 얼마씩 돈을 올려놓습니다. 그런데 한 꼬마어린이가 제 앞에 온 접시 위에 널름 올라앉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왜 거기에 올라앉았니?"하고 누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것 보십시오. 꼬마는 기막힌 대답을 합니다. "저는 돈이 없습니다. 제 몸을 바치겠습니다." 바로 이 아이가 커서 뒷날 위대한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참으로 일생을 고스란히 바쳤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이런 사람들만이 제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중심, 그 목적, 그 뜻은 '이미 제물로 바쳐졌다'는 데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가 있습니까? 해결할 수 없는 번민과 고뇌가 있습니까? 그 원인은 오직 하나, 바쳐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전체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제물이 되어 예배하여야 합니다. 그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완전히 새로워집니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