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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날의 괴로움(마태복음 6:25-34)

by 【고동엽】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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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날의 괴로움(마태복음 6: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선물 중에서 가장 귀한 것 중의 하나가 이성(異性)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기능이야말로 사람으로 사람 되게 하고 사람다운 행복을 즐기게 하는 선물입니다. 이성에는 추리적 기능과 비판적 기능이 있어서 인간이 인간 된 자기 생을 영위하게 된 줄로 압니다.

인간이 행복할 수 있다 하는 것은 동물적인 행복과는 다릅니다.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사람은 입맛을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음식을 통해서 사랑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정성을 먹기도 합니다. 누가 나를 위해서 마음을 쓰고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일 때는 고마운 마음으로 입맛을 즐기며 더불어 사랑을 먹는 즐거움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생각 속에 있는 것이지만 이 생각이 마침내는 우리 몸까지도 윤택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더 깊은 곳을 생각하고, 뜻을 생각하고, 사랑을 생각하고, 주고받는 마음을 생각하면서 행복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많은 카드를 주고받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용은 다 인쇄하고 이름마저도 비서를 통해 쓰는데, 이런 카드는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카드지만 마음을 담아 주어야지, 카드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것에는 시간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도 생각하고 미래도 생각하면서 인간은 현재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잠깐 괴롭다 하더라도 1년 후 또는 10년 후에 있을 일을 생각하여 미리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이 어렵고 뜨거운 여름에 일하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그래도 그의 마음속에는 거두어들이는 가을을 생각할 수 있기에 오늘의 힘든 일을 보람으로 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먼 미래를 내다보고, 먼 미래를 현재로 즐길 줄 아는 인간다운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얘기할 때 답답한 것이 있습니다. 아기가 요구하는 것을 내일 준다고 할 때 아기에게는 내일이라는 것이 통하질 않습니다.

오늘 하나 달라고 조르는 아이에게 내일 열 개를 준다고 통합니까? 지금 당장 하나가 아이들에겐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아직 생각하는 기능이 발달하지 못해 내일이라고 하는 것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가끔 학생들이 이렇게 힘이 드는 공부를 그만 하면 안되겠느냐고 물어올 때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지금은 안 하는 것이지만 10년 후에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렵다고 할지라도 공부는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10년 후에 내가 어느 처지에서 어떻게 지난날을 회고할까 하고 생각해보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젊은이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귀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인간들에게는 시간을 미리 생각하기도 하고 과거를 생각하기도 해서 행복을 얻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귀하게 축복된 기능을 우리에게 주었지만 일단 신앙에서 떠난다면 불행의 요인이 되고 맙니다. 믿음 없이 생각의 기능만 발달되면, 걱정, 근심, 고통들이 다 여기서 생기는 것입니다. 생각에서 이 모든 것들이 생기므로 생각하는 기능이 발달하면 할수록 고통이 더 많습니다.

세균학을 전공한 의사는 찻집에 앉을 때도 손을 모으고 앉습니다.

찻집 의자는 뭇사람들이 만지므로 세균이 우글우글해서 만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는 하나만 알았지 둘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세균은 물론 조심해야지 만 우리 몸에는 그것을 이기는 힘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 하느니라"(전 1:18). 생각이 많으면 분명히 걱정거리도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 생각이 많으면 고생을 사서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근심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25절)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더 귀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귀한 것과 덜 귀한 것에 우선 순위가 있어야 함은 당연한 기초 지식이나 우리는 우선 순위 없이 살 때가 많습니다.

제 친구 중에 한 사람은 몸이 아주 약해 공부를 그만 했으면 좋겠는데 기어이 공부를 하겠다고 하여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끝나자마자 바로 병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건강하지 못해 공부한 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학위를 어디다 쓸 것입니까? 무엇이 더 중요한 것입니까? 물론 공부도 중요하지만 묘비에 아무개 박사라고 쓰기 위해 공부한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합니다. 돈이 있어야 살아가지만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벌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상식적인 것인데도 가리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 잃어버린 다음 더 중요한 것에 대해 뉘우치고 있습니다.

본문 성경 구절에서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몸이 의복보다 중요하지 않느냐, 잘 먹고, 못 먹고 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잘 입고 못 입고는 그저 편하고 불편할 정도이지 이것으로 몸을 잃어서야 되겠습니까? 가끔 몸이 너무 과로해서 병이 들었고 죽기까지 되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과로해서 병이 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스트레스 때문에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육체적 과로는 사람을 오히려 건강하게 합니다. 정신적인 과로와 긴장이라는 것이 병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스트레스가 쌓이게 됩니까? 심리학자들은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실패할까 하는 걱정입니다. 사실 실패하고 나면 오히려 후련합니다. 문제는 실패할까? 할 때가 걱정이 더 많습니다. 혹시 줄을 서서 매 맞은 적이 있습니까? 차례 차례로 매 맞는 순서가 돌아오면 매 맞기까지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내 차례가 되어 당하고 나면 별것 아닙니다. 당하기 전이 아주 어렵고 스트레스가 쌓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실패할까, 망할까, 잘못될까 하고 걱정하는 것으로 긴장되면 이 긴장이 병을 만들고 있습니다.

둘째로 성공이 또 한 번 사람을 괴롭힙니다. 성공하면 좋을 것 같지만 성공하고 나면 불안합니다. 돈을 벌었으면 돈을 지켜야 하고 명예를 얻었으면 명예를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명예를 얻기보다는 지키기가 더 어렵습니다. 칭찬을 듣고 칭찬을 지켜가기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차라리 욕을 먹고사는 것이 편할 때가 있습니다. 성공이 좋아 보이지만 이것이 또 한 번 사람을 긴장시키는 것입니다.

셋째로 도덕적 문제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부정할 수 없는 죄책감이 있습니다. 돈 벌었다고 하지만 못할 짓 많이 했고, 출세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나를 괴롭히고 따라다니는 죄책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게 됩니다. 과로가 문제가 아닙니다. 긴장이 문제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27절). 근심하지 말라고 본문에서 두 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걱정처럼 필요 없는 것은 없는데 이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걱정은 자기 마음에도 나쁘고, 기분에도 나쁘고, 건강에도 나쁘고, 창의력에도 나쁘고, 지혜에도 나쁘고, 또한 남에게도 나쁩니다. 걱정은 정말 필요 없는 것입니다. 걱정도 일종의 습관이기도 합니다. 걱정하는 버릇이 있으면 자꾸 하게 됩니다. 위장병의 80%가 정신적인 걱정에서 온다고 하니 정말 걱정은 큰 병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신경성 병을 가져서는 안되겠습니다. 믿음의 소재가 어디 있기에 걱정에 매여 살겠습니까? 헛된 일인 줄 알면서 걱정에 싸여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내 스스로 내 근심을 이기지 못하는 첫째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자기 의에 도취된 교만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믿으면 근심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나를 완전하게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깨끗하게 그리고 발이 땅에 닿을 때까지 내려앉은 겸손한 신앙의 사람이 되면 걱정은 없어집니다.

또 다시 세 번째로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이 네가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새를 먹이시고 백합화를 입히십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생명을 지속할 양식을 주시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인데 어째서 이방인들처럼 먹고 마시는 것만 걱정하느냐 말입니다. 여기서도 신앙이 문제입니다. 혹 과거가 괴롭습니까? 과거는 십자가에 다 묻어버려야 합니다.

과거에는 어떤 사람이었든지 문제될 것 없이 십자가 밑에 완전히 장사지내고 미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에 다 맡겨 버리면 그만입니다.

문제는 현재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미국의 어느 돈 많은 부자가 잭슨이라는 흑인 아주머니를 가정부로 두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돈 문제도 있었지만 가정 문제도 복잡했습니다. 항상 다투고 근심하여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이루고 술을 마셔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잭슨은 언제나 편안하고 찬송하며 명랑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나는 이렇게 돈이 많아도 걱정이 많은데 아주머니는 남의 집에 살면서 늘 기쁘니 그 이유가 뭐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주머니가 말하기를 "나는 당신처럼 돈이 없으니 잃어버릴 염려 없고, 집이 없으니 불이 날까 염려 없고, 명예가 없으니 누가 나에게 욕할까 하는 걱정 없고, 이미 병들어 죽을 뻔한 몸이니 건강 때문에 걱정할 것 없고, 이제 다시 아프면 불편한 몸 벗어버리고 하나님께로 가니 아무 걱정도 없으며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태까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벌었다는 것이 근심을 모은 것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럼 나는 무엇 때문에 걱정하며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적게 느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몸(육체적)에 국한하기 때문입니다. 몸이 쑤시고 아프면 아픈 것으로 족하고 슬픈 것은 없습니다. 혹시 배고픈 일이 있었습니까? 배고픔, 그것뿐이지 죄책까지 느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해를 본다면 물질 뿐이요, 우리가 심령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몸을 해(害)해도, 영을 해할 수 없는 자는 두려워할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다만 몸뿐입니다. 역설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몸이 약함으로 믿음이 강하게 되고, 물질에 대하여 손해를 봄으로 우리는 신령한 것에 대한 부(富)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미래를 바라봅니다. 먼 미래를 바라보고 오늘을 기뻐합니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고 그 영광 안에서 현재의 고통은 다 소화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미래지향적인 영광으로 현재의 고난을 다 소화해 버리고 맙니다. 그 큰 행복 안에서 현재를 풀이합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산하는 여인에 비유했습니다. "한 여인이 해산하는 날이 가까워 올 때에 두려워하나 해산한 다음에는 사람 난 기쁨으로 인하여 지난날의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해산의 고통이 어려운 것이지만 앞에 있는 영광과 기쁨을 바라보며 해산의 수고를 그대로 견디고 나가는 것이 여인의 마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앞에 있는 영광, 우리 앞에 있는 미래는 오늘에 당하는 이 어려움을 지극히 적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나아가서는 시간의 흐름을 알고 있습니다. 시간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어떤 어려움도 시간과 함께 뜻이 달라지고 어떤 영광도 풀의 꽃처럼 시들고 맙니다. 우리는 시간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의 아름다움도 그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풀러스 알파로 시간을 함께 생각합시다. 오늘의 아름다움이 내일의 추한 모습이 되고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영광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는 백을 헤아려 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열을 헤아려도 좋습니다. '시간'을 기다려 봅시다. 농부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우리의 관심사이어야 합니다. 내 소유가 문제되지 않아야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혹 암담합니까? 또 금년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가가 오를 것인가? 전쟁은 어떻게 되나? 걱정거리가 많습니다. 그러나 내일 일은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께 맡깁시다.

그리스도인도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은 내일 일을 위한 걱정이 아니요, 죽음에 대한 걱정도 아니요, 죄에 대한 형벌의 걱정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룰까 하는 걱정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오늘의 잔을 겸손히 받아, 믿음으로 나갈 뿐입니다. 한 날의 괴로움이란 하나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지 앉아서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의 걱정은 행동으로 옮기고 보면 다 없어집니다.

오늘이라고 하는 것은 행함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주어진 여건을 의미하고 현실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것으로 족합니다. 적어도 미래가 나를 괴롭혀서는 안됩니다. 과거가 괴롭힐 것도 없습니다. 오늘 하루 이대로의 고난으로 족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기도 : 아버지 하나님,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무 능력도 대책도 없으면서 먼 미래를 걱정하고 또 이미 지난 일로 염려하면서 변변치 않은 자존심과 교만 때문에 근심과 걱정에 사는 저희들을 이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내일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지나간 일은 십자가에 맡기고 주어진 오늘의 여건 속에서 한 날의 괴로움을 족하게 여기는 귀중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오늘 나를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과 내 현실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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