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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게 하소서(요한복음 17장 20절~26절)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추운 북방에 사는 에스키모족은 오늘날까지도 원시적인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서 큰 지혜를 엿보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곰을 사냥할 때, 세 사람 이상이 동맹하는 이른바 '삼방벽법(三防壁法)'이라는 방법을 씁니다.
곰을 발견한 사람은 창을 던질 태세를 취하면서 약속된 장소로 곰을 유인해 들어갑니다. 그러면 먼저 와서 좁은 길목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이 정면에서 곰을 향해 창을 던집니다. 그러나 곰이 한 번 맞았다고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계속해서 쫓아옵니다. 다시 도망가듯이 유인해서 약속된 그 다음 장소로 곰을 끌고 들어갑니다. 그러면 또 먼저 와서 숨어 대기하고 있던 사람이 곰을 향해 창을 던집니다. 이렇게 몇 차례 없이 거듭하여 곰을 잡는 것입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잡힌 곰은 동참한 사람들에게 공평히 분배됩니다.
우리는 하나되어야 합니다. 혼자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건 어느 민족이건 어느 사회건, 하나됨은 절대적인 명제입니다. 하나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잘살고 못살고, 번영하고 실패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사(生死)의 문제입니다.
오늘날같이 복잡다단한 세대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팀워크(teamwork)가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해낼 수가 없습니다. 일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고, 전쟁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여러 가지 연구의 성과도 이제는 팀워크에 달려 있습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혼자의 머리로 해낼 수 없는 것이 당면한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개별적으로 보아서는 퍽 우수한데, 팀워크가 약하다는 점입니다. 협력하지 못합니다. 서로들 개인 플레이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같이 내가 잘났다고 합니다. 그러니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이민사회에서 우리 교포들만큼 부지런한 사람들은 없다고 합니다. 부지런으로 소문나 있습니다. 한 마을에 한국사람이 들어와 가게를 내면 같은 종류의 가게를 하는 그곳 사람들은 너도나도 "아이쿠, 큰일났구나!" 한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뛰는데 그 부지런을 저들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장사 다했다'고 걱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 한국사람 하나가 더 들어오면 '이젠 됐다'며 안심한다고 합니다. 저들끼리 싸우다가 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예 그렇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일례로 의학계를 보십시다. 우리는 한방과 양방을 둘 다 쓰고 있습니다. 한약과 양약을 구분합니다. 아는 대로 동양의학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입니까? 그런데 그 역사에 비하여 오늘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발전은커녕 제자리걸음입니다. 서양의학이 그 짧은 역사에도 우리의 의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흔히 병원이니 의사니 할 때에 이 모두가 서양의학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언젠가 제가 이 분야의 책을 읽어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기막힌 이유가 있습디다. 일반적으로 한의사들은 힘을 들여 연구해서 아주 귀한 처방(處方)을 하나 얻게 되면 비방(秘方)이라 하여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고 혼자만 간직한다고 합니다. 아들이나 수제자에게조차 전수하지 않고 죽어버립니다. 그러니 발전 D똕TXT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밀한 처방이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그 처방을 공개하여 여러 사람으로 알도록 하고, 나아가 그들의 지혜와 지식을 한데 모아 연구했더라면 보다 훌륭한 의학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혼자 끼고 있다가 망한 것입니다. 반면에 서양의학은 어떻습니까? 환자 하나를 놓고 여러 사람이 진찰을 합니다. 어떤 약을 투여해야겠다, 무슨 요법을 써보자, 수술은 어떨까---공개적으로 논의한 후에 시술하게 됩니다. 무릇, 비방이라는 것이 말썽입니다.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협력하지 못하면 망합니다.
오늘날은 어느 것 하나를 연구해도 이를테면 'A의 연구'가 아니라 'A팀의 연구'가 됩니다. 혼자 연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인이 해낼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의 머리와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공위성 하나를 우주에 쏘아 올린다고 할 때, 그 인공위성을 설계한 사람은 200명이요, 공장에서 직접 만드는 데에 참여한 사람은 수십만 명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연구하고 만들어서 마침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무릇 공동으로 개발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커다란 결점을 안고 있습니다. 저마다 '하나되어야 한다' '협력해야 한다'라고 구호는 외치지만, 실상 하나됨은 간 곳이 없고 분열만이 있다는 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보는 바, 바벨탑 사건을 보십시다. 대홍수를 경험한 사람들은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에 이르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하여 탑을 높게 쌓으려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저들의 교만을 심판하십니다. 언어를 혼잡케 하여 분열시키십니다.
분열은 교만한 인간에게 내려지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번영을 찾고, 불신앙적으로 안정을 구하는, 그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깊이 생각한다면 분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알고 보면 하나됨, 곧 일치에도 오해가 많습니다. 첫째, 조직적 일치입니다. 제도적으로 묶어놓고 마치 하나가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겉뿐이지 그 속은 엉망입니다. 저마다 분열되어가고 있습니다. 둘째, 준(準) 영적, 혹은 정신적 일치입니다. 마음과 생각뿐이지 실생활에서의 일치가 없습니다. 셋째, 행정 위주의 일치입니다. 이것은 일치로 향한 수단입니다. 일치를 다른 목적을 위하여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로서의 일치가 아닙니다. 이러한 일치를 또 다른 말로 야합(野合)이라고도 합니다. 자신의 이권을 위하여 협력하는 체할 뿐입니다. 여기서 더 큰 분열이 이루어짐을 봅니다. 넷째, 획일주의적 일치입니다.
다양성을 무시하고, 유기적 관계를 무시하고, 개인의 개성을 부정하는 전체주의적인 일치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나 그 속에는 엄청난 불안과 분열이 있습니다. 실로 무서운 일입니다.
다섯째, 무조건적인 일치입니다. 요즘도 보면 "무조건 합치자" "무조건 밀어붙이자" 하면서 일마다 '무조건 무조건'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개성을 무시하는 일이요, 진리를 떠난 일입니다. 화합이 먼저가 아니요 통일이 먼저가 아닙니다. 진리가 먼저요 의와 공의가 먼저입니다. '무조건'이라니, 참으로 무서운 소리입니다. 또 하나의 집단적 죄악입니다.
북녘 땅에는 밤이고 낮이고 눈만 뜨면 보아야 하는 구호가 있습니다. '절대화, 신조화, 무조건성'---이 세 마디가 곳곳마다 크게 써 붙여져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렇게 한다고 하나되는 것입니까? 아무리 하나로 묶어봐도 소리뿐입니다. 그 속은 저마다요 나름대로 입니다. 뿔뿔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조용하다고, 묘지처럼 조용하다고 해서 하나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오라면 나오고 가라면 가고, 그렇다고 절대로 하나가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일치는 참 일치가 아닙니다. 하나됨은 절대적 관계와 상대적 관계의 바른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절대화한 의견, 절대화한 사상 속에는 결코 하나됨이 없습니다. 상대적 가치의 것이 절대화한다던가 절대적 위치로 올라가면 안됩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의견, 이데올로기나 기술 같은 것은 모두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어느 순간, 곧 절대화하는 순간에 분열이 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절대화하여야 할 가치의 것이 상대적인 것으로 전락될 때에 분열이 옵니다. 하나님의 뜻과 진리와 공의가 무너질 때, 또한 그것이 상대적 진리로 평가절하 될 때에 분열이 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교하시던 중에 마지막으로 하신 기도의 말씀입니다.
제자들로 말미암아 자신을 믿게 될 성도들의 신령한 연합을 위한 기도입니다. 모든 사람의 일치를 위한 기도, 하나됨을 위한 기도가 본문 가운데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됨의 원리, 하나됨의 진리가 상세하게 계시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 절대적인 하나님의 공의---이렇게 절대화하면서 여타의 모든 문제는 다원적이요 상대적이요 가변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됨의 원리가 이루어집니다. 더욱이 오늘의 본문에는 신비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그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찬양하며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됨의 결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그 영광을 이해하고 영광을 따라서 하나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한 말씀입니다. 그 영광 안에서 이미 하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이것을 지키고, 이것을 위하여 사는 데에 요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같습니다. 그런데 왜 양반이니 상민이니 하여 신분이 나누어져 있습니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높은 자와 낮은 자가 왜 구별되어 있는 것입니까? 사람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제도입니다. 똑같은 사람을 서로 다른 사람인 양 나누어놓은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동질성을 확대해야 하겠습니다. 대부분이 같다, 다른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99퍼센트가 같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부터 하나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부부관계를 보십시다. 남편과 아내, 몸은 둘이지만 분명 하나입니다.
같은 사람이요 같은 운명이요 같은 명예를 가집니다. 그런데 왜 부부간에 불화가 있습니까? 왜 화해하기 어려운 것입니까? 서로 다르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결혼해서 수년을 함께 살아왔습니다. 자식들도 생겼습니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명예도 하나요 재산도 하나요, 행복도 불행도 하나인 것입니다. 운명은 이미 결정 난 것입니다. 그런데 제 남편을 못났다고 흉보니 그 아내 또한 얼마나 못났습니까? 아내가 못됐다고 책망하는 남편도 똑같습니다. 결국 부부는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명예를 깎아 내리면 내 명예가 높아질 것이다, 착각입니다. 상대방이 불행하고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한 배를 타고 항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높여야 나도 높아지고, 상대방을 사랑할 때에 나도 사랑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요, 앞으로도 하나요, 완전하게 한 운명이라는 이 엄연한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상대방을 울리면서 나는 웃을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하나 안될 이유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반이니 상민이니, 가진 자니 못 가진 자니 하여 대단한 차등이 있는 것처럼 구별합니다마는, 우리는 다 같은 죄인입니다. 다같이 살다가 다같이 죽을 사람입니다. 더 가졌으면 어떠하고 못 가졌으면 그것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좀더 낫다고 뭐가 그리 대숩니까? 특별히 혼사문제를 놓고는 말이 많습디다. 대학을 나왔느니 못나왔느니, 나왔다면 일류대학이냐 삼류대학이냐 따집니다. 둘이 사는 데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까? 가만히 보면 대화를 하려들지도 않으면서 대화가 안 된다고 합니다. 대화를 시도하기나 했습니까? 이렇게 쓸데없는 말을 해가면서 차별을 하려고 합니다.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 똑같습니다. 동질성을 극대화하고 이질성을 극소화해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사람은 똑 같다---이것을 직시할 때에 비로소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됨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 '선물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포도나무의 비유를 생각해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에도 큰 가지가 있고 작은 가지가 있습니다. 큰 가지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고 작은 가지가 되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마는, 한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는 같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본문에서 깨달아야 할 것도 바로 이 '제자성(弟子性)'에 대한 이해입니다. 선생님은 예수님 한 분 뿐이요 우리는 모두 제자입니다. 그는 보낸 사람이요 우리는 보냄 받은 사람입니다. 저마다 맡은 바 사명이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의 목적이 있고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지체(肢體)입니다. 모두 제자입니다. 모두 종입니다. 그만이 선생이요 그만이 주인입니다. 예수님 외에 섬김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섬기려 할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섬기려 하는 자는 하나될 수 있으나, 섬김을 받으려 하고 내가 주인 되려고 할 때에는 분열뿐입니다. 다함께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섬기는 자세로 임할 때에 하나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존재의식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궁극적 목적을 분명히 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경륜과 종말론적 미래를 바라보면서 신앙적으로 이해해봅시다. 이러고도 하나되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제 그 크신 뜻 안에서 사랑합니다. 지체가 서로 사랑합니다.
마침내 하나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다시 말씀합니다.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24절)"---구체성과 현실성을 말씀합니다. 생각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우리가 하고 그리스도께서 가시던 길을 우리가 갑니다. 그 현실성 속에서의 하나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영어에는 '하나됨'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여럿 있습니다. 그 하나가, '유너니미티(unanimity)'---의견상의 합의를 가리킵니다. 그 둘이, '유니포미티(uniformity)'---조직과 형식상의 하나됨입니다. 그 셋이, '유니온(union)'---개인을 무시한 정치적인 일치를 가리킵니다. 곧 동맹입니다. 그 넷이, '유니티(unity)'---정신적으로, 혹은 생활을 겸한, 다시말해서 내적․외적으로 일치됨입니다. 아마도 성경에서 말씀하는바 일치라 함은 넷 가운데 'unity'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요즘 미국사회에서는 '미이즘(meism)'이라는 용어를 많이 쓴다고 합니다. '나 주의'입니다. 에고이즘(egoism)과는 또다른 것입니다. 나와 나에 속한 집단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이야 살든 말든 신경쓰지 않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미이즘,' 집단적인 사회악입니다. 나만을 생각합니다. 아는 대로 세계가 얼마나 좁아졌습니까? 이제는 지구촌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씁니다. 세계는 하나임을 강하게 느낍니다. 한 민족이 망하면 다른 민족도 망합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다른 사람도 죽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사람이 살아야 나도 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득불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한 사람의 불장난으로도 이 나라는 망할 수 있습니다. 세계 전체가 망하고 말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됨은 순수한 본질적 이해로부터 시작됩니다.
미국에 나이 많은 알바니안 기독교인들이 세운 교회가 있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피하여 모국인 알바니아로부터 나와 미국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입니다. 점차 경제적으로 자리가 잡혀가자 저들끼리 조그마한 교회를 세웁니다. 그러나 소위 이 '교포교회'에 날이 갈수록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를 둘러싸고 싸움박질이니 필경 분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때에 한 나이 많은 교인이 대표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고통과 핍박을 주시옵소서. 터키로부터 그 많은 핍박을 받을 때에 우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하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핍박이 없으니 이렇게 분열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핍박을 주시옵소서." 참으로 귀한 기도입니다. 우리 민족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나 역사의 전환기에는 곧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치․경제적으로 좀 살만하니까 분열하고 있습니다. 가정도 그렇습니다. 가족 중에 하나라도 고통을 당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온 가족이 하나가 됩니다. 생각과 뜻이 순수하여 쉽게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좀 여유로워지고 보면 금방 분열하고 시기하는 것입니다. 잘살아서 분열할 바에야 차라리 가난한 것이 낫다, 고통이 끊일 날이 없어야 한다---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됨의 귀중한 의미를 고통 속에서만 깨닫게 되다니, 이것이 불행의 원인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이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됨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하나됨을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21절)"---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가 되었습니까? 그의 오심과 그의 사역과 그의 거룩한 역사는 물론이거니와 가장 중요한 사건, 그 극적 장면을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나의 원(願)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그 부조리한 십자가를 받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제물로 온전히 위탁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설령 그것이 참혹한 고난을 동반할지라도 그 뜻을 받아들이시면서 하나되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하나되신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되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그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때로 자기들의 의견도 있었을 것이요, 더러 육신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알고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주님의 뜻만을 위하여 나아가 마침내 순교에까지 이릅니다.
순교를 통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되었습니다. 거저 되는 일이 아닙니다.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뜻을 상대화해버리고 다른 누구의 뜻도 다 상대화해버리고, 오직 주님의 뜻만을 절대화할 때에, 진리만을 절대화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만을 절대화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됨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렇다고 하나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함께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하나되는 것입니다. 가끔 듣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우리 교인 가운데도 그토록 오래 결혼생활을 해오면서도 늘상 티격태격하면서 불편한 생활을 못 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서 "교회 나갑시다"하고 두 내외가 함께 교회를 나오다보니 어느 겨를엔가 사이가 좋아진 것입니다. 언제 한번 특별하게 대화를 나눈 적은 없는데, 남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내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남편이 성경을 읽고 아내도 읽고, 남편이 기도하고 아내도 기도하고---이렇게 하다보니 자연히 몸과 마음과 영혼이 온전하게 하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제야 서로를 가까이 느끼게 되었다면서 이렇게까지 말합디다. "진작에 예수 믿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나됨은 신령한 것입니다. 다함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요 절대적인 진리 앞에 순복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확실한 계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이들로 하여금 하나되게 하소서." 마침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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