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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아멘의 신앙(고린도후서 1장 15절~22절)

by 【고동엽】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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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의 신앙(고린도후서 1장 15절~22절)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印)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사람은 누구나 입신해서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바라는 바대로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자신의 소망대로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인이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요? 커밍 워크(Cumming Walk)라고 하는 교수는 성공의 요인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들고 있습니다.
첫째, 지능(知能)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큐(IQ) 즉 지능지수(知能指數)가 따라가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현대가 기술시대이기에 생각이 이에 걸맞게 돌아가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결론인 것 같습니다. 둘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능과 지식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두뇌를 가졌다 해도 그 두뇌에다 많은 지식을 입력시켜야 써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지 않은 머리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180이니 190이니 하면서 제 아무리 아이큐가 높다고 떠들어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멍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을 하려면 필요한 많은 지식이 두뇌에 입력되어 있어야 합니다. 알아야 힘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테크닉이라 할까요. 능력이자 실력입니다. 제 아무리 지식이 많다 하더라도 그 지식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실천 능력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런 능력을 몸에 익히고 실천에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 태도(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attitude가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 요인을 들어 설명한 다음, 워크 교수는 그 네 가지 요인 가운데서 성공적인 삶의 요인으로 적어도 93퍼센트 이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네 번째 요인 곧 '태도(자세)'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지식이 있고 기술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삶의 자세(姿勢)가 잘못되어 있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세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공부할 때에는 공부하는 자세가 좋아야 되고, 일을 할 때에는 일하는 자세가 좋아야 됩니다. 무슨 일을 다루든지 성실하게 임하는 바른 자세가 기본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그러구러 한 30년 내내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다 보니 이제는 학생들의 공부하는 모습만 보고도 그들의 성적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굳이 학기말 시험 같은 것을 볼 것도 없이 평소의 공부하는 자세만 보고 점수를 매겨도 되겠어요. 시험을 보나마나 평소에 자세가 흐트러진 학생은 으레 성적이 좋지 않습니다. 강의실은 이처럼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실감하기 좋은 현장이기도 합니다. 공부하는 자세가 빗나가고보면 어떤 의미에서 그 일생이 다 빗나가버리는 것을 수없이 목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만학도(晩學徒)로서 어렵게 미국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두 번째 유학시절, 사랑하는 친구가 보낸 위로편지를 받았습니다. 아주 짓궂은 친구였습니다.
특별한 내용이랄 것도 없는 짤막한 편지였는데 마지막 구절이 참으로 알쏭달쏭했습니다. 말인즉 '공부는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네'였습니다. 한참이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입디다. 오늘은 분위기가 나빠서 그만두고, 오늘은 골치가 아파서 그만두고, 오늘은 날씨가 어떠하니 그만두고, 또 오늘은 나쁜 소식을 들었다고 그만두면 언제 공부합니까? 중요한 것은 결국 공부가 안되는 날이라도 책상머리에 진득하니 앉아 있으라는 말입니다. 기분대로 벌떡벌떡 일어나서는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것이다 - 참고 견뎌내야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공부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인생도 그렇습니다. 기분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견뎌내려는 바른 자세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워크 교수는 다시 '바른 자세'를 이렇게 말합니다. '언헤지테이팅 어퍼메이션(unhesitating affirmation)' - 주저하지 않는 긍정적인 자세요, '조이풀 어센트(joyful assent)' - 기쁜 마음으로 찬성하는 태도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의 경우를 한번 예로 들어봅시다. 우리는 해방 이후 근 40년 동안이나 민주주의를 배워왔습니다. 민주주의를 토착화시켜야 한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마는, 아직도 엎치락뒤치락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원인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어떠한 모임에서 하나의 안건을 표결에 부쳤다고 합시다. 4대 6으로 결정이 되었든지, 9대 1로 결정이 되었든지 이미 결정은 난 것입니다. 설사 내가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더라도 일단 결정이 난 이상은 의결된 사항을 군말 없이 지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반대 입장에 있던 사람은 결정이 된 다음에도 끝까지 반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거봐라. 그래서 내가 반대를 하지 않았더냐'하고 비아냥거립니다. 나쁜 자세입니다. 일이란 언제든지 잘될 수 있는 만큼 잘못될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개인의 뜻이 어떠하였든 결정된 것이 내 뜻이요, 이제부터는 그 일이 잘 수진될 수 있도록 최선의 협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joyful assent' - 기쁜 찬동을 보내야 합니다. 개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혼도 그렇습니다. 할까말까 망설이다가도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이제 운명은 결정된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남편이요 내 아내입니다. 그러나 만일 어디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마나한 결혼이 되어버립니다. 만사가 이 이치대로 입니다.
자세는 항상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더구나 믿는 자로서 신앙고백 없이 우유부단(優柔不斷)하다면 이는 하나님의 계시의 확실성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앞에 신앙고백을 한 이상 전적으로 그분께 위탁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엉거주춤한 상태로 서성거리고 있습니까? 늘 주변인으로 살아갑니까? 참으로 비참한 생활입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생산지향적인 태도(productive orientation)를 가진 사람만이 만사에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곧 수용지향적인 인간을 뜻하는 것입니다. 공부도 따지고 보면 수용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연구해놓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을 배우고 익혀나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수용적 자세가 없는 사람은 공부를 잘할 수 없습니다. 해봐야 소득이 없습니다. 만사에 부정적인 사람, 어떤 자리에서든지 불평이 가득한 사람, 늘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사람 --- 아무런 성공도 기대할 것이 없는 저항지향적인 사람입니다.
현대인의 불행은 헌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다고 합니다.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전심전력을 기울이지 않아요. 심리학자들은 교만과 이기심 때문에 그렇다고 말합니다. 내게 어떠한 이득이 돌아올까? - 자기중심적인 이득에 대해서만 저울질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내가 먼저요, 내게 돌아오는 인기 내게 돌아오는 이득, 네게 돌아오는 명예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일은 끝내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성서학적으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앙적으로나 사명적으로나 가장 약할 때에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마음이 약하여 담대히 나아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개인 전도를 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자비량(自費糧)하고 스스로 천막치는 업을 해가면서 겨우 전도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때입니다. 이렇게 용기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교회를 세워서 그런지 고린도 교회에는 간단없이 문제가 일어나고 분쟁이 많았습니다. 그 점이 또한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사도의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바울의 사도권(使徒權)에 정면 도전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부동반해서 다니는데 바울은 혼자 다니니 역시 시원치 않은 사람이다 하는 등 별의별 비난을 다 합니다. 게다가 분쟁하는 교회를 수습하기 위하여 방문도 하게 됩니다. 때로 가려고 했다가 조금 지연하는 경우도 있고 한 지방을 갔다가 다른 곳으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이랬더니 또 비난과 오해가 생깁니다. 먼데서만 큰소리쳤지 가까이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편지 쓸 때와는 딴판이다, 비난의 말도 쏟아져 나옵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보냄을 받아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을 놓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 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아니오' 하게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결정은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서 한 것이지 사람의 입장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예' 할 때에 사람에 대하여서는 '아니오'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성실성과 강직함을 거듭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기 모습을 변명합니다. 여러분, 성실은 'simplicity' 곧 단순성과 통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실할 때에 단순해지고 마음이 깨끗합니다. 이것은 또한 고집성(固執性)과도 통합니다. 옹고집쟁이는 다른 사람이 볼 때에 바보스러운 사람이요, 단순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열심으로 믿는 사람을 보고는 저사람 돌았나? 저렇게 야단스레 믿어야 되나? --- 비난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사람으로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생명적인 것을 취할 때에 사망적인 것을 버리고 영원한 진리에 예스(Yes)하는 동안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대하여 노우(No)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때에 사람의 권위에 대하여는 거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의를 긍정하고 불의를 부정하며 하나님의 선(善)을 따라가느라 악(惡)한 일은 멀리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오직 믿음으로'라고 하는 참된 신앙적 진리를 보수(保守)하기 위하여 로마교황청을 상대로 포고문을 냈습니다. 그는 그 일로 재판을 받고 바르트부르그(Wartburg)에 위폐됩니다. 감금된 것이지요.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중요한 일을 해냈습니다. 그때 그가 기거했던 방의 벽에는 지금도 그때의 잉크자국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 잉크자국은 중요한 것을 암시해줍니다. 그는 너무도 많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 교황과 타협하면 쉽게 풀려날 것은 물론 좋은 자리를 얻어 일생을 편히 지낼 수도 있습니다. 유별나게 살다보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자꾸만 유혹의 손길이 다가옵니다. 나만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있는가, 지지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 유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움트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마침내 사단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벽을 향해 잉크병을 던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예' 하기 위하여 사단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친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저 유명한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지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이 시험을 당하십니다. 사단이 와서 천하만국을 보이며 '내게 한번만 절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씀을 듣고 만류를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물러가라"하고 호통치십니다. 강한 거절이 있고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아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지만 헬라어에서도 그대로 쓰입니다. 쉽게 풀어봅시다. 성경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말씀이 많습니다. 이 말씀을 헬라말로 '아멘 아멘 레고 소이'가 됩니다. 아멘 ---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자세요, 진실한 응답이 아멘입니다.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저는 언젠가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돌아가면서 한 시간 동안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 한 대목이 끝날 때마다 회중이 다함께 '아멘'합니다. 말씀을 전적으로 수락하며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해봅시다.
어느 목사님이 중국 북경에 가서 교인들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가정예배 처소였는데, 그곳에서는 예배를 드릴 때, 사람은 절대로 설교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일어서서 말하면 설교요, 앉아서 말하면 좌담이 되어 외부에서 온 사람도 앉아서 말하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좌담식으로 앉아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말씀 더하라는 회중의 권유에 따라 두 시간이나 설교를 했답니다. 이야기가 끝나 경청하던 청년 하나가 벌떡 일어나 소리칩니다. "오늘의 교양, 전적으로 접수합니다." 공산당 교양할 때에 쓰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전적으로 접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加減)을 두지 맙시다. 홍해를 건넜다고 하면 건넌 줄로 알아야 합니다. 장님이 눈을 떴다고 하거든 뜬 줄로 아십시오.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하면 그대로 믿으십시오. 거기에 인간의 메스(mes)를 가하지 마세요. 쓸데없는 이성적 비판을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이든지 주시는대로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에 대한 수용이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전적인 수용입니다.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역사적인 일 --- 많은 백성을 구원하시는 경륜과 큰 섭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내가 있습니다. 때로 병들기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께로서 오는 지혜요 능력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바로 아멘입니다. 믿음이요, 순종이요, 전적인 위탁입니다. 위탁 뒤에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모든 것에 대한 감사요, 모든 것에 대한 긍정적 자세입니다. 수용하는 자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별명을 아십니까? 요한계시록 3장 14절에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아멘으로 시작하여 아멘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멘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겟세마네동산에서 십자가를 받아들이십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아멘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은 아멘 입니다. 또 모세를 보십시다. 아브라함을 보십시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나 고향을 떠나라 하실 때에 그는 묵묵히 떠납니다. 1백 세에 얻은 소중한 아들을 바치라 하실 때에 바칩니다. 군소리가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 백성을 구원하라 하실 때에 모세는 애굽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 백성을 인도하여 넘실거리는 홍해를 건너갑니다.
'건너가라'는 그 한마디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기에 마침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지 않고 '홍해 도강작전 위원회'라도 조직하여 사전 작전을 꾀했다면 아마 못 건너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아멘의 신앙입니다.
순종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1백 퍼센트 순종하지 못합니다.
'예'하는 말속에 '아니오'하는 여운이 숨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석연치 못한 생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내 주여 뜻대로'라는 찬송가의 3절은 부르지 않는다고 합디다. 그 이유가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의 그 '죽든지'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늘 불안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total acceptance, total discipline, total commitment - 이것이 아멘의 신앙입니다. 전적으로 수락하고 전적으로 순종하며 전적으로 위탁해버립니다. 억지로 순종해서는 안됩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십시다. 베드로와 요한이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 물고기를 잡으려 하나 한마리도 잡지 못한 채 그물을 정리하고 피곤한 몸을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하십니다. 예수님은 목수요 베드로와 요한은 어부입니다. 목수의 말을 곧이 듣고 어부가 그물을 내릴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밤새 한마리도 안잡힌 물고기가 지금에 와서 잡힐 리가 있느냐고 하면서 그물을 내립니다. 못잡을 것이 분명하지만 예수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물을 내려보겠다는 것입니다. 일단 순종을 합니다.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가득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끌어올리다 말고 예수님께로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 그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깊은 데에 가서 그물을 던져라' 하셨을 때, '이제는 되었다, 만선이다' 하는 생각을 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기쁜 마음으로 그물을 내렸어야 합니다. 1백 퍼센트 순종했어야 하는데, 그 순종 속에 '아니오' 하는 부정이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불신앙, 참으로 무서운 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도 주님의 뜻에 억지 순종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마지못해 교회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니 아까운 것이 많고 안 따르자니 꺼림칙합니다. 이렇게 주춤거리면서 세월이 다 흘렀습니다. 깊이 생각하십시다. 아멘의 신앙 -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약하면 약한 대로 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바칩시다. 순종해나갑시다.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함마슐트는 비행기 사고로 죽기 얼마전인 1961년 9월 17일 일기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을 주옵소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사랑을 더하여주옵소서. 주 안에 살 수 있도록 믿음을 주옵소서. 나를 위하여 몸바치신 주님, 저도 주님께 예, 하고 대답하겠나이다.' 주님 앞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이렇게 순종해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 일에 복을 주시고 그 일을 책임져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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