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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거울을 보는 사람(고린도전서 10장 1절~11절)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6․25동란 시절, 저는 최일선에 참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군대생활은 보급이 별로 좋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저는 틈틈이 교회에 나가고 있었는데, 그 거리가 십리나 되어 거의 한 시간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청년모임에서는 선물을 교환한다고 합니다. 모두들 가진 것이 없던 시절이어서, 서로 마음에 드는 선물을 주고받을 만한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만그만한 물건들을 주고받았는데, 저는 조그마한 손수건과 손거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추어보고는 스스로 놀랐습니다. 제 얼굴을 몇 달만에 처음으로 보았거든요.
거울도 없거니와 군복을 입고 사니 거울을 볼 일도 없고, 또 볼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틀림없이 제 모습인데 아무리 봐도 낯선 얼굴입니다. 제 모습이 너무도 달라져 있었던 것입니다.
'본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하나의 지식이 성립하는 데에는 '본다'는 문제가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선결 조건이 요구됩니다. 첫째로, 보고자 하는 분명한 대상물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대상물을 보는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있어야 하고, 내 눈이 밝아야 합니다. 내가 눈을 뜨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상과 주체가 있다 하더라도 조명하는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밝은 빛으로 조명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물체를 볼 수 있고. 그 물체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의 경우에는 문제가 다릅니다.
내가 나를 보고자 하나, 내가 나를 볼 수 없습니다. 내 귀와 내 눈을 내가 보지 못합니다. 반사되는 물체에 나를 투사시킴으로써 비로소 보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 반사 되는대로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나를 볼 수 있는 방법입니다. 마음의 거울이 흐려진다던가, 더러워진다던가, 깨어진다면 나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보인다 해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빗나간 자기 인식을 초래합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 자기도 모르는 엄청난 과오에 빠진다는 말입니다. 이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말씀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고전 13:12)." 거울이 훤하지 않고, 왜 희미합니까? 이천 년 전에는 지금것과 같은 거울이 없었습니다. 돌을 매끈매끈하게 갈아서 거기에 비추어보든가, 물을 놓고 그 물에 비추어보던 것이 거울의 역사입니다.
당연히 희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리에 수은을 칠하여 만든 오늘날과 같은 거울은 13세기부터 만들기 시작하였고, 우리가 이렇게 사용할 수 있도록 보편화된 것은 16세기부터입니다. 거울이 아니고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거울의 이치가 참으로 신비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울의 역사가 별로 길지 않습니다. 거울에 얽힌 민담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시골의 어느 선비가 과거를 보러 상경하였다가 낙방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선비는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사려고 방물가게를 돌아다니다가 예쁘게 생긴 거울을 하나 샀습니다. 생전처음으로 '거울'이라는 물건을 본 시골 선비는 신기하고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사랑의 증표(證票)를 삼아야겠다. 그 사람이 보면 참 좋아할 거야.' 이런 생각으로 집에 왔는데, 때마침 아내가 방에 없어 바람벽에 그것을 반듯하게 걸어두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사이에 아내가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벽 쪽을 보니 예쁜 아가씨가 있어요. 거울을 모르는 아내는 순간적으로 '웬 아가씨야? 이 양반이 과거 보러 서울에 가더니 첩을 하나 얻어왔나보네. 이런 몹쓸 양반이 있나?' 남편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아내는 목놓아 웁니다. 그 소리를 듣고 시어머니가 달려왔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이가 어디서 예쁜 색시를 첩으로 데려왔어요." "뭐, 뭐라고?" 그러면서 시어머니는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웬 할머니가 자기를 보고 있습니다. "예쁘기는커녕 어디서 할망구를 데려왔구나. 같은값이면 젊고 예쁜 색시를 데려올 것이지, 뭐 저런 할망구를 데려왔을꼬!" 이제는 두 여자가 같이 웁니다.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진 방으로 영문을 모르는 시아버지가 들어왔습니다. 거울을 보는 순간, "아이고 아버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하며 넙죽 엎드리어 절을 합니다. 자기 얼굴이 선친의 얼굴과 꼭 닮았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생전처음으로 거울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의 얼굴이 자기의 얼굴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나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국가, 정치, 사회, 경제를 논하기 전에 먼저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습니다.「손자병법」에서도 '먼저 나를 알고, 그리고 적을 아는 자는 백전 백승(百戰百勝)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를 모르는 자는 나가보나마나 패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우리 스스로 알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흐려졌고, 눈이 어두워졌고, 거울이 깨졌고, 거울이 변질되어서 나 자신을 볼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전적인 타락입니다. 내가 나를 볼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성경의 빛으로, 성경의 가르침으로만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거울이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거울입니다. 그 사랑에 나를 비추어보면 나의 사랑이 얼마나 허위이며 거짓인가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 나의 믿음을 알고 싶습니까? 야고보서를 읽어보십시오. 나의 믿음이 얼마나 죽은 믿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의 현주소를 알고 싶습니까? 시편과 잠언을 읽어보십시오. 앞으로 전개될 내 생애를 알고 싶습니까? 베드로전서를 읽으십시오. 겸손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성경을 구구절절 읽어보십시오. 내 얼굴, 내 마음, 내 인격, 내 과거, 내 미래를 알게 됩니다. 성경 말씀에 비출 때에, 성령이 역사 할 때에 나의 참모습을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 회개함으로 거듭날 때에 그 심령이 밝아져 비로소 나를 바로 보게 되고, 하나님을 바로 보게 되고. 이웃을 바로 보게 됩니다. 나 자신을 보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입니다. 타인에게 투사된 내 모습을 통해서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이라도 집에 돌아가시면 시험삼아 전화를 걸어보십시오. 그리고 전화 받는 사람의 목소리를 주의해서 들어보십시오. 그 음성이 친절하거든 '내가 바로 되었구나' 생각하고, 퉁명하게 나오거든 '내가 뭔가 잘못되었구나' 판단하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간혹 전화를 걸었다가 상대방이 친절하지 않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반응이 왔을까요? 저녁에 걸었습니까? 그러면 '늦도록 수고하시네요'라고 한마디하십시오. 이른 아침에 걸었습니까? '일찍 나오셨군요.' 이렇게 한마디만 인사를 해보세요. 단 한마디의 말에 상대가 친절해집니다. 반응(response)이 달라집니다. 저는 아무 때나 전화해봐도 항상 친절하던데요. 나긋나긋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 사람이 내 얼굴을 압니까? 내 신분, 내 지위의 고하(高下)를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내 음성 한마디를 듣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불평할 것입니까? 뱉은 대로 되돌려 받습니다. 거울의 이치와 같습니다. 투사된 대로 반사됩니다. 누구를 원망할 것입니까? 거울을 보십시오. 내 이웃이 바로 거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하고 진실하게 대하거든 마음을 놓아도 되겠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어쩐지 불친절하거든 거울을 보십시오.
세상을 원망할 것 없습니다. 나 자신을 먼저 살펴보십시오. 거울을 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가 서로의 반사체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의 조명을 받으며 이웃을 통하여 반사되는 나의 모습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수렴할 수 있는 진실함과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한 걸음 나아가 생각해봅시다. 어떤 두 청년이 굴뚝 청소를 합니다. 청소를 끝내고 밖으로 나온 두 청년은 서로 마주보고 서서 "네 얼굴이 왜 그 지경이냐?" 서로 흉을 봅니다. 두 눈만 반짝반짝한 데다 얼굴은 새카맣다고 서로 비웃었답니다. 비웃을 상황입니까? 상대방이 검은 얼굴이면 내 얼굴도 검으려니 생각해야지요. 같은 배에 탔는데 누가 누구를 원망할 것입니까? 누가 특별히 의인이며, 누가 죄인입니까? 오늘 이 세대에 의인이 어디 있으며, 어느 특정의 사람만을 죄인이라 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얼굴이 검으면 내 얼굴도 검은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다른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시빗거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 내 얼굴을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로 4절의 말씀을 읽어보십시다.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1절)" "각각 자기 일을 살피라(4절)"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볼 때에 나의 실수를 볼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볼 줄 아는 - 거울을 보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3절, 24절 말씀에 "그는 거울로 자기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라고 했습니다. 거울을 볼 때에는 무엇 무엇이 잘못되었구나 알았지만, 건망증이 심하여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효입니다. 아무런 결과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내 마음으로 나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를 빼어라(마 7:5)"라고 극단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3)" ----먼저 네 눈 속의 들보에 관심을 가지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엄청난 죄인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거울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어 헤매며 허랑방탕(虛浪放蕩)할 때의 그는 제 모습을 모릅니다. 제 처지를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을 떠올렸을 때,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자기를 아버지에게 비추어보고야 그 크신 사랑과 자기 존재의 고귀함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의 집을 생각할 때에 자기가 그 집의 귀한 아들임을 깨닫고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거울을 본 것입니다.
또한 성경 역사를 보면서 나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의 현주소를 확인해야 합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죄악의 길로 간 사람들은 모두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우상숭배 하는 자가 되지 말라(7절)."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되지 말자(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간음하다가 무서운 저주를 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간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9절)" - 불신앙적인 자세로 주를 시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10절)" -- 서로 원망하다가 나라도, 가정도, 개인도 모두 망하고 만 역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망하지 말라, 역사를 거울로 보고 다시는 원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사건을 보면서 나를 보고, 이웃을 보면서 나를 보고, 나의 자녀를 보면서 나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거울로, 역사를 거울로 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든 거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숲 속을 지나가던 어떤 사나이가 다리를 잃은 여우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저놈은 무엇을 먹고살까?' 궁금하여 자세히 관찰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호랑이가 사냥을 하여 마련한 짐승을 먹을 만큼 먹다 내버리고 가면 여우가 한 다리로 슬금슬금 기어가서 남은 살점을 뜯어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장면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는 정말 오묘하구나! 움직일 수 없는 여우조차 먹여살리시는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나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먹을 것이 생기겠구나'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꺼벅꺼벅 앉아 기다리는데 배는 점점 고파오고 죽을 지경이 되어갑니다. 거의 아사(餓死) 직전까지 다다랐을 때에 근엄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거짓된 길로 들어선 사람아! 참을 향하여 눈을 떠라! 여우의 행위는 본받지도 흉내내지도 말고, 호랑이의 행위를 본받아라!"
여러분, 나 자신을 어디에 투사시키고 있습니까? 도대체 어디에 비추고 있습니까? 똑바로 비추어야 합니다. 바른 투사체에 비추어야 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투사체를 향하여 나를 비추면 순식간에 나의 모습은 이지러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진지하게 나의 참된 모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안에 감추어진 나 자신을 발견할 때, 주님 안에서 나의 참모습을 보게 될 때,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불평과 원망이 남아 있습니까? 자신의 진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절망하고 낙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경이 조명해주는 나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거울 없이 스스로 나를 보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른 거울을 보십시다. 밝은 거울을 보십시다. 밝은 눈으로 보십시다. 그리하여 다가오는 미래의 운명을 내다봅시다.
약속된 주의 나라와 하나님의 경륜과 그의 부르심과 그 사명을 보십시다.
거울을 보라 -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警戒)로 기록하였느니라(11절)." 모든 사건이 나 자신, 오늘 여기에 있는 바로 나 자신을 위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 자신의 나됨을 위하여,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바로 서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나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의 모습을 바로 찾고 그 은혜 안에서 승리의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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