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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다리심(이사야 5장 1절~7절)

by 【고동엽】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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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다리심(이사야 5장 1절~7절)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極上品)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쩜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한 여학생이 대학 진학을 앞에 놓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전공해서 공부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던 끝에 평소 존경해오던 교수 한 분을 찾아가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코스를 택해서 공부했으면 좋겠습니까?" 교수는 "앞으로 백년 동안을 두고 연구할 수 있는 과목을 택하라. 일생을 통해서 후회하거나 실망하는 일이 없을 과목을 선택하라"하고 참으로 일생을 통해서 실망하지 아니할, 평생을 바쳐 탐구해도 아깝지 않을, 그런 과목, 그런 일을 선택해서 출발하라고 일러주더랍니다. 그런 과목이 있을까요?

여러분, 실망을 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기 직업에 대해 한번 선택한 직업에 대해, 과거든 현재든 실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이 직업을 택할 것이다" -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선택이어야 합니다. 이런 선택을 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결혼도 그렇습니다. 부부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전혀 후회가 없는 사랑으로 맺어져야 합니다. "이 사람과 결혼하기를 정말 잘했다. 나에게는 오직 이 사람밖에 없다" - 현재의 사랑을 고백하고 앞으로의 상대방의 존재를 확인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행복합니다. 과거를 두고 실망한 적이 있습니까? 또 다가올 미래를 지금의 상태대로 밀고 나가도 되겠습니까? 궤도수정 없이 남은 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실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실한 사람은 남에게 실망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실망할 때도 많지만, 잊고 있는 것은 바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실망을 안기면서 살아갑니다.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실망을 안길 때에 저는 가장 마음이 괴롭습니다. "목사님, 시간 좀 내주십시오" "저희 집을 한번 방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때때로 교우들이 제게 이런 부탁을 해옵니다. 그러나 시간을 낼 수 없으면 부득이하게 사양을 하고 맙니다.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가득합니다. 섭섭해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찌하겠습니까? 이렇듯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면서 살아갑니다.

저에게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언젠가 교우 한 분이 제게 아무개 집사님을 아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아 모르겠다는 대답으로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교우가 바로 그 아무개 집사님을 만나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교회에 열심히 봉사한다고 하더니 목사님께선 당신 이름 석 자도 모르더라" --- 이 말을 전해들은 그 집사님은 실망한 나머지 지금까지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고자질한 사람도 나쁘지만 제 기억력이 그 정도밖에 안되니 어떻게 합니까?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실망하고 실망시키고, 절망하고 절망시킵니다. 내가 허무에 빠지는가 하면 다른 사람을 실의에 빠뜨립니다. 배신을 당하는가 하면 때로 나 쪽에서 배신하기도 합니다. 빼앗기고 빼앗으며 살아가는 것이 세상살이인지, 그래서 고통이 따르는 것인지 정녕 모를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한폭의 아름다운 노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포도원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실망으로 끝을 맺고 맙니다. 5장 1절의 말씀을 봅시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 포도원을 예찬합니다. 기름진 산에 땅을 파서 돌을 골라내고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울타리를 만들고 망대도 세웠습니다. 포도주를 만들기 위하여 술틀까지 파고 질 좋은 포도가 열리기만 기다립니다.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포도원의 그 그윽한 향기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이렇듯 아름답게 노래했습니다. 이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을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막상 가을이 되어 포도가 익은 것을 보니 들포도입니다. 농부는 실망합니다. 기다림의 꿈이 깨어지고 맙니다. 농부의 기다림은 수고와 정성과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포도가 맺혔도다 - 실망으로 끝났습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이스라엘에는 포도원이 많아 어디서나 누구나 쉽게 겪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상징적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사에 대한 당신의 뜻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농부요, 포도나무와 포도원은 이스라엘입니다. 좀더 확대해서 말씀드리자면 곧 인류의 역사입니다. 역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방향이 있습니다. 이 포도원은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존재하고,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대로 운행됩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에서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기다리시는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풍년도 주시고 흉년도 주시고, 건설도 주시고 파괴도 주십니다.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번영을 주시는가 하면 지진을 일으키시기도 합니다. 건강을 주시는가 하면 질병을 주시기도 합니다. 이 또한 기대하시는 바가 있어서입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되어지기를 바라시면서 역사를 운행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농부들은 누구나 포도원을 사랑합니다. 농장을 사랑합니다. 여기에 온갖 정성을 다 쏟고 가을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이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입니다.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행동적인 것입니다. 역사적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팔짱이나 끼고 높은 보좌에 가만히 앉아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친히 역사를 운행하십니다. 독생자를 보내시어 구속(救贖)하셨습니다.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종들을 통하여 권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또한 구체적인 사건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여기에는 수고와 정성과 엄청난 희생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아픔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치르시는 엄청난 값이 있습니다. 언젠가 저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사서 읽어본 책이 있습니다. 「Oppressed God」- 하나님께서 고통을 느끼신다고 하는 제목의 책입니다. 행동하시고 역사하시고 희생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말씀 중에는 '기다림'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인 '카와'가 세번이나 나옵니다. 2절의 '바랐더니', 4절의 '기다렸거늘', 7절의 '바라셨더니'라는 말씀이 각각 번역은 다르게 되어 있지만 본디 한 단어입니다. 이 '기다림'의 개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합리적인 기다림입니다.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또한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었으므로 극상품의 포도가 맺히기를 바랍니다. 좋은 종자를 심었으니 좋은 열매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시간적인 기다림입니다. 수고에 합당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성을 들였으므로 이제 기쁨을 기다립니다. 땀을 흘렸기에 추수하는 영광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부분을 본문 중에서 봅시다.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4절)" - 포도원을 앞에 놓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불평이 많고 변명도 많습니다. 가난 때문이요, 질병 때문이요, 억울하기 때문이요, 분하기 때문이요 - 때문이라는 말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은혜를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다 주셨습니다. 내가 잘못된 길로 갈 때에는 그 길을 막아주셨습니다. 내가 나쁜 일을 하려고 하면 나로 하여금 병들게 하셨고 실패하게끔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취하십니다.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 그러므로 이제는 초조하게 가을이 오기를, 열매 맺기를 학수고대하십니다.

또한 뜻이 있는 기다림입니다. 여기에는 강력한 하나님의 의지가 있습니다. 반드시 이루고자 하십니다. 단순히 포도나무를 심어 놓고 포도 맺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좋은 포도를 따기 위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세상에 내시고 오늘까지 이 땅에 두실 때에는 뜻이 먼저 있었습니다. 경륜과, 완전하고 뚜렷한 절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을 가꾸셨습니다.

다 치워버리고 다시 심는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기대하시는 포도를 따내시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양보하시지 않습니다. 좋은 포도가 맺도록 역사하시고, 반드시 좋은 포도를 추수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든 이루십니다. 반드시 영광을 받으십니다. 역사를 실패작으로 만드시지 않습니다. 만백성을 통하여 드높은 영광을 받으시고, 그 백성을 훌륭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심고 가꾸어 거두게 된 포도는 극상품의 포도가 아니라 들포도였습니다. 알이 굵고 과즙이 달고 많으며 보기에도 좋아야 참포도입니다. 들포도는 작고 딱딱하며 시어서 먹을 수도 없는 저질 포도입니다. 결과는 그런 들포도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양적인 부족함에서 오는 실망이 아니라 질적인 변화에서 오는 실망입니다. 많이 거두지 못했다고 하여 실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거두고 있는 것이 쓸모없는 것이어서입니다. 변질되었습니다. 주인은 이때문에 실망합니다. 주인이 심은 종자는 상품이었는데 어째서 거두게 된 것은 하품이냐 --- 이것이 문제입니다.

실례로 6․25말엽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참으로 아리따운 처녀가 있었습니다. 마침 재산이나 지위나 명예가 남부러울 게 없는 넉넉한 가정의 아들과 연애를 하게 되어 결혼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아버지가 그 집안의 4대 독자요 신랑이 5대 독자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손(孫)이 귀한 집안의 며느리이니 더욱 소중하기만 합니다. 아들이건 딸이건 많이 낳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얼마 후에 이 며느리가 임신을 했습니다. 배가 불러오기 시작합니다. 할아버지 될 분은 말 할 수 없이 기쁩니다. 온 가문이 모두 좋아합니다. 이제 달이 차서 출산을 위해 병원에 입원을 합니다. 병원은 온통 축제 분위기입니다. 미리 간호원들에게 사례를 하고 특실을 잡아 꽃으로 가득 채웁니다. 공주의 영광이 부럽지 않게 출산을 합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입니까? 태어난 아이가 검둥이입니다. 여기에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있습니까?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기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내 속에 어찌 이런 열매가 있었습니까? 이 악이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이것은 물량의 문제가 아닙니다. 질의 문제입니다. 종자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마 13 : 27)" -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심어놓은 것은 극상품 포도나무인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습니까? 포도나무가 둔갑을 한 것입니까? 변명이 없습니다. 밭이 좋고 나쁘고, 비가 오고 안 오고, 거름이 좋고 나쁘고 가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는 때로 환경을 탓합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병들었기 때문에, 억울하기 때문에 - 이러쿵저러쿵하면서 변명을 합니다. 농사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많이 거두고 적게 거두는 것이 여건과 정비례합니다. 하지만 종자 문제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가꾸는 방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부부싸움을 하면서 "나는 본래 착한 사람인데 당신하고 결혼한 다음부터 나빠졌다"하며 대들곤 합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좋은 사람은 누구하고 살아도 좋습니다. 또 못된 사람은 어디에서나 못되게 굽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일년에 몇 번씩 직장을 옮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느 직장에 가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하늘 아래 어느 곳에 가도 그짝입니다. 근본적으로 종자가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들어 있고, 성령의 생명과 말씀과 진리가 들어 있으면 어디에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는 죽이는 자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의 얼굴이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쓸데없는 변명을 너무도 많이 합니다. 아직도 더 좋은 여건이 필요합니까? 시간이 필요합니까? 그 많은 은혜를 받으면서 어찌하여 열매는 들포도냐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본문의 주제는 공평과 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평과 의를 바라셨는데 어찌하여 불공평이요, 불의요, 탄식이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 기대하시는 바 그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탄식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너를 건져내랴(19절, 24절)" - 내 안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악한 마음 또한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누가 주도하느냐가 늘 문제인데, 바로 악이 나를 주도한다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사도 바울은 스스로 자세히 분석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저는 가끔 대학생 또래의 젊은 사람들을 상담하면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나는 내가 싫어요" "거울도 보기 싫어요" "생각하기조차 싫어요" - 이렇게들 말합니다. 생각하는 것마다 나쁜 것이요 부지런해야 될 줄 알면서도 게으르고, 누가 나를 조금만 건드리면 죽이고 싶고 욕설이 먼저 나갑니다. 반항과 증오로 가득차 있는 내가 싫다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나는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싫고 밉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곧잘 자살심리로 통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떻게 보십니까?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만족합니까? 이 상태로 깊이 나아간다 해도 괜찮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겠지"하고 그냥 놔둡니다. 그러나 들포도는 시간이 지나도 좋은 포도가 되지 않습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변하겠지" "나이가 들면 나아질 거야" -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주책만 늘어가는 사람도 있습디다.

뿌리가, 그 종자가 잘못되었는데 환경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환경과 과정은 탓할 것이 못됩니다. 들포도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왜 들포도이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 시간의 기다림만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사랑을 받지 못해서 들포도가 되었습니까?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러한 변명일랑 완전히 종식하십시다. 그리고 원점으로 돌아가서 회개부터 하십시다. 개선이 아니요 개혁이 아니요,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영적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더러운 나 자신을 십자가 밑에 완전히 묻어버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꿈을 꾸어도 예수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마음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진실한 사람은 남이 보지 않는 데서 진실을 생각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의만을 생각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평등과 공평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자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공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평등을 이루실 것이요, 진리를 이루실 것이요, 하나님의 의(義)를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기뻐하며, 그 공의를 기뻐하며, 그 공평함을 기뻐할 줄 아는 존재라야 새로운 가을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성령이 계시고, 말씀과 능력이 나를 지배하게 될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 요한복음 15장 2절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한송이라도 좋으니 제대로 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최상의 포도가 열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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