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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앙인의 결산(시편 30
편 1절~5절)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 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인생이 저물어갑니다. 그만큼 우리의 마지막날도 가까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한 해를 결산하여야 하겠습니다. 얻은 것과 잃은 것, 성공한 것과 실패한 것---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에 성공하고 무엇에 실패했는지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성공했다면 왜 성공했고, 실패했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하나 되짚어보아야 합니다. 또한 실패의 결과가 얼마만큼 파급되어가고 있는지, 나의 행위의 후속결과가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평가의 기준입니다.
바로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있어야 합니다. 질(質)로 평가하느냐 양(量)으로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어떻게 보십니까? 질적으로 보십니까, 양적으로 보십니까? 물질적으로 보십니까, 인격적으로 보십니까? 혹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얻었다느니 잃었다느니 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중심적인 입장에 서서 내가 손해를 볼지언정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갔으면 다행이다, 나는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역사만 이루어지면 성공한 것이다---과연 이렇게 평가 내릴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내 이익만을 추구하여 턱없이 교만한가 하면 실패하여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원심적으로 보아서,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이득이 돌아갔는가, 나 때문에 누가 손해보지는 않았는가, 자상하게 살피고 깊이 반성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중요한 것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평가하는 기준에 따라서 그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지난 일년 동안에 무엇을 얻고 무엇을 성취했는가? 업적 중심으로 묻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행복하였는가, 얼마나 기뻐하였는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기쁨을 주었는가---우리가 생각해야 할 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어서 생각해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진실'의 문제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진실한 만큼 자유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한 만큼 행복합니다. 진실에서 떠나면 그 멀어진 만큼 점점 더 고통과 불행에 빠져들어 가게 됩니다. 미국 UCLA의 브라이언 킹 박사가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심리를 깊이 연구하여 거짓말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성인은 보통 일주일 동안에 열세 번의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 거짓말을 구체적으로 분류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로, 속이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남을 속입니다. 동기부터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짓말입니다. 다분히 반사회적입니다. 둘째로, 감상적인 거짓말이 있습니다. 내가 느낀 감상을 사실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대개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사람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생각 안의 것을 현실로 말하니 거짓말이 될 수밖에요. 셋째로, 과장적인 거짓말이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조금씩 보태어서 이야기합니다.
그 보탠 만큼, 과장한 부분만큼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둘러대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남한테 비난받기 싫어서, 또는 방해하기 위하여 순간적으로 둘러댑니다. 이것도 거짓말입니다.
다섯째로, 비밀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 있습니다. 진실하고 싶습니다. 거짓말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시간에 회개하지 못하고 비밀을 감추려드니 자연히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해 동안을 얼마나 진실하게 살았습니까?
또한, 미래지향적 가치에 준해서 얼마나 뜻 있는 생을 살아왔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단순하게 순간순간을 살았는가, 아니면 어려움 속에서도 확실하게 약속된 미래를 바라보면서 미래지향적 의미의 생을 살았는가, 찰나적으로 그저 하루하루를 메꾸어 가는 것이 아니라 비록 남들이 비웃을지언정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면서 살았는가--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신앙적 차원에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인내의 온전함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조급해하여 당장 눈앞에 있는 사건 하나로 울고불고하지는 않았습니까?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루어주실 줄로 믿고, 마음 든든히 참고 기다리는 인내가 과연 나에게 있었습니까? 쓸데없이 조급하게 판단했다가 뒤늦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부끄러워하지는 않았습니까? 신앙적 차원에서의 감사는 곧 성공입니다. 얼마나 감사하는 생을 살았는지, 나 스스로가 감사하는 인격으로 성장했는지 반성해봅시다. 비록 돈은 잃었으나 지혜를 얻을 수도 있고, 명예를 잃었으나 인격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얼마나 감사하였는가, 또 사사로이 주고받는 말속에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였는가---그런데 감사는 줄고 원망과 불평만이 내 마음을 지배하였다면 참으로 불행한 한 해였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얼마나 영적으로 성장하였는가 입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떠나야 할 세상입니다. 내 영혼의 성장을 놓고 한 해를 결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예술박물관에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흉상이 있습니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단편작가입니다. 그런데, 그의 흉상 아래 씌어 있는 글귀가 박물관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줍니다. '재능은 뛰어났으나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은 더욱 비참하였다.' 재능과 물질과 명예는 가지고 있었으나 그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종말은 더욱 비참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과연 내 묘비에 어떻게 써야 할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다윗이 인생을 거반 살고 자신의 지내온 생애를 회고하면서 신앙적 결산을 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본문에서 대적과 원수로 인한 고통을 그의 경험을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의 목동으로부터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많은 원수와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수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고, 또 많은 사람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스스로도 피해를 입는가 하면 피란의 길도 떠나야 했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 또한 피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 번 질병으로 고생을 합니다. 언젠가 그가 중한 병에 걸려서 자리에 누워 신음하고 있을 때, 원수가 자객을 보냈습니다. 병 문안을 가장하여 다윗에게 접근해보니 웬걸 다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되돌아가 보고하기를 "머지않아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죽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합니다. 후에 다윗이 이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마는, 아무튼 그는 이토록이나 병으로 고생한 경험도 가진 사람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보는바, 죽음의 문턱에까지, 음부의 권세에까지 내려갔던 심각한 고난을 두루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고난이나 정신적인 고난, 혹은 정치적인 고난이나 경제적인 고난 같은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난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가장 큰 고난으로 체험한 것은 다름아니라 죄로 인한 고통입니다. 베개가 썩도록 그는 참회하여야 했습니다. 일생을 죄에 대한 고통으로 고생을 합니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죄에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난을 일으켰을 때에도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다닙니다. 전에 우리아의 처를 빼앗는 죄를 범하였을 때, 나단 선지의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삼하 12:10)" 한 예언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모든 고통을 감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많은 고통의 와중에서도 끊임없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죄로 인한 가중된 고통을 겪어냅니다. 몸만 아픈 사람은 오히려 행복한 사람입니다. 몸이 아플 때에 죄책이 있습니다. 실패해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여 그 죄에 대한 가책이 고통을 더욱 가중시킵니다. 다윗은 죄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치시는 것 같은 아픈 채찍을 몸으로 느낍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저에게 떨어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봅니다. 그러므로 그는 변함없이 더 큰 은혜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대적에게서 구원해주시고, 질병을 기도 중에 고쳐주시고, 음부에서 끌어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 그 강권적 은혜에 대하여 깊이깊이 감격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울부짖을 때에 그를 치유하여 생을 연장시켜주시고, 욥이 절망에서 허덕일 때에 소망을 주시고, 엘리야가 고독에 울 때에 찾아와 어루만지며 위로해주시던 하나님의 사랑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깊이 깨달았습니다. 내가 가치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비로소 내가 인간 되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평가해볼 때에 과연 나는 쓸모 있는 존재입니까? 내가 쓸모가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합니까?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구제불능인 인간을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사랑해주시고 깊이깊이 사랑해주시기에 오늘날 가치있는 존재가 되었다,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그는 깨닫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을 이해하면서도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세 가지로 명확하게 말씀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진노의 한시성(限時性)을 말씀합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5절)." 때로 하나님께서 내게 진노하십니다. 이것은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사랑의 발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잠깐입니다. 회개하는 즉시 물러갑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동시에 노여움이 사라지는 것을 그는 보았습니다.
둘째로, 은혜성을 생각합니다. 이 진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그만큼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마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할 때면 생각나는 저의 간증이 하나 있습니다. 제 아버지 어머니는 동갑으로 마흔 하나에 저를 낳았습니다. 늦게 낳아서 아주 정성껏 키웠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마는, 아버지의 사랑은 그다지 느끼지를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워낙에 엄해놔서 툭하면 때렸습니다. 자주 매를 드는데, 어떤 때에는 그런 대로 이치에 맞기도 하는데 어떤 때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왜 맞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맞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별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퍽이나 엄했습니다. '할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를 이렇듯 극진하게 사랑하는데 왜 아버지는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일까?' 늘 불평이 많은 저였습니다. 열일곱 살 때에 마지막으로 매를 맞은 것 같습니다. 심하게 맞고는 잘못했습니다 하고 빌고 말았습니다마는, 그실 제가 좀 장난이 심해서 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매질을 하고 나가면 문밖에서 어머니가 초조하게 지켜 서 계시다가 아버지를 붙들고 한마디하십니다. "다 큰 아이를 왜 자꾸 때립니까? 이제는 말로 타일러도 될 텐데요. 도대체 당신은 아들을 사랑하기나 하는 것입니까?" 저는 방안에서 어머니의 말을 듣고 아버지가 어떻게 대답하실까 하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자식은 속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겉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오." 그러고는 훌쩍 나가버립니다. 저는 그제야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기는 하는가보다'하고 느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사랑을 처음으로 느낀 것이 그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후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구나'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대하니 더욱 그 깊은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더욱이 제가 북한에서 광산에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산에 숨어지낼 때, 아버지가 식량을 져다주셨습니다.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발각되면 속절없이 총살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늘 밤길을 걸어 식량을 지고 제게로 오셨습니다.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으련만 식량을 내려놓자마자 곧 뒤돌아 가십니다. "이놈아, 몸조심하거라"----이 한마디가 전부입니다. 이렇듯 무뚝뚝한 아버지한테서 저는 깊은 사랑을 느꼈습니다. 꼭 효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국군들이 올라와서 산을 내려가니 아버지는 이미 총살을 당해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영영 효도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어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마는, 자식들은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일쑤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비롯되는 것입니다. 잔소리도 매도 진노도 다 사랑에서 연유된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좀더 나이가 들면 깨달을 날이 있겠습니다마는, 그 때는 너무 늦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해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 진노는 적극적이고 교육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은혜의 길로 인도합니다. 진노를 통하여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을 가로막기도 하고 생각을 고치게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 가십니다. 교만을 겸손으로, 게으름을 부지런으로, 의심이 많은 사람을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상으로 교육하고 훈련시킵니다. 그러므로 진노는 하나님의 교육적 프로그램입니다.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 피아니스트가 살았습니다. 그는 피아노 독주회를 준비하고 지방신문에 광고를 내는데, 당시의 유명한 음악가인 리스트의 제자라고 자기 소개를 합니다. 물론 거짓입니다. 리스트를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연주회가 있기 며칠 전 리스트가 이 마을에 오게 되었습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거짓이 탄로 나면 음악가로서의 자신의 일생은 끝장나고 마는 것이 됩니다. 전전긍긍합니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이제는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리스트가 마을에 왔을 때, 그는 백배 용기를 내어 리스트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빕니다.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제가 아직 부족함이 많은 피아니스트인 주제에 감히 당신의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러자 리스트가 조용히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당신은 크게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앞에서 한번 연주해보시오." 연주를 시킵니다. 그는 벌벌 떨면서 리스트 앞에서 피아노를 칩니다. 리스트는 연주를 들으면서 중간중간 멈추게 하고 고쳐줍니다. 연주를 마치자 리스트가 그에게 말합니다. "단 한번이라도 내가 당신을 가르쳤으니 이제 당신은 분명히 내 제자입니다. 그리고 연주회에서 당신 연주가 끝나면 제가 한 곡 연주를 하겠습니다. 관객들에게 그렇게 소개하십시오." 그 연주회는 엄청난 기쁨과 영광의 연주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에게 용서해준다는 말 한마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실수를 다 만회해주어야 합니다. 리스트는 다 치유해주었습니다. 오히려 가산하여 영광까지 누리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이런 것입니다. 많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자복하고 회개하고 뉘우쳐야 할 것이로되 그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그 위에 하나님께서 흔쾌히 주시는 엄청난 위로와 축복이 함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시간이 여의치 않아 찾아가지 못하다가 어느 날 밤늦게 방문을 했습니다. 장로님은 침대에 앉아서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기도를 하시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낱낱이 회개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나쁜 마음을 먹은 일,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을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회개하는데 꼭 귀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 '내가 너를 참아주지 않았느냐?' '내가 이미 너를 용서했노라'---이러한 음성이 귀에 들려와 그만 회개를 잊어버리고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거듭하여 하게 됩니다." "장로님은 예수를 참 잘 믿으셨습니다. 우등생입니다." 제가 이렇게 칭찬을 해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눈물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시다. 내가 흘리는 눈물, 눈물 젖은 눈으로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신앙적 결산을 합시다. 도덕적 결산, 종교적 결산, 신앙적 결산의 결론은 죄와 참회밖에 없습니다. 절망과 실의와 낙심으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보다 깊은 은혜, 보다 큰 은혜, 보다 먼 하나님의 은혜가 여기에 있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습니까? 적자 결산을 내리지 맙시다. 흑자로 결산을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이 돌아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도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영원합니다. 너무나도 큰 역사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이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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